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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희 Jun 04. 2020

열무김치가 바닥으로 쏟아진 순간

하필이면 맛있게 익은 열무김치가 김치냉장고에 있었다.

텔레비전이며 SNS며, 아이를 키우지 않아도 육아 현장을 자주 볼 수 있는 시대다. 내 아이를 낳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이쁜 짓을 하는 아이들을 보면 그저 즐겁다. 그 간접 즐거움을 만끽하기 위해서 육아 프로그램과 아이 키우는 엄마들의 인스타그램을 즐겨 보곤 한다.


육아 콘텐츠를 보다 보면 꼭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마치 숨바꼭질 같은 식사 시간이다. 밥 먹기 싫어하는 아이가 식탁에 앉아 있지 못하고 온갖 곳을 돌아다니면, 아이 엄마는 밥그릇을 들고 아이만 쫓아다니며 어르고 달래 한 숟갈을 겨우 먹인다. 


얼마 전 <슈퍼맨이 돌아왔다>와 <가장 보통의 가족>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왔다. 한 가지 차이점이라면, 두 프로그램 다 아동 심리 전문가인 오은영 선생님이 나와 즉각적인 피드백을 줬다는 것이다.


오은영 선생님은 아이의 엄마, 아빠에게 아이가 허기를 느끼지 않을 때 억지로 식사를 권하지 말라고 말했다. '굶어 봐야 배고픔을 안다'같은 폭력적인 대처가 아니다. 그냥 배고플 때 식사를 챙겨주라는, 아주 간단한 해결법이었다. 


우리 집에서는 그 간단한 해결법이 전혀 필요 없었다. 아이들이 배고프지 않아 식사를 피한다고? 우리 집은 두 자매가 모두, 아니 특히 내가 깨어 있는 시간 내내 배고프다며 엄마 뒤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녔다. 간식을 찾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밥이다. 나는 제대로 된 밥상을 간식으로 치는 아이였다. 


열 살 무렵 가족사진. 같은 옷을 입은 아이 중 큰 쪽이 나, 작은 쪽이 연년생 동생인데 키 차이가 크다. ⓒ 이현희


자연히 어린 시절 우리 집의 식재료 소비량은 엄청났다. 한창 성장기였을 때는 쌀 20kg를 구매해도 4인 가족이 2주를 넘기지 못하고 먹어 치웠다. 함께 가게를 운영했던 엄마·아빠는 새벽에 퇴근한 후 24시간 운영하는 대형 마트에서 20만 원어치씩 장을 봤다. 냉장고와 창고에 초코파이·오렌지주스 같은 간식을 그득그득 채워놔도 일주일이면 먹을 게 없었다. 


고봉밥으로 두 그릇을 해치우고도, 돌아서면 배고픈 딸내미. 엄마는 "지금 찌는 살은 다 키로 가는 거야"란 마법의 주문을 외치며, 매 끼니 맛있는 음식을 차려주다가도, 한편으로는 너무 많이 먹는다고 생각했나 보다. 식사 시간 외에도 밥을 달라는 나의 외침에 혼내기 일쑤였다. 


식욕이 폭발하던 성장기의 와중에 늘 배고픈 나는 집에 혼자 남고 엄마가 잠깐 외출한 적이 있다. 냉장고에는 점심때 한 쌀밥이 남아 있었고, 하필이면 맛있게 익은 열무김치가 김치냉장고에 있었다. 


잘 익은 열무김치로 국수를 만들면 그 위력은 엄청나다. ⓒ 이현희


- '엄마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밥을 차려 먹고, 잽싸게 치우면 절대 모르겠지?'


그런 잔꾀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게 화근이었다. 지금도 엄마는 비슷한 크기의 김치통을 쓰는데, 거대한 김치 냉장고에도 6통 정도밖에 못 들어가는 큰 김치통에 열무김치를 가득 채워놨다. 다 자란 내가 들어도 조금 무거운데 열 살도 안 된 애한텐 더 무거웠을 거다. 성장기의 허기가 끝끝내 귀찮음과 눈치를 이기는 순간, 나는 열무김치 통에 손을 댔고, 그대로 다 쏟았다.


정말 뭐 된 상황... 어떡해? 이걸 어떻게 치우지? 덜 자란 머리를 팽팽 굴리는데 닫혔던 현관문이 철커덕, 열렸다. 지갑을 두고 간 엄마였다.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은 엎어진 열무김치 통과 그걸 지켜보는 나. '배고파'를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던 딸을 몇 년간 키워온 엄마는 단번에 상황을 인지했다. 그리고 실소를 터뜨렸다.


엄마가 나가기만 기다렸나보다고, 나의 무시무시한 식욕에 깔깔 웃으면서, 엄마는 그 많은 열무김치를 다 치워줬다. 미처 쏟아지지 않은 열무김치로 밥도 차려줬다. 얼마나 꿀맛이었는지 지금 이 브런치를 쓰면서도 침이 꼴깍 넘어간다. 아니 열무김치 냄새로 가득 찬 집에 취한 걸지도.


엄마의 열무김치는 여름이면 만찬으로 변신한다. ⓒ 이현희


오은영 선생님의 '허기 솔루션'을 볼 때, 물론 엄마도 함께였다. 엄마는 "그래"를 남발하며 오은영 선생님의 리액션에 공감하다가, 문득 그렇게 말했다.


- "근데 나는 우리 애들이 배 안 고픈 순간이 없었나 봐. 혼자 숟가락 잡을 힘 생긴 뒤로 뭘 먹여준 기억이 없어."


그렇다. 나는 숟가락 잡을 힘이 생긴 순간부터 내 안의 식욕을 마음껏 배출하고 살아온 것이다. 상상만 해도 입맛을 다시게 하는, 손맛 좋은 엄마의 딸이라 정말 다행이다.



- 더 자세한 엄마의 열무김치 레시피




01 열무를 깨끗이 씻은 후 소금에 1~2시간 정도 절인다.


02 충분히 절여지면 흐르는 물에 헹군 후 물기를 쫙 뺀다.


03 찹쌀을 물에 개어 찹쌀풀을 쑤어 둔다. 

*이때 찹쌀풀이 되직하면 일반 열무김치, 물처럼 멀겋게 끓이면 열무물김치가 된다.


04 물기를 뺀 열무에 다진 마늘, 고춧가루, 설탕, 까나리액젓을 적당량 넣고 버무린다.


05 통에 담기 전 큰애한테 하나 맛보라고 준다.






[이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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