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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언. 룸 넥스트 도어

by 백승권

너무 반가워. 오랜만이야. 부탁이 있어

암이 퍼졌고 나는 곧 죽어. 참 어이없지

스스로 선택하려 해. 내가 떠날 때를

전쟁 후 괴로워하던 전 남편은 재혼 후 죽고

10대 때 낳은 하나 있는 딸은 날 싫어해

그래서 부탁인데 내가 죽을 때 옆 방에 있어줘

문이 닫히면 내가 떠났다는 신호야

그때 경찰에 알리면 돼. 넌 내 선택을 몰랐던 거고

황당하고 까다롭고 난처한 부탁인 거 알아

하지만 들어줘. 모두 거절했어. 너 맘 약하잖아

죽어가는 날 외면하지 말고

내 마지막 부탁을 들어줘. 고마워

그런데 약을 어디다 뒀지. 그게 있어야 죽는데

찾아줘서 고마워. 아프니까 기억력이 약해져

왜 울고 있어? 나 여기 있어. 아 문닫힌 거는

자는 동안 바람 불어서 그랬나 봐. 연습한셈 쳐

멀리까지 같이 와줘서

남은 시간을 같이 보내줘서

밤새 원하는 영화도 같이 봐주고

끊임없이 내 이야기 잘 들어줘서

고마워 이제 갈게

외출하고 돌아오면 문이 닫혀 있을 거야

이번엔 바람이 닫은 게 아니야



어느 종군기자(틸다 스윈튼)가 숨을 거두며

자신의 삶을 회고할 때

전쟁을 기록하느라 딸과 멀어지고

전쟁을 겪은 남편은 환청 속에서 죽고

남아있는 자신은 자신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려고 죽음이 죽이기 전에

먼저 죽으려 하고 오랜 만에 만난 친구이자

작가(줄리안 무어)에게 부탁해요

옆 방에 있어 달라고


어려운 부탁이지만

착하고 마음 약한 친구는 거절하지 못하고

보통 사람이었으면 싸우고 도망쳤을 과정을

감내하며 끝까지 곁을 지켜요

친구 옆에 친구, 기자 옆에 작가

죽어 가는 자 옆에 아직 살아있는 자


가치는 스스로 부여하지만

모든 선택은 희생이 따르고

지인의 죽음은 늘 해석되며

자신의 최후는 늘 원통해요


작가가 약을 찾지 않았더라면

기자는 죽을 기회를 놓치거나

늦출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둘은 열심히 약을 찾으며 온 집과

책 사이를 뒤졌고 발견했어요

그래서 기자는 계속 죽을 수 있었고


기자는 약을 찾으며 만약 못 찾으면

이번엔 죽지 않아도 되겠다 이러며 잠시 안도했을까

치밀하고 헌신적인 친구 덕에

계획대로 죽음을 진행할 수 있어 기뻤을까요


제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정도로

약해지는 순간이 온다면

옆 방에 있어달라는 부탁은 못할 것 같아요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사라지거나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끝내고 싶다는 생각은 해요

끝난 후 필요한 사람들에게 알려진다는 전제 하에


평화는 느리게 멈추고

공포는 갑자기 닥치고

혼란은 끝없이 춤추고

어둠은 한동안 덮겠죠


진정 죽고 싶은 자에게 필요한 건

강인한 생존 의지를 자극하는 게 아닌

단숨에 세계가 완전히 끝나는 것이라는

상상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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