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서울과 가까운 경기도의 한 동네에서 22년을 나고 자랐다. 대학생 때까지 살았으니까 아마 이곳에서 살며 취직하고 직장을 다니고 결혼을 하고 독립을 하더라도 이 동네 안에 정착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만큼 나의 고향인 그 동네를 많이 사랑했다. 봄이면 내가 태어난 아파트단지에는 백 살은 됐을 것 같은 벚나무에서 벚꽃이 흐드러졌고, 뭐든 다 있는 상업 단지는 24시간 빛났으며, 나의 모든 친척과 친구들이 그곳에 있었다. 학창 시절 읽던 순정만화 속 아름다운 동네 같았다.
옛 동네의 벚꽃이 멋진 하천. 주말이면 돗자리와 도시락은 필수였다. ⓒ 이현희
영원할 줄 알았던 나의 동네에서 우리 가족은 금전적인 문제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원래 동네에서 50km나 떨어진 아무 연고도 없는 동네로 그렇게 이사를 왔다. 상업 단지 코앞에 있는 데다가, 아파트 동끼리 간격이 백 미터도 될까 말까 하는 개미집 같은 도시에 살던 내게 새로운 동네는 아주 혁명처럼 느껴졌다. 깨끗하고 느린 동네였다.
23살이나 먹어서 만나게 된 한적한 동네는 당시 막 사회초년생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하던 내게 서울에서의 번뇌를 잊게 해주는 곳이었다.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우리 가족이 하고 싶은 대로 막 지내는 동네. 그렇게 나는 이곳에 스며들었다.
이제는 심지어 가끔 친구나 친척들을 만나러 그리웠던 옛 동네를 방문해도 금방 다시 지금 내 동네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어느 날은 그 옛 동네에 놀러 갔다가 지각한 친구를 기다리면서 잠시 상업 단지 한가운데 서 있었는데, 너무 복잡하고 오가는 사람들은 시끄러웠다. 그때 문득 떠오른 건 엄마의 대왕 주먹밥이었다.
많은 주민이 서울로 출퇴근하며 바쁘게 살던 옛 동네. 우리 엄마, 아빠도 그중 하나였다. 내 나이 고작 10살 때인가 아빠 사업이 급격히 어려워지면서 엄마도 함께 가게로 나가 '바깥 노동'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고깃집, 그다음엔 바비큐, 곱창집, 마지막 가게였던 감자탕집을 접을 때 내 나이는 22살이었다.
사진 촬영하라고 엄마가 만들어 준 대왕주먹밥. 내 키는 초등학교 5학년 때 그대로인데 왜 대왕주먹밥은 줄어든 것 같지? ⓒ 이현희
11년을 음식 장사에 매여 살면서도 엄마는 '안살림'과 나의 아침 식사를 챙기지 않는 날이 없었다. 엄마가 차려준 아침밥 하면 떠오르는 건 엉뚱하게도 김자반과 잘게 썬 벽돌햄을 넣고 마트 표 참기름과 진간장을 넣어 간한 대왕 주먹밥이다. 거짓말을 약간 보태 거의 수박만 했던 그 주먹밥은 먹성이 지나치게 좋았던 나에겐 아주 든든한 아침 식사였다.
더 자세한 엄마의 벽돌햄대왕주먹밥 레시피
- 늘 배고픈 큰딸 기준 1인분
01 마트에 가면 할인하는 벽돌햄을 미리 사둔 후 시간 날 때 잘게 썰어 손질해둔다.
02 따뜻한 밥에 썰어 둔 벽돌햄과 김자반, 참기름, 진간장을 넣고 섞어 준다.
- 뜨거운 밥이 아니면 안 먹는 큰애 기준. 찬밥만 먹는 작은 애 것은 미리 식혀둔다.
03 맛을 보며 진간장이나 밥을 더 넣는다. 햄이 짜다는 걸 기억하자.
04 최대한 크고 동그랗게 꾹꾹 뭉쳐 대왕주먹밥 형태로 만든다. 거의 1인당 밥 2공기 기준.
05 만들어 두면 언젠간 큰 애가 맛있게 해치운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그 주먹밥을 일주일에 두세 번 이상은 먹었다. 돌이켜 보면 대왕 주먹밥이 그토록 자주 등장한 이유는 분명했다. 새벽까지 장사를 마치고 돌아와 피곤한 엄마가 미리 만들어 두고 잘 수 있는 음식이었다. 학교 코앞에 살면서 종이 치고 나서야 집을 나섰던 내가 바로 집어 먹거나 쉽게 들고 나갈 수 있는 음식이었다.
지금 동네로 떠나오면서 우리 집은 결국 장사를 그만뒀다. 유치원 조리실에 취직한 엄마는 이제 밤에 근무하지 않아도 됐다. 그 무렵 나와 동생이 줄이어 졸업과 취직을 하면서 동네 분위기만큼 우리 삶도 여유로워졌다. 가끔 엄마와 나의 바쁜 생활이 담긴 그 주먹밥이 생각나긴 해도, 굳이 만들어 먹지 않는다. 지금 우리는 바쁘지 않기 때문에. 그 맛은 그립지만, 바쁘고 힘들지 않은 엄마가 있는 지금이 더 좋기에 그저 그리움으로 남겨뒀다.
[이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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