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얼마인가

​파도도 바람도 막을 수 없다.

by 백승권





옅어지는 그림자와 함께 시간과 기억이 빠져나간다. 점과 점을 연결하던 선이 사라진다. 예고되었던 일들의 정체가 또렷해진다. 들었지만 알 수 없고 끄덕였지만 그려지지 않는 곳으로 더 이상 시선의 끝이 가닿을 수 없는 곳으로 옮겨진다. 이유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비슷해 보이지만 완전히 다르고 다르면 다르지만 듣다 보면 하나로 귀결되는 원인. 동선을 옥죌만한 물리적 시효가 지난 지 오래되었다. 너무 늦기도 했다. 거울을 본다. 난 뭐하냐.


동의와 이해는 상황의 완전한 일치가 아니다. 상황이 달라 유효기간도 제각각이다. 왔던 시간이 달라도 떠나는 시간이 같기도 하고 동시에 왔다가 간격이 아주 먼 사이에 나가기도 한다. 길고 오랜 숨을 고르며 남는 자들은 발 디딘 곳의 정체를 정의하지 않는다. 들은 것과 겪은 것의 간극을 애써 측정하지 않는다. 들리는 것을 그저 듣고 들리지 않는 것을 애써 캐지 않는다. 대화의 목적은 팩트 체크가 아니다. 여과되지 않은 분노와 혼란의 감정의 분쇄. 지인과 타인에게 고루 나누어 희석시킨다. 같은 몸에 들어있던 눈과 귀가 아니라면 반박할 자격이 없다. 분노는 다르게 적힌다.


파도도 바람도 막을 수 없다. 아주 오래전부터 먼 곳에서부터 일어나기 시작된 일이다. 위성의 중력에 의한 것인지, 먼 우주 대폭발의 파동인지 알길 없고 안다한들 나비효과의 결과를 막을 수 없다. 같이 남은 날을 세고 조금 아쉬워하고 홀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 앞날에 혀를 찬다. 잔류는 도태의 상징이 아니지만, 인내는 결국 외부 환경의 부조리를 의미하니까. 견딜만한 가치와 나갈만한 스스로의 상품성을 견주게 된다. 따기에 이른 풋사과인지, 잘 포장된 우량종인지, 너무 익어버린 끝물인지. 겉이 까맣게 된 바나나는 스스로의 가격을 매길 수 없다. 껍질 안이 아무리 달고 맛 좋다고 해도 어떤 소비자는 선명한 노랑과 단단한 육질로 판단할지 모를 일이다. 그래서 내 시세가 얼마라는 건데.


시세에 대한 관심은 순위에서 잠시 내려왔다. 숫자를 따질 때는 사시사철이지만, 떠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니 숫자와 내 숫자가 지금 시장에서 적절하게 매겨진 걸까?를 일일이 물어볼 수는 없다. 대화할 시간이 사라지고 있다. 손을 흔들면 다시는 기회가 없다. 다음을 기약하지만 다음은 지금과 다를 거라는 걸 알고 있다. 모든 약속은 기대를 무너뜨리기 마련이다. 알면서도 다른 인사가 떠오르지 않아 얼버무린다. 댐이 무너진 듯 수위가 낮아지고 있다. 바닥에 납작 엎드려 모래알을 세어본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시간과 기억들. 주먹을 뻗어본들 무너진 구멍을 메울 수 없다. 물은 기약 없이 계속 빠져나가고 여름과 무더위는 광속으로 다가오고 테이블 옆에는 의자 하나뿐이다. 빈자리를 보며 혼잣말을 한다. 인생은 어차피 혼자라며 벽에게 말을 건다. 짤을 보며 혼자 웃는다. 괜찮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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