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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경은 Jul 20. 2022

첫 무대

  누구에게나 첫-은 있다. 처음이라 어설프고 낯설지만 그만큼 강렬했던 경험. 때로는 첫 경험이 인생을 관통하는 중심축이 되기도 한다. 나에게는 첫 무대가 그랬다. 때는 열 세 살의 가을. 학교에서 임원을 하고 있던 몇몇 아이들을 대상으로 일종의 오디션이 열렸다. 졸업식 축사를 맡을 사람을 뽑는 자리였다.      


남들 앞에 서는 게 부끄럽고 어려웠던 나도 오디션에 참여하게 됐다. 선생님 네 분이 앉아계셨다. 선생님들 앞에서 A4용지에 적힌 축사를 읽는 게 오디션의 전부였다. 교단에 서 종이에 적힌 글을 읽어내리는 건 의외로 떨리지 않았다. 내 목소리가 공기에 실려 동그랗게  퍼져나가는 느낌이 좋았다. 밖에서 나를 지켜보던 아이들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너 잘한다! 나의 첫 무대는 다분히 무난하게, 다만 나에게 작은 울림을 남겼다.      


첫 무대의 경험 이후 말하기, 정확하게는 소리 내어 읽기에 작은 자신감이 쌓였다. 이후 두 번째 무대의 기회가 주어졌다. 두 번째 무대는 성당이었다. 천주교 신자였던 엄마를 따라 성당에 가야 했던 성당. 예배를 보는 날, 신자들 앞에서 소리 내어 성경을 읽게 됐다. 고요한 성당 안에 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보다 나이가 한참 많았던 성당 언니가 간결한 한 줄 평을 했다. 차분하게 잘 하네.      


인생에 파동을 남기는 것은 누군가 툭 던진 말이 아닐까.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대수롭지 않은 말 한마디가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 것을 보면. 그리고 말이 남긴 파동들은 크고 작은 동심원을 그리며 삶의 이정표도 만들어줬다. 글을 쓰고 말하는 사람. 십 대의 내가 꿈꾸는 목표가 됐다.      


선명한 목표가 일찌감치 생긴 것은 때로 축복처럼, 또 때로는 저주처럼 느껴졌다. 명백하고 상세하게 하고 싶은 일이 정해졌지만, 그 길을 걷는 것은 순탄하지 않았다. 계획처럼 인생이 흘러가지 않는다는 자연스러운 명제를 너무 일찍 체감해야 했다. 내가 정한 정답은 정해져있는데, 내가 그 정답이 아닌 사람인 것 같은 느낌을 종종 마주하며 청춘을 보냈다. 그 때는 그랬다. 정답이 한가지였던 것 같았고, 그게 아니면 내 인생은 실패작이 될 것만 같았다.      


이금희 아나운서가 모교 선배이자 교수님이었는데 학기를 마무리 할 때 한 사람 한 사람씩 면담을 해주셨다. 10포인트로 가득 채운 A4용지 2장을 들고 고민을 털어놓다가 끝내 울어버렸다. 제가 아나운서가 될 수 있을까요? 나의 가능성을 점쳐 달라는 질문에 긍정도 부정도 아닌, 다만 따뜻했던 답변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졸업 후 모교에 서너 차례 특강을 하러 갔다. 강의실 밖까지 따라와 자신의 대학 생활을 면밀히 설명한 후 가능성을 묻는 후배들이 종종 있었다. 그들의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며 과거의 내가 생각났다. 나 역시 긍정도, 부정도 아닌 답을 해줄 수 밖에 없었다.      


간절함에 간절함을 더해 우겨넣듯 청춘을 보냈다. 이제야 그때의 내가 보인다. 조금 불쌍하고 약간 한심하고 많이 안쓰럽다. 나이가 든다는 게 좋은 요즘인데, 더이상 꿈이 나를 앞질러 달려가게 두지 않아도 돼서 그렇다. 비단 꿈이 아니더라도, 뜨거운 열망이 나보다 먼저 달려가게 두지 않아서 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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