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을 설명하는 키워드 세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일, 게임, 그리고 축구다. 많은 남자들이 어릴 적 꿈꾸던 축구선수가 되고 싶어 한다. 나도 그랬다. 공을 차면 온몸에 아드레날린이 폭발했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한 번도 축구를 놓지 않았고, 지역 연고지인 안양 FC의 오랜 팬이었으며 중국 유학 시절에도 한인 축구회에 빠지지 않고 나갔고, 위닝 일레븐부터 FIFA까지 축구게임만 30년 넘게 했다. 물론 국내외 축구 경기도 열정적으로 보고 매 해 팀들의 성적도 거의 기억한다. 축구는 나의 인생이었고 내가 못다 이룬 꿈이었으며 꼭 해내고 싶은 꿈이었다.
평생 살았던 안양에서 이천으로 터를 옮겼다. 동생들과 사업장을 합치게 된 것이다. 기존의 사무실이 터져 나갈 것 같기도 했고, 같이 일하게 된 후배들이 국밥집을 해도 독채 건물을 짓는데, 우리는 왜 작은 사옥 하나 없냐고 볼멘소리를 했다. 나도 평생 남의 건물에 얹혀서 사업을 할 생각이 없었다.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이 이천 외곽에 자리를 알아보고 첫 삽을 뜬 몇 개월 만에 회사를 지어 옮기게 되었다. 처음으로 연고가 아무도 없는 지역에 나 혼자 덜렁 떨어졌다. 반경 50km 내에 내가 아는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었다. 회사를 옮길 시점에 코로나의 영향도 있었고 안양에서 뽑은 직원들을 모두 끌고 올 수가 없어서 안양에서 쓰던 사무실 중 한 층은 살려 두기로 했다. 그러다 보니 주요 직원들은 모두 안양에 있고 나만 짐들과 함께 이천 사무실로 옮겨져, 나 혼자 유배당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이천에 혼자 덩그러니 떨어진 게 2020년 2월이었다. 내가 이사를 가자마자 본격적으로 시동이 걸린 코로나는 그 후로 3년 동안 꺾일 줄을 몰랐다. 우리의 주 고객이었던 체육관들이 영업 제한으로 인해 타격을 받자 매출이 눈에 띄게 떨어졌다. 늘어난 회사 식구들, 회사를 지으며 끌어다 쓴 대출, 당장 돌아가지 않는 자금 회전, 한계가 보이는 격투용품 시장. 그걸 보니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해 보였다. 혼자 있으니 조용하게 생각할 수 있는 시간도 많아졌고 집중력도 높아졌다. 코로나로 세상은 어지럽게 돌아가는데, 나는 시골이라 불러도 좋을 이천의 외곽에 나 홀로 지내며 자가격리 아닌 강제 자가격리를 하고 있었다. 오라 가라 하는 사람 없고 비효율 적인 일을 하는 시간이 줄어드니 머릿속이 정리가 더 잘 되는 느낌이었다.
이듬해 나는 축구 교습을 받았다. 주변에서는 내가 사심을 채우기 위해 축구를 배운다고 생각했지만 나에게는 축구공 만드는 것을 시작해야겠다는 큰 그림이 있었다. 내가 만들 축구공을 정확하게 테스트를 하려면 나의 부족한 축구 실력을 키운 다음, 내 발로 테스트를 해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정확하게 내 발에 맞는 임팩트를 느껴 봐야 내 공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직접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축구장에서 마냥 뛰고 싶었더라면 교습이 아닌 조기축구를 들면 그만이었다.
혼자 있는 시간 동안, 나는 축구공에 대한 거의 모든 공부를 했다. 예전부터 관심을 가지고 봐 둔 것에 더해 본격적으로 파고들기에 2년이 넘어가니, 논문을 한 편 쓸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자료와 지식들이 쌓였다. 내가 아는 지식들을 총동원해 물리적으로, 수학적으로 축구공의 원리를 알아냈고, 그에 따라 좋은 공, 나쁜 공이 판가름 나는 이유를 파악했으며, 축구공에 들어가는 모든 재질들의 특성과, 그 각각의 재질들의 생산력이 좋은 나라와 잘 만드는 브랜드를 구분했고, 마지막으로 주요 브랜드들의 공을 갈라 어떤 브랜드는 어떤 재료를 쓰는지의 축구공 층층을 모두 연구했다. 격투기 글러브를 만들며 수없이 찢고 갈라서 눈에 드러나지 않는 패딩과 몰딩의 차이를 연구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축구공 사업에 박차를 가했다.
재무를 맡은 승현이가, 실컷 사 준 축구공들이 모조리 반으로 갈라져 있는 걸 보고 기겁을 하며, 적당히 자르라고, 몇 개를 잘랐으면 그냥 인터넷으로 찾아보라고 잔소리를 하길래 몇 개는 사비로 샀다. 그럴 만도 했던 것이 배를 가른 축구공이 20여 개가 넘었고, 10만 원이 넘는 고가의 공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그렇지만 한 제품이 탄생하기까지 연구개발비 치고는 그리 나쁜 금액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연구소를 차린 것도 아니고, 연구진을 고용한 것도 아니고 내가 맨 손으로 찾아보고 연구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잘하는, 축구공을 제작하는 공장 찾기가 시작되었다. 격투용품을 만들며 워낙 많이 해보았던 것이기 때문에 시행착오를 많이 줄일 수 있었고, 비교적 빠른 시간에 피파 기준의 축구공을 생산하는 공장을 찾게 되었다. 다른 사람에 비하자면 비교적 빠른 시간이겠지만, 그래도 일 년 넘게 서치를 한 것이다. 나는 복싱용품을 만들 때와 마찬가지로 또 한 번 공장 사장을 포섭해 내 사람으로 만든 후 매일밤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제품을 샘플링하고, 테스트를 하고, 이 짓을 일 년이 넘게 반복했다.
승현이가 이천에 오면 내가 늘 잠이 모자라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나에게는 밤잠) 이 자식은 내가 매일 밤 일을 하는 줄을 알면서도, 낮에 일 안 한다 잔다고 한 마디 했다가 나에게 스무 마디쯤 잔소리를 들었다.
축구공을 만드는 동안 함께 일을 하는 동생들에게 뭔가 보여주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더욱 부담스러웠던 것이 사실이다. 그전에는 우리 회사가 격투용품 브랜드인 스칸다, 사냥용품 쇼핑몰인 정글맥스헌터, 우슈용품 쇼핑몰인 강호에 비파소리 등을 운영하며 회사를 하나로 합치기 전부터 증명된 것들을 판매했다면, 축구용품은 처음 시작해 보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특히 승현이 자식이 틈만 나면 “형, 축구공은 잘 되고 있어?” “우리 올해도 재무 상태가 안 좋은데, 빨리 돌파구를 만들어야 해.” 라며 나를 압박했다.
사실 축구공을 만드는 일은 쉬운 일이다. 알리바바에 들어가서 공장을 컨택해서 내 브랜드 로고를 붙여 몇 백 개쯤 생산해 달라고 하는 것은 일이 아니다. 저렴한 공을 만들어 최저가만 맞추면, 아무렇게나 판매하기도 쉽다. 그러나 나는 대한축구협회 인증을 받아 공인구로 쓰일 수 있는 제대로 된 공을 만들기를 원했고, 나아가 피파 인증을 받을 준비까지 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렸고, 준비 과정이 까다로웠다.
KFA(대한축구협회) 공인구 테스트를 했다. 테스트 비용이 또 재무담당 승현이에게 압박이 되었다. 나는 테스트 기준에 맞추어 만반의 준비를 했지만, 첫 번째 테스트에서, 유소년용 검정구 4호 볼은 통과가 되었지만, 공인구로 쓸 수 있는 5호 볼은 떨어졌다. 나는 테스트하고 남은 공을 받으러 용인에 있는 시험검사소까지 쫓아갔다. 담당자는 친절하게 내 공이 떨어진 이유에 대해 알려 주었다. 그러며, 어떤 회사는 일고, 여덟 번까지 테스트를 본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스트레스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처진 목소리로 테스트에서 떨어졌다고 전화를 하자 승현이가 얕은 한숨을 쉬었다. “괜찮아, 형. 다음에 통과하면 되지.” 다음번에 통과한다는 보장이 어딨는가. 스트레스가 폭발할 것 같았다.
다시 공장과의 지루한 공정의 과정이 반복되었다. 공장 사장은, 현지의 피파 퀄리티 테스트를 하는 곳에 손수 가서 우리 공을 테스트했다. 어이없게도 모든 항목에서 고루 통과되었다. 하지만 나는 대한축구협회의 기준이 더 까다롭다는 걸 알고 있었다. 원래 한국인이 뭘 해도 기대 이상이지 않은가. 나도 내 나름대로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공을 테스트했다. 함께 축구하는 코치님과 동생들이 많은 조언을 주었다. 사람들의 의견을 취합해 부족했던 부분을 더욱 보완해 나갔다. 어쩌면, 한 번에 테스트를 통과했다면, 공이 양산되고 난 후 후회를 했을 것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테스트에서 운이 좋게도 공인증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갓 출시한 신생 브랜드의 탑티어 에볼루션 축구공이, 대한민국에 단 7개 있는 공인구 브랜드의 반열에 함께 오른 것이다. 최근 새로운 명함을 팠다. 탑티어 브랜드의 로고에 나의 이름과, ‘축구공 만드는 인간’이라고 크게 적어 놓았다. 그 밑에 작은 글씨로 ‘복싱 글러브도 만듦’이라고 추가해서 말이다. 이 명함을 받는 사람은, 최소한 나를 한번 더 들여다보는 것 같다. 취미로 접했던 축구 경기나 축구 게임을, 이제는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다. 작은 변화도, 내 축구공 사업과 관련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그전에 보았던 시각과 확연히 다르다. 공으로 시작한 나의 축구인생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가게 될지 모른다. 하지만 차를 몰고 한밤중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가시거리가 길진 않지만 어쨌든 길을 따라가다 보면 목적지가 나오는 것처럼, 사업도, 먼 곳의 종착점을 향해, 그저 믿고 가는 것뿐이다.
어렸을 때부터 축구인이 되기를 갈망했는데 어쨌든 어떤 형태로든 비로소 나는 축구산업에 뛰어든 축구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