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일드 44, 천국의 살인

다니엘 에스피노사 감독. 차일드 44

by 백승권




원작을 읽지 않아 영화에 보다 몰입할 수 있었다. 전쟁에 대한 보다 다각적인 이해 역시 예상하지 못했던 수확이었다. 배경에 대한 보다 심도 있는 탐구가 이뤄져야겠지만 무지가 만족할 정도로 사라질 리 만무하고, 만족할 즈음에는 기록에 대한 불씨가 식어버릴 거 같아 영화가 아닌, 영화에 대한 경험을 이렇게 적는다.


영화는 전쟁의 기록을 끊임없이 소환한다. 겪지 않았더라도 겪은 듯한 수준에 이를 정도로 지식과 정보에 대한 누적을 강요한다. 아는 것이 힘이고 망각이 죄라는 점을 온갖 방식을 통해 드러낸다. 가장 유명한 방식으로는 실존 인물을 영웅으로 부각하여 많은 이들이 어렴풋이 알고 있는 에피소드를 거대한 스케일과 폭발 장면, 인간적 고뇌를 뒤섞어 보여주는 것이 있다. 대부분 성공적이었다. 전쟁이라는 소재 자체가 세계사의 가장 강렬한 비극이고 비극을 안전한 거리에서 구경하게 하는 것이야 말로 영화라는 문화콘텐츠의 인기를 떨어뜨리지 않는 비결일 것이다.


차일드 44의 다른 점은 전쟁의 스펙터클이 아닌 전쟁이 남긴 것들에 의해 전쟁이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걸 알게 해 준 점이었다. 러시아와 독일이 서로의 영토에 속한 국민들에게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영화는 실제 있었던 연쇄살인사건을 통해 넌지시 고발한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장면은 전쟁에 패하기 전, 발악하던 히틀러가 만들었다는 특수부대에 대한 몇 줄의 대사였다. (상대국의 씨를 하나라도 더 말리기 위해) 자신의 병사들의 일부를 아이들의 피에 굶주리게 만들었다는 것. 전쟁은 끝났지만 그 병사의 일부가 살아남아 여전히 누군가를 죽이고 있었다. 타의에 의해 괴물로 길들여진 그 병사 역시 괴로움에 평생 힘들어하면서도 후천적으로 삽입된 본능이 계속해서 아이들을 유혹하고 사라지게 했다. 동시에 부모들의 남은 생애조차 싸늘하게 만든 것은 의도한 후폭풍이었을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상대국의 영혼을 괴멸하는 것.


전쟁은 가장 적극적인 형태의 무역이라는 표현을 들은 적 있다. 배와 비행기를 통한 재화의 교환만을 의미할 리 없다. 차일드 44에서 드러난 전쟁의 흉포한 면으로만 본다면 아니 이미 전 세계가 경악한 독일의 아우슈비츠 만행이나 일본의 731부대 생체실험, 다른 여러 국가들의 인종청소 같은 면면을 더해 전쟁의 해악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결론을 미루어 예상해본다면, 지속 가능한 (완전한) 말살이 아닐까 싶다


눈앞에 총칼을 든 적들을 넘어, 적의 자식들, 적을 자라게 한 환경 등 적을 존재하게 했고 흔적을 잇게 할 모든 가능성을 최대한 현재와 미래에 지우는 것. 그것이 아마도 광기에 의해 이성적 통제를 벗어난 전쟁의 솔직한 목표 지점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배운 자들이 덜 배운 자들에게 무기를 쥐어주고 닮은 이들의 팔다리를 베고 어린이들의 장기를 적출하며 하늘 아래 생명의 흔적을 완전히 지우라고 인간이 인간에게 인간의 토벌을 명령할 수 있을까.


천국엔 살인이 없다며, 살인행위에 대한 인정 자체를 죄악시한 정책의 폭력성 역시 우두머리들의 잔혹함을 억지로 지우고 증언을 묵살하려는 이해불가의 시도. 수잔 손택과 한나 아렌트는 이들에 대해 이들을 좌시하는 다수를 향해 아낌없는 분노를 기록으로 토해냈었다. 전쟁을 단죄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아니다. 전쟁에 속해 있지 않은 인간이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다만 전쟁의 죄와 죄인들은 끊임없이 파헤쳐지고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그것이 남은 이들이 억울하게 죽은 이들과 앞으로 살아갈 이들에게 무엇보다 자신들에게 할 수 있는 최소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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