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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은 눈밭에 묻어 녹아 없어지게

산호 작가. 비밀은 눈밭에 묻어 녹아 없어지게

by 백승권

글과 그림으로 이뤄진

어떤 작품들은

애써 닫아놓은 문을 연다


그 문을 언제 닫았는지

어떻게 닫혔는지 조차

모를 정도로 생존 본능이

강제 차단 시킨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만든다


거기 누구 있냐는 목소리도 없이

가벼운 터치의 노크도 없이

문고리를 천천히 돌리지도 않고

개머리판으로 찍어 부수거나

곰 같은 발로 차서 벽까지 날리거나

C4폭약으로 산산조각 낸다


거기에 누구를 무엇을 가뒀는지

기어이 찾아내 머리채를 잡고

질질 끌고 나와 내동댕이 친다

긴 삽을 던져 구덩이를 깊게 파고

들어가라고 윽박지르고 지르고 지른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아이는

발가벗겨진 채 울고 떨면서

묻히고 덮이고 숨 막히고

부패하고 갉아먹히고 분해될

땅을 판다 삽날로 발등을 찍고

발가락이 잘려도 내색하지 않는다


다 파면 눕는다

양팔과 다리를 벌리고

등이 차갑다

목 뒤에 서늘한 기운


눈을 감으면 후두득

이마와 눈꺼풀 위로

뺨과 콧등 위로 쏟아지는

흙더미들


죽어본 적이 없으니

유사한 느낌에 기댈 수 없고

소리가 나오기도 전에

검고 붉고 무거운 것들로

입이 막힌다


기억나는 것들은

기억나지 않는 것들보다

기억날 가치가 있을까


표현할 말과 글을 다 모으지 못해

누구에게 전하지 못하고

다 모으고 나니 아무도 없다

그리고 깨달아

이런 이야기는 어떤 이미지로도

온전히 묘사할 수 없고

이런 증언은 듣는 자에게 너무 해로워서

아무도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예의를 지키려면 아껴야 할 것들이 많고

과거에 내가 누구였든 입 다물고 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게 되고

아무 일도 겪지 않고 자란

정상적이고 올바르며

공부 잘하고 책 많이 읽고

상 많이 받은 착한 아이가 된다고


너에게 무엇이 없는지 말하고 다니면 안 돼

동네 창피한 짓이야 불쌍한 거 소문내지 말고


그때 나에게 무엇이 없었는지 잘 지내는지

물어본 사람이 없어서 나는 아직도 평생 그걸

문장과 단어에 숨겨서 몰래 말하고 있어

그때 다 말했더라면 지금 내 글은 좀 더 예뻤을 텐데


사랑한다고 말해준 어른이 있었을까

이렇게 물을 정도로 아무 기억이 없어서

아직도 혼잣말로 사랑해 사랑해

송아지처럼 소리 낸다


우연히

‘비밀은 눈밭에 묻어 녹아 없어지게’를 보고

한동안 멍해 있다가 떠오르는 것들을

여기 적는다


언제 닫힐지 모를 문틈에 끼어






작품 출처

https://x.com/peepeepbooks/status/1988948040556900750?s=46&t=ohl8INFKtVX65ET8daRkq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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