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다른 오늘

<멋진 신세계>를 읽고

by 눈부신 일상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철학자들이 아니라 무늬를 도려내는 자들이나 우표수집가이다.”

<멋진 신세계> p.9



첫째가 학교에서 돌아와 소파에 털썩 앉는다. 아빠와 기타를 배우러 가는 시간 외에 하루 일정이 없다며 만족스럽게 이야기한다. 그때 옆에 앉아 있던 남편이 오후에 미팅이 있어서 기타 학원에 갈 수 없을 것 같다며 지금 다녀오자고 했다. 아이는 난처한 얼굴이다. 방금 집에 왔으니 좀 쉬고 싶기도 하고 아빠와 함께 기타 연습을 하고 싶기도 한 듯했다.


“힘들지? 맛있는 아이스크림 사 와서 먹으며 오후에 신나게 게임 한 번 하게 힘내서 다녀와!”


아이는 밝은 얼굴로 아빠와 집을 나섰다. 수업 후 아이는 아이스크림을 맛있게 먹고 신나게 게임을 했다. 늘 게임 시간은 쏜살같다. 이제부터 학교 숙제와 매일 과제를 할 시간이다. 게임을 할 때 초롱초롱 빛나던 눈이 사라진다. 미동도 없이 집중하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10분을 겨우 버티는 모습이다. 조금만 쉬었다 하면 안 되고 묻고 땅이 꺼질 듯 한 숨을 쉬며 힘없이 발을 질질 끌며 걸어간다. 아이가 활기를 잃어갈수록 엄마는 속이 탄다. 오늘도 엄마는 녹음기가 된다. 쉴 새 없이 녹음기가 돌아간다. 더 크고 거세게.


“애들아, 학교 숙제 다 했어?”

“애들아, 오늘 해야 하는 과제 다 했어?”



결국 아이는 저녁 식사 후에도 약속한 과제를 마무리하지 못했다. 잘못을 조목조목 따지며 얼마나 실망스러운 상황인지 설명하자 아이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그나마 둘째는 앞에 앉아 급하게 손으로 숙제를 하면서 입으로 자신을 변호한다. 첫째는 책상에 목석처럼 앉아있을 뿐이다. 마음과 생각을 담은 말은 아이에게 전해지지 않고 허공에서 맴돌다 다시 나에게 돌아왔다. 아이는 거칠게 책을 펼치고 문을 닫는다. 꽝!


유난히 강렬한 문소리에 멈칫한다. 긴 한숨이 났다. 사소한 일에서 불거지는 잦은 실랑이가 진을 빼게 했다. 습관적으로 반복되는 일상에 덜컥 겁이 났다. 매 순간이 모여 나를 이루고 삶을 만든다는데 매일 찍는 종잡을 수 없는 발걸음에 불안감만 커졌다. 며칠 전 함박눈이 내렸을 때, 금방 집 앞 농구장에 하얗게 쌓인 눈 위에 아이들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우리가 지나온 길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우리가 걸어온, 걸어갈 인생도 이렇게 선명하게 보이면 얼마나 좋을까?


*


두 발로 찍는 발자국보다 가상의 공간에 더 많은 흔적을 남기고 그 흔적이 돈으로 연결되는 데이터의 시대이다. 기술의 발전으로 다양한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해서 유의미한 정보를 추출하고 활용하며 삶을 더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 인공 지능은 단순 정보다 지식을 넘어 감정까지 연구 중이라고 한다. '나도 모르는 내 마음을 네가 어떻게 알겠냐!'며 웃고 넘기지만, 수많은 발자국을 보며 과학 발전이 점점 두려워진다. 과거와 현재가 끊임없이 대화하며 역사를 이어왔지만 지금은 방대한 데이터가 분석한 과거의 패턴이 현재와 미래를 지배하는 느낌이다. 인공 지능이 과거의 나를 바탕으로 추천한 영상을 무의식적으로 클릭하다 보면 가끔 섬뜩함을 느낄 때도 있다. 과거의 경험과 생각이 현재의 선택을 제한한다면 미래는 한정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아이들과 무의미한 다툼을 반복하며 쌓은 일상은 어떡하나?


살아온 매 순간이 모여 삶을 이룬다. 인공지능이 데이터를 수집하듯 오늘은 과거의 경험과 생각에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지만 나는 인공지능이 아니다. 과거의 경험이 무엇이든 교훈 삼아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 과거의 나에 매몰되지 않고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어제의 내가 어떤 모습이든 상관없다. 더 나은 한 걸음을 내디디며 어제와 다른 오늘을 만들어 갈 수 있다. 고요한 아침에 차분한 마음으로 자고 일어난 아이들과 어제의 대화를 이어갔다. 미안한 마음을 사과하고 정중히 내 마음을 부탁했다. 자연스레 방문이 열리고 다시 웃으며 지냈지만, 아이들 마음에 감정은 남아있었는지 금방 눈물이 글썽인다. 무참히 찍힌 과거의 발자국에 불안한 마음을 고스란히 두고 새로운 아침을 시작한다. 녹음기의 콘센트도 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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