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동에 휩싸일 때가 있어요
실행한 적이 여러 번 있어요
가까이에 있는 아파 보이는
사람에게 약을 사다 줘요
감기약, 두통약, 몸살약 등등
아주 오래전부터 그랬어요
이유는 설득력 있지 않아요
그런 증상과 상황이 보였고
내가 가까이에 있었고
저걸 해줘야 한다고 생각이 들었고
고마운 인사를 받고 안 받고 보다
저걸 안 해주면 정말 위급할 정도
그의 상태가 안 좋아 보였기 때문입니다
내가 저걸 안 해준다고 저 사람이 당장
119에 실려가거나 쓰러질 것이냐 정도는
아니었을 거예요. 매우 힘들어 보였지만
대다수는 언어로 이뤄진 위로를 보내니까
나는 저런 상황 가까이에서 혼자 어떡하지...
이러다가 조용히 나가서 몇 분 거리 약국에
가서 약사에게 증상을 말하고 완화시켜 줄 수
있는 약을 사다 주긴 했어요. 그게 다입니다
약을 받은 분들은 대부분 깊은 고마움을 표현했고
그걸로 굉장히 좋아졌는지는 기억나지 않아요
아마 병원에 갔거나 많이 쉬거나 그랬으면
나아질 증상들이었어요
누구나 언젠가 아프기 마련이고 적당한
도움을 줄 수 있느냐는 선택의 문제이기도 하죠
나는 다행히 곁에 있어서 도울 수 있는 기회였고
증상의 해결보다는 그 아픈 사람이 아주 조금이라도
견딜만한 시간이 있었으면 했어요
가까운 타인의 아픈 증상을 알게 되는 순간
몹시 꺼끌꺼끌해져요. 당장 응급실로
업고 가진 않더라도 뭔가 해줘야 할 것 같은
조급함 다급함이 덮쳐와서 안절부절못하겠고
특정 상황에 냉소적이라는 의견을 들을 때도 많은데
저런 상황에서는 어쩔 줄 모르겠어요
이걸 뭐 대단하다고 자랑하려고
이렇게 길게 적은 건 아니고
.... 지금은 이게
브레이크가 걸리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사실 이런 건 너무 오래 생각하면
타이밍을 놓쳐요. 몇날며칠 그 사람이 곁에서
아플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몇 시간 정도
그 안에 판단을 해야 해요. 약을 사러 갈 것인가
말 것인가. 누가 들으면 기이하게 여기겠지만
내겐 그랬어요. 아픈 게 보인다 - 약을 사러 가자
이 두 가지 명분과 실행은 단순하지만
시간이 생명이었어요.
자기만족을 위해서는 효용성이 없는 선택입니다
오직 그때 그 사람(들)이 괜찮아지길 바랄 뿐이었어요
그래야 비교적 가까이 있던
내가 괜찮아질 수 있었으니까
상대방의 고통을 빠르고 깊게 통감하는 태도에 대한
전문 용어가 있던데 기억이 잘 안 납니다
되짚어보면 어릴 적부터 이런 버릇이 있었고
아무튼 지금은 이걸 더 분석적으로 대하고 있어요
이전에는 무조건으로 반응하고 실행했다면
지금은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더 생각해요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가로
생각이 이어지면서 멈칫해요
가치를 따지기 시작했다는 것
가치 판단이 개입하기 시작했다는 것
이건 내가 어느 날 갑자기 세월의 때가 묻어 이따금
사마리아인 같던 애가 사탄마귀에 들렸다는
결과보고가 아닙니다. 어떤 대상(들)에게는
저런 무조건적인 작은 도움조차
곡해되거나 강하게 거부되거나
역효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충동과 실행으로 인한 작은 도움이 대상과 내게
더 안 좋은 결과로 돌아올 수 있다면
실행하지 않는 것이 결국 더 나은 옵션이었어요
2평 원룸에 4인용 소파가 필요할까. 입구컷이죠.
이런 계산으로 인해
실행하지 않은 적이 최근 몇 번 있어요
충동과 실행 의지를 누르고 누르며 서글프기도 했어요
난 누구에게 뭐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타자를 위한
도움을 주고 싶었는데 그게 누적된 경험에 의해
스스로 저지해야 한다는 게 이게 더 맞다고
판단해야 하는 현실적 상황이 참... (어이가 없었고)
내가 어떤 사람이냐는 정의가
이럴 때 내려지기도 하더군요
대가를 바라지 않는 무조건 적인 선의를 추구하고
시도하고 실행하며 점점 그런 사람이 되려고 하면서도
돌아올 상처와 부작용, 역효과에 대한 위기감으로
주저하고 숙고하다가 멈추고 그만두기로 하는 사람
그런 환경에 놓여있게 된, 돕고 싶은 마음을 그만
멈추게 만드는 상황에 있는 사람
어떤 타인(들)에게는 그럴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게 된 사람
무조건적인 선의가
마냥 좋지 않다는 걸 알게 된 사람
수면 위가 잔잔하다고 아래의
모든 생명체가 멈춘 게 아니잖아요
어떤 고요에는 사연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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