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포기

김장

by 꾸꾸

날씨가 서늘해질 때쯤이면 온 동네가 분주하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아줌마들끼리 무리를 지어 다녔다.

하루 걸러 한집씩 방문했고, 스케줄이 틀어지거나 겹치지 않도록 신중에 신중을 가했다.

우리 엄마도 마찬가지다.

거실 벽에 걸려있는 작년 겨울에 받은 커다란 달력은 이맘때쯤이면 하루도 빠짐없이 모두 커다란 동그라미가 쳐져있고 짧게 희선네, 솔지네, 성현네 아들이나 딸 이름으로 적혀있었다.


"다음 주는... 정식이네..."


낮에 아줌마들끼리 약속한 내용을 잊지 않으시려고 집에 오자마자 달력에 바로 빨간색 매직으로 큼지막하게 적어놓으셨고, 우리 집은 이번 주 토요일이다.


우리 동네는 날씨가 쌀쌀해지고 추운 겨울이 오기 전에 김장을 한다.

언제 시작하냐, 누가 먼저냐, 그다음은 누구냐와 같은 순서는 우리가 정하는 게 아니었다.

밭에 심어 놓은 배추들이 얼마나 잘 무르익었는지, 날씨는 언제 적당한지, 비는 안 오는지, 눈은 안 오는지

날씨 예보와 배추의 상태를 보며 철저하게 계산했다.

이 모든 걸 예측하고 심사하는 곳이 바로 노인정의 할머니들이었다. 온 동네 밭을 설렁설렁 걸어 다니시며 색과 윤기, 크기로 김장을 할 수 있는 배추인지를 체크하셨다. 그리곤 '어멈아 이번 주 가기 전에 김장해라'라고 오더가 내려오면 그 집이 김장의 시작을 알렸고, 그다음부터는 일사천리로 모든 밭의 배추들이 뽑히고, 씻기고, 소금에 절여지고 양념이 묻혔다.


보통 한 집에서 최소 100 포기는 했기에 한가정에서 다 하기란 너무나도 벅찬 일이라 동네 아주머니들은 다 같이 품앗이를 하였다.

우리 집은 큰아버지가 젊었을 때부터 하시던 가게의 반찬으로 쓸 김치와 고모들에게 나누어줄 김치까지 포함해서 모두 300 포기가 넘는 김장을 했다. 말이 300 포기이지 밭에서 300 포기를 뽑아서 집 앞마당으로 옮기는 데에만 한나절이 걸렸다.


"안녕하세요~ 하이고 오늘 대공사 해야겠네요"


새벽 일찍 가장 먼저 도착한 건 성현네 아줌마였다. 언제나 부지런하고 무엇보다 우리 엄마와 가장 친했다.

고모들과 할머니 할아버지는 전날부터 미리 와서 대기 중이었고 엄마는 마당에다가 김장을 할 커다란 양동이 서너개, 천일염 소금 한 박스, 기다란 비닐 등 이것저것 만반의 준비를 마쳐놓으셨다.

동네 아줌마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고 7시가 되어서 푸르스름하게 아침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더 늦으면 오늘 다 못해 빨리 시작하자고"


우리가족중에서 성격이 가장 급하신 할아버지가 아직 사람들이 다 모이지 않았는데도 참지 못하시고 자리에서 일어나시며 한마디 하셨다.

할아버지의 시작 나팔소리와 함께 집안에서 대기하던 사람들은 모두 밭으로 이동했다.

나와 아빠는 구르마를 하나씩, 엄마와 고모들은 커다란 칼을 하나씩 들었다.


우리 집은 김장하기에 난이도가 꽤 있는 편이었다.

단순하게 작업량이 엄청나게 많은 것과는 별개로 집에서 밭까지의 거리가 멀고 우리 집 앞은 언덕이라 좁은 오르막길을 올라와야 됐기 때문이다.

우리 집은 뒷구지 동네에서 중심부에 가까웠지만 뒷구지 슈퍼의 뒤쪽 길로 나있는 오르막을 올라야 했다.

그 오르막엔 우리 집 밖에 없었는데 다시 우리 집 뒷길로 좀 더 경사진 돌계단을 오르면 나보다 몇 살 어린 종태네, 그 뒤로도 계속 오르막이 있고 집하나가 있었다. 산 언덕배기에 만들어진 동네라 그런가 보다

우리 집 마당에서 앞으로 나있는 거리에는 조그마한 돌문이 있었는데 원래는 통로가 없다가 마을 사람들이 돌아다니기 불편하다고 해서 앞집 아저씨 둘이 합심하여 만들어놓은 문이었다. 열고 닫는 문이 아니고, 그냥 통과만 할 수 있는 게이트 같았다.

오른쪽으로 가면 나와 동갑내기 미소네 집이 있었는데 그 당시 우리 동네에서 꽤나 잘 살기로 유명했다.

집도 으리으리하게 컸고, 마당도 크고 집 앞에 커다란 창고도 있었다.

나도 가끔 놀러 갔는데 돌로 만들어진 커다란 집이 엄청 좋아 보였다. 우리 집에서 미소네 집 사이에는 좁고 기다란 숲길이 있었는데 여기에는 가로등도 없고 관리가 전혀 되어있지 않아 늘 무섭고 어두침침했다.


원래는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가 결혼하실 때 재산이라곤 지금 살고 있는 집터 하나뿐이었는데 할머니 할아버지가 밤낮없이 농사지으시고, 짚으로 신발을 만들어 팔아서 밭과 논을 사셨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집에서 밭터가 아주~멀었다.

걸어서 10분 정도의 거리에 있었고 마을 초입부에 마을 버스정류장을 지나, 마을 회관을 지나 보건소 쪽에 위치해 있었다. 예전엔 좋은 길로 다닌다고 포장된 도로로 빙빙 돌아갔지만 김장 때만큼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대충 흙으로 쌓아 놓은 지름길로 이 집 저 집 사이를 비집고 통로를 만들어 놨는데 오늘만큼은 그 길로 몰래 다녔다. (평소 나는 그 길로만 다녔다.)


밭은 내가 관리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었기에 정말 오랜만에 밭에 가보았는데

완전히 무르익은 배추들이 빼곡히 쌓여있었다. 대충 눈으로만 봐도 300 포기는 훨씬 넘어 보이는 양이었고

처음 보는 순간 이걸 언제 다하지? 하고 막연하고 기가 막혔다.


"자자~ 우리는 여기서부터 배추 뽑아서 밑동 잘라낼 테니까 나머지는 저기서부터 하시고, 밖으로 옮겨놓으면 구르마로 옮깁시다"


리더십이 있으신 아버지가 큰 목소리로 각자의 역할을 딱딱 역할을 정해주셨다.

나와 누나도 오늘은 일꾼이었다.

위험한 칼이나 무거운 구르마는 옮기지 못하니 뽑히고 밑동이 잘려있는 배추를 구르마에 싣는 작업을 했다.


"하.. 엄마 지금 몇 시야?"


수십 번을 왔다 갔다 하고 커다란 배추를 옮겨담다가 허리가 하파 잠시 한숨을 돌리기로 했다.

마침 엄마가 옆으로 지나가고 있었길래 엄마를 보며 물어봤다.


"음.. 지금? 한 8시 됐으려나"

"뭐!?"


노동의 기쁨이란걸 이때 처음 알았다.

하루 종일 10시간이 넘도록 일한 것 같은데 시간을 보니 1시간이 지났다고 했다.

아차 싶어서 밭을 보니 그 말이 맞는 것 같긴 했다. 우리가 해야 될 배추의 양이 10분의 1도 줄어들지 않은 것을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누나와 투덜대기 위해 고개를 돌렸는데 의외로 누나는 군말 없이 열심히 배추를 나르고 있었다.


"에휴"


나는 짧은 한숨을 내쉬고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드디어 밭에 있는 배추가 어느 정도 다 뽑혀 이제는 황폐하게 파헤쳐진 흙더미만 보였다. 점심시간이 한참이나 지났는데 우리는 작업을 멈추면 나중에 일이 더 힘들어질 것을 알고 쉬지 않고 계속했다.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밥 먹고 하시죠!?"


큰아빠가 한 손으로 마지막 배추의 밑단을 따며 소리쳤다.


"오예!! 밥!!!"


나와 누나는 동시에 환호성을 질렀다.

엄마와 아줌마 몇 명은 한 시간 전쯤에 미리 밥을 하러 집으러 들어가셨고, 우리는 나머지 배추 쪼가리들과 장비들을 정리해서 집으로 돌아갔다.

맛있는 수육과 날배추가 있었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엄마표 김치찌개가 같이 있었다.

그리고 빠질 수 없는 술은 당연히 할아버지가 가지고 나오셨다.

우리 할아버지는 동네에서 알아주는 술꾼이셨는데 단 한 번도 주정을 하거나 주위 사람에게 피해를 주신적이 없었다. 그런 할아버지를 보며 엄마는 항상 나에게 나중에 커서 술을 먹을땐 할아버지처럼 마시라고 말씀하셨다.

할아버지는 가지고 오신 술을 물컵에 가득 채우셨고, 그 많은 소주를 독하지도 않으신지 벌컥벌컥 한숨에 들이키셨다.


"크아~~ 좋다"


술이 도대체 왜 맛있는 건지.....

예전에 할아버지가 혼자 술을 드시다가 심심하셨는지 방에 있는 나를 불러 나에게 술을 가르쳐주신 적이 있었다. 하얀색 통에 들어있는 막걸리였는데 은색 밥그릇에 콸콸 따라주시고는 나에게 한입 먹어보겠냐며 말씀하셨다. 그동안 어른들이 마시는 술을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다가 그릇에 직접 받아서 바라보니 색이 더 짙고 영롱했다. 마치 사리곰탕같이 구수한 맛이 날것 같았다.

하지만, 실제 맛은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알싸하고 시큼한 그 맛이 토할 것만 같았다.


오후 작업은 배추를 씻고 소금에 절이는 작업이었다.

이것 또한 시간이 엄청 걸리는 일이었는데 배추를 하나하나 씻어서 속에 소금을 팍팍 묻히고 큰 양동이에 옮겨 담아야 됐다. 절이는 작업은 배추를 뽑아서 옮기는 일보다 시간이 더 걸린 것 같았다.

오후 3시쯤 시작한 작업이 끝이 보이질 않았고, 해가 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해가 지자 도와주러 오신 동네 아줌마들은 하나 둘 집으로 가기 시작했다.


"저기 나 집에 가서 어머님 밥 차려드려야 되는데..."

"아이고~~ 얼른 가세요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 솔지네 김장할 때 제가 갈게요!"

"그래요~ 고생해요~~"


그렇게 하나 둘 떠나고 이제는 우리 가족만이 남았다.

해가 완전히 지고 어둠이 가득할 때 마당에서는 더 이상 할 수 없어서 아버지는 특단의 조치로 어디서 구해오셨는지 기다란 전선에 전구를 하나 이어서 집 천장에다가 걸어 놓으셨다


"띠잉~"


전기음과 함께 전구가 켜지며 마당이 환하게 밝아졌다.


"자 이제 마무리 어서 하자고!"


우리 가족은 마치 하나의 몸이라도 된 듯 각자의 역할을 충실하게 해냈다.

씻고, 옮기고, 털고, 소금을 묻히고, 차곡차곡 쌓았다.

마지막 배추를 다 옮기자 오늘 일은 끝이 났다.

300 포기를 쌓아서 옮겨놔 보니 정말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마치 산더미 같았다.


"고생들 했어요~~ 이제 내일 저거 다 씻고 양념해서 묻히면 되겠네"

"이게 끝이 아니라고!?!?"


나와 누나는 머리를 붙잡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당 정리를 끝내고 집에 들어오니 이미 엄마가 저녁을 준비해 주셨고 투정 없이 열심히 일한 나와 누나에게 칭찬을 해주셨다.

그날 저녁은 근래 들어서 가장 일찍 곯아떨어진 날이었고, 푹 깊게 잠들었다.


다음날 우리 가족은 남은 배추를 씻고 양념을 해서 배추 속을 하나하나 채우는 작업을 또다시 하루 종일 했다.

쉽지 않았지만 다 하고 나니 미리 사놓은 플라스틱 배추박스가 20개는 넘게 쌓여있었다.

나도 저 걸작을 만드는데 일조를 한 마음에 뿌듯하고 기분이 좋았다.


일이 끝나고 배가 고파서 뭐 좀 먹으려고 냉장고를 열어봤는데 냉장고 안은

이미 김장을 끝낸 이웃집에서 받아온 김치들이 쌓여있었고, 제일 위에 우리가 오늘 한 김장김치가 놓여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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