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노자의 삶
처음엔 모든 게 좋았다. 제2의 고향인 상해에서 '유학생'이 아닌 '직장인'으로 해외취업에 성공했다고 생각했고 , 젊었을 때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경험인 여행과 비행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꿈의 직업을 이뤘다는 뿌듯함과 세상에 대한 설렘과 함께 매일 새로운 곳 ,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 하는 비행 생활은 유학생활을 하면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일종의 해방감 비슷한 짜릿한 삶을 살 수 있었다.
상해 오프 때마다 동기들과 데이트하는 순간도 , 매일 바뀌는 맛있는 기조식에 대한 궁금증, 다음 레이오버 비행은 누구와 어디로 가는지 , 비행 다녀와서 침대에 누워 각 쇼핑리스트와 여행 계획을 짤 때의 두근거림 , 새로운 여행지와 근사한 호텔, 가장 설레었던 행복한 월급날, 자기 전 하루 비행스토리를 늘어놓으며 맥주 한잔으로 마무리하는 시간들, 서로 기념품을 챙겨주던 타지 생활까지 그렇게 하루하루 설레는 나날들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런데 참 이상했다. 바쁜 스케줄을 소화해내며 멋지고 화려한 곳을 여행하고 맛있는 걸 먹고 예쁜 것들을 눈에 담았는데 호텔로 돌아오는 길이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가끔 혼자 우두커니 아무도 없는 방안에 있을 때면 나도 모를 공허함과 외로움이 물밀듯이 찾아왔다. 외로움을 달래고자 sns를 켜보면 온통 연인과 함께한 럽스타그램뿐. 어쩌면 유독 그런 사진만 보였던 건 아닐까. 매번 한국에 가는 날을 기다리며 날짜를 정해서 만나는 나와는 다르게 만나고 싶으면 만나고 보고 싶으면 당장이라도 달려갈 수 있는 그들의 자유로운 물리적 거리가 부러웠다.
나만 빼고 다 행복해 보였던 건 그날 하루 너무 피곤했던 탓일까 아니면 선배도 , 동기도 없이 혼자 온 비행이 외로워서였을까.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내 몸뚱이 하나 건사하지 못하면서 연애라니.. 고작 한 달에 한번 한국에 들어가는 주제에 연애는 어쩌면 사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장거리 연애를 유지하던 동기들은 보통 4-5년 이상 오래 연애하던 사이였고 , 보통 이 일을 하다 보면 불규칙한 스케줄과 환경때문에 어쩌다 한국에서 누군가와 만나 잘됀다한들 몇 달이 채 가지 않아 차거나 또는 차이는 경우를 종종 봤다.
우리는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한국에서 많이 쉬게 해 주는 한중 스케줄과 , 상해에서 쉬면서 한국은 한 달에 한 번만 갈 수 있는 국제 스케줄로 나뉘었는데 나의 경우는 국제선 스케줄이 대부분이었기에 많이 만나고 알아가야 할 연애 초반에 누군가와 오랫동안 관계를 유지해나가기 어려웠던것같다. 반면, 어떤 선배는 상해 오프에도 굳이 무료항공권을 써서라도 한국에 있는 남자 친구를 만나야 한다며 한국행 티켓을 쓰시는 멋진 선배님도 있으셨고 , 또 어떤 선배는 자기돈을 써서라도 한국에 가서 데이트를 즐기신 분들도 계셨다.
그런 면에서 일과 연애를 다 잡는 분들은 정말 리스펙. 만약 한 달에 한 번밖에 볼 수 없는 여자 친구를 매일같이 연락해주며 바람피우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오직 나만 바라봐주며 기다려주는 남자가 있다면 그것 또한 정말 리스펙. 외로움을 달래보고자 외국의 현지인을 만나 연애하는 경우도 종종 봤는데 결혼까지 간 경우는 드물었다. 결국 한국 사람은 한국사람을 만나야 행복하다는 것. 이게 바로 내가 8년간의 해외생활을 통해 내린 결론이었다.
지속적인 만남이 오래 유지되기 힘든 불가피한 환경 속에서 , 불안정하고 기약 없는 나날 속에서도 아니 어쩌면 이런 환경이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드는 걸지도 모를 정처 없는 타향살이에 그저 존재 자체만으로도 힘이 되어주고 내 마음 깊숙이 의지하고 기댈 사람은 과연 있긴 할까 . 누군가에겐 평범한 삶이 어느 누군가에겐 부러움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 화려하기만 한 sns가 다가 아니듯 완벽한 사람은 없고 누구나 결핍이 있다는 것. 결국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는 걸 느낀다.
그래도 가끔 일하면서 얻는 소소한 행복도 있다. 3000피트 상공에서 바라보는 하늘 아래 동료들과 함께 한다는 것에 감사하고 , 피곤한 새벽비행에도 마주하게 되는 노을 진 하늘 속 풍경에 감탄하고 , 그 아름답고 경이로울 수밖에 없는 자연의 신비함에 나도 모르게 겸허해진다. 아무리 힘들고 지친 비행 속에서도 쭈뼛 쭈뼛 수줍게 다가와 건네던 꼬마손님의 깜짝 편지에 미소 짓게 되고 천사 같은 아이들의 순수하고 해맑은 눈웃음에 다시금 행복을 가져다 주는 아이러니한 직업
생각해보면 우리 삶이 그렇다. 오랫동안 목표를 이루고 꿈꾸던 새로운 세계에 입성하고 나면 모든 문제가 다 사라질 것 같지만 절대 다 그렇지많은 않다. 그 세계는 규칙이 있고 규율이 있으며 그에 따른 모든 책임은 오롯 나 자신 뿐이라는 걸! 행복도, 불행도 모두 다 마음먹기 달렸다는 것..
그리고 지금도 어딘가에서 홀로 외로이 비행하는 나의 또 다른 동료들과 외로웠던 과거의 나를 한 번쯤 안아주고 싶다.
그동안 잘해왔고 앞으로 더 잘할 거니까
걱정하지 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