광고 세계에 대한 구체적 싫증

by 백승권

혐오나 증오까지는 아니고 싫증에 가까운 감정에 휩싸여 있고 이런 부정적 감정엔 흔히 복리가 붙어요. 싫다고 하면 더 싫어져요. 한번 싫어지면 계속 싫어지고 계속 싫어지다 미친 듯이 싫어지고 관련되고 이어진 모든 것에 전염됩니다. 자기혐오는 필수고 타자 혐오는 옵션 같지만 선택권이 없어요, 대다수 같이 따라옵니다. 기원은 찾으면 끝도 없지만 이건 애초 전제된 부분에 대한 재확인에 가까워요. 타자의 관점을 바꿔서 생존하는 세계에서 자신만의 관점을 유지하며 타자의 입장을 텍스트로 바꾸려는 시도는 판타지에 가깝죠. 그렇게 될 거라고 해서 그렇게 믿으며 합의하는 방식. 이런 의견을 반박하는 75억 개 정도의 추가 의견이 있겠지만 수치적 정량적 근거를 제시해 봤자 이제 소용없어요. 다른 희망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잠시 안 보일 뿐.


지금은 이전보다 더 무가치하게 보여요. 시간과 노력을 들일만한 부분인가라는 의문에 대해 긍정적인 답변을 돌려주기 어려워요. 아니 무슨 월급 받는 직업에 의미와 가치와 자아실현을 따지나...라는 반문에 나도 쉽게 끄덕였으면 좋겠어요. 그걸 할 줄 모르니 여기까지 왔고 여기까지 오다가 잠시 갸우뚱하고 있어요. 그동안 외부적 내면적 세계와 세계관의 변화가 있었고 지금은 '광고 메시지, 광고 카피'에 대한 어떤 아니 해당 업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보다는 거리감에 대한 필요성을 느낍니다. 시간과 자본과 인력이 결합한 하나의 거대한 크리에이티브 결과물로 본다면 어떤 가능성이든 잔존하고 인간적 애정이야 남길 수 있겠지만 요즘은 다른 의자가 필요해요. 그동안 가능한 모든 상상력을 동원해 둘러싼 외벽을 칠해왔지만 지금은 문 없는 여섯 개의 면으로 둘러싸인 회색시멘트벽만 느껴져요. 점점 안으로 밀려 들어와 좁아지고 나는 납작해집니다. 쏘우의 한 장면처럼.


멀리서 보면 같은 (멀리서는 거기서 거기처럼 같아 보이는) 일을 오래 한 자의 지루한 한숨으로 보일 수 있어요. 그렇기도 하죠. 다 쏟아부을 가치가 있는 대상, 가치가 사라지면 대상과 같이 있어야 하는 이유도 희미해집니다. 광고는 여전히 브랜드의 좋은 의도와 고객의 일상을 연결하고 이후 인생을 바꿔줄 수도 있는 끝내주는 역할을 지닌 비즈니스 영역이지만 다른 접근이 필요해요. 세계는 알아서 변하고 있으니 변화가 필요한 건 내가 맞겠죠. 내가 바뀌어야 해요. 그런데 이게 속도와 질량의 차이인지 정확히 분간과 파악이 어렵지만 이 파도타기가 더 이상 시도 의지가 생겨나지 않아요. 나만의 스킬로 나만의 바이브를 탈 수는 있죠. 그런데 여기서는 아니에요. 이 지역의 수면 위에서 묘기를 부리고 싶지 않아요. 다른 무대를 원해요. 나는 아직 춤을 출 수 있고 추고 싶고 가능할 뿐 아니라 잘하니까.


진화론을 잠시 떠올립니다. 잘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적응의 문제라고. 내가 지금 높아진 가지에 매달린 열매를 삼킬 수 없을 만큼 (살아남은 기린들처럼) 모가지가 늘어나지 않는 것일 수도 있어요. 뒤에서 헉헉거리며 쫓아오는 치타의 속도보다 느린 얼룩말이나 가젤일 수도 있습니다. 이미 잡아 먹혀서 포식자의 소화기관에서 마지막 꿈을 꾸며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죠. 뭐가 문제인가요. 아무것도 문제가 아니고 나만 문제일지도 몰라요. 역시 자기혐오가 제일 빠르고 편리하구나. 상황은 뭔가 내 멱살을 끌고 거대한 선박에 매달린 긴 널판지 위로 밀어 넣긴 하는 듯한데 눈을 가리고 홀로 널판지 끝으로 걸어가는 나는 깊은 수심에 대한 감이 없어요. 익사애 대한 두려움보다는 현실 감각에 대한 전원을 꺼버린 건 아닌가 싶을 정도. 모호함 투성이. 확실한 게 너무 많은데 확실하지 않다고 부정하다 보니 확실하지 않은 렌즈를 끼운 채 바라보고 있는 건가요. (모르는 게 너무 많아요)


이 글의 제목을 처음부터 광고 세계에 대한 싫증이라고 적긴 했지만 지금 나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지루함이라고 바꿔도 크게 의미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서 지루함은 팔자 좋은 소리가 아니에요. 지루함이라는 외줄에서 떨어지면 바닥에는 여러 개의 칼 끝과 유리조각, 뜨거운 쇳덩이와 굳지 않은 시멘트 등이 깔려 있어요. 비유와 은유는 아무것도 완화시키지 못합니다. 텍스트는 너무 연약해. 내가 선택한 세계, 죽을 때까지 이걸 끌어안으며 부들부들 숨을 쉬겠죠. 언제까지 쓸 수 있느냐에 대한 고민보다 지금 무엇을 어떻게 결과물로 남기고 있고 어떤 브랜드와 협업할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이 큽니다. 이 일을 아끼고 사랑하지만 늘 작은 이불만 덮고 잘 수는 없으니까. (내 세계에 대한 기여만큼 세계 자체에 대한 기여도 중요해요)


최근엔 반응과 결과, 과정의 긍정적인 면에서 가장 드높았던 지점이 왜 새로운 케이스로 업데이트되고 있지 않는가에 대해 고민해요. 스스로에 대한 의심은 없어요. 오만한 소리 같은데 이건 너무 복잡한 유기적 형태를 지닌 건축물 같은 거라서 여기에 의심이라는 폭탄을 심어 발파작업을 하면 세계관이 아니라 나라는 원본 자체가 사라집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바꿀 수 있나요. 있지만 결국 이것 또한 다른 세계, 다른 평행 우주의 문이 열렸을 때 가능해요. 풍경이 바뀌어야 합니다. 중력도 가시거리도 경로도. 한때 많은 것을 함께 공유했던,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고 나눴던 사람들의 빈자리가 너무 많아졌어요. 내 그림자로는 한 줌도 채우지 못해. (청승 맞게도) 제목의 '싫증'은 아닌 그리움이 차라리 어울리겠네요. 그때의 나, 그때의 우리,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경험과 환경이 절실해요. 세계를 바꾸고 싶은 게 아니라 의자를 바꾸고 싶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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