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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권 Oct 11. 2018

아이 엠 러브, 가짜들이여, 안녕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 아이 엠 러브







엠마(틸다 스윈튼)는 진짜 이름이 아니었다. 시집 온 가문이 첫 패배를 당했을 때부터 모든 불꽃과 비극은 정해져 있었다. 아들의 친구, 아들을 패배시킨 자, 젊고 능력 있는 요리사, 안토니오는 엠마에게 구원자였고 가족에겐 결국 악의 사신과도 다름없었다. 그가 나타난 이후 모든 게 달라졌다. 그의 요리를 머금은 순간, 잊고 있던 세상에 눈이 뜨였다. 암흑뿐이던 영혼에 빛이 침투했다. 그리고 완전히 장악당했다. 흡입당했다. 멈출 수 없이 빨려 들어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들? 남편? 국경을 넘어온 이탈리아? 내가 온전히 나였을 때 이것들은 곁에 존재하지 않았다. 안토니오를 만난 순간 모조리 불러올 수 있었다. 원본의 나, 억누르며 지내왔던 나, 돌아가고 싶었던 나, 나는 나일 수 있었다. 안토니오를 알게 된 순간, 엠마는 금지된 사랑에 빠진 여자가 아니었다. 사랑 그 자체가 되었다.


안토니오는 도시 바깥에서 왔고, 엠마는 그와 도시 바깥에서 헤매며 환상과 쾌락에 심취한다. 기꺼이 흙과 풀과 바위 사이에서 서로의 육체를 탐닉한다. 안토니오는 해방의 상징이었고 탈출을 위한 유일하고도 가장 강력한 열쇠였으며 비극의 심지이기도 했다. 모든 걸 감출 수 있을 정도로 둘은 영악하지 못했다. 엠마의 아들, 안토니오의 친구, 에도(플라비오 파렌티)는 의심과 혼란에 빠져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믿는 두 사람이 엉켜 우정과 혈연의 도덕률을 부수고 있었다. 순수하게 아꼈던 가문의 비즈니스조차 원하지 않던 방향으로 좌초하고 있었다. 에도는 가장 좋아했던 음식에서 엄청난 혐오를 느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그리고 돌아오지 못한다. 엠마 앞에서 그는 영원한 과거가 된다. 가문은 장남을 잃는다. 아들, 남편, 오빠, 형이었던 에도는 배신감과 외로움에 분노하다 사라진다. 엠마는 각성한다. 슬픔과 충격에 잠이 든다. 눈을 뜨고 멍한 표정으로 장례를 치르고 새로운 길을 깨닫는다. 움직여야 했다. 스스로의 힘으로.


이미 긴 머리를 자른 상태였다. 검은 드레스를 벗는다. 소울메이트와도 같았던 하녀가 본능처럼 알아차리며 짐을 싸주지만, 엠마는 아무것도 손에 들지 않는다. 지위와 품격의 상징 같았던 외피를 더 이상 두르지 않는다. 여자와 사랑에 빠진 딸이 자신에게 사실을 고백했을 때의 옷차림처럼 이미지의 허상을 내려놓는다. 엠마는 간절하고도 벼락 같은 사랑에 빠진 사람으로서 더 이상 원하지 않는 외부 세계의 어떤 강요에도 동요하지 않기로 각오한다. 그동안 자신을 엄마와 남편과 며느리라는 지위로 살게 했던 사람들이 광인처럼 뛰쳐나가는 그녀를 쳐다본다. 과거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순간이었다. 엠마는 더 이상 그들의 엠마로 기능하지 않기로 했다. 엠마는 자신이 선택할 수 없었던 것들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로 했다. 보장된 안전과 물질적 편안함, 규정된 행복을 폐기하기로 한다. 떠난다. 사라진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침묵으로 이별을 고한다. 새로운 고향, 모든 감각과 감정의 원류, 원본의 나를 찾게 해 준 안토니오에게 '돌아간다'. 더 이상 엠마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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