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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경은 Jul 20. 2022

책 뒤로 숨는 아이

-책은 좋은 방패였다 


  처음 만난 사람과 가벼운 농담을 주고 받을 때 유효한 도구가 있다. MBTI다. 심리 검사를 통해 16가지 유형으로 성향을 구분한다. 알파벳 네 개로 정의되는데, 크게 외향형과 내향형으로 나누어진다. 외향형인 사람은 알파벳 첫 자리가 E, 내향형인 사람은 I다. 이 기준이면 나는 크고 굵직한 I형 인간이다. 사회생활 구력이 쌓인 삼십대. 게다가 직업의 특성과 환경 덕분에 내향형에서 제법 탈피했지만, 본래의 나는 지극히 내성적인 사람이다. 가족들은 여전히 내가 방송을 진행하는 게 신기하다고 한다.     


  친밀하지 않은 사람들과 말을 섞는 게 두려웠던 어린 시절. 책은 좋은 방패막이가 되었다. 책을 보고 있으면 어색한 대화를 이어가지 않아도 괜찮았다. 집중할 대상이 있으니 불편한 감정도 덜했다. 특히 친척들이 모일 때마다 책 뒤로 숨곤 했는데, 엄마의 어깨를 으쓱하게 한다는 점에서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었다. 때로는 내성적인 성격이 부모의 걱정을 사기도 했다. 내성적이라는 평가가 어떤 뜻인지 정확하게 몰랐지만, 나만의 세계가 있는 것이라고 마음껏 해석했다.

      

  책 읽기를 좋아하게 된 것은 성격의 특성에 지리적 환경도 한몫했다. 집에 가는 길에 서점이 있었다. 어스름한 저녁, 엄마의 손을 잡고 서점에 들르곤 했다. 글씨가 큰 아동 문학 서적을 주로 읽다가 점점 욕심을 냈다. 청소년 문학, 고전 문학, 에세이, 소설. 책은 다양한 세계를 열어줬다. 책 읽기에 스며들면서 관심사가 책이 됐다. 친구네 집에 놀러 가면 책장부터 살펴봤다.     


  지금도 강렬한 인상으로 남은 책이 두 권 있다. 첫 번째는 미미의 일기, 두 번째는 그리스 인 조르바이다. 미미의 일기는 또래 여자아이가 화자로 등장하는 어린이 소설이었는데, 등장인물 묘사와 상황 설명이 어찌나 생생했던지 표지가 너덜해질 때까지 여러번 읽었다. 이 소설 속에는 꼬집어도 울지 않는 ‘해동이’라는 아기가 등장하는데, 그 후로 나는 유순한 사람을 만날 때마다 해동이같다는 표현을 즐겨 하게 됐다. 그리스 인 조르바는 빳빳한 책 표지와 제목에 끌려 읽었던 책이었다. 글자에서 삭은 해풍이 느껴졌다. 조르바처럼 자유롭게, 뜨겁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10대, 20대, 30대에 각각 한번씩 더 읽었는데 10대에 만난 조르바가 가장 인상 깊었다. 꿈을 꿀 수 있는 나이라 그랬던가.     


  읽기의 시간이 쌓이자 쓰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초등학생 때 시를 써오라는 방학 숙제가 있었는데, 가을은 마음의 문을 여는 열쇠라는 제목의 시를 썼다. 그럴듯한 형용사를 잔뜩 넣어 쓴 시는 조악했지만, 교내 상을 휩쓸었다. 그렇게 나는 글짓기를 잘 하는 아이가 됐다. 잘 한다고 인정을 받자 더 글쓰기에 욕심이 생겼다. 손에 잡히는 인정을 갈구하게 됐다.      


  지금 생각하면 참 맹랑한 도전을 많이 했다. 첫 도전은 학예회에 연극을 올리는 것이었다. 극본을 직접 썼는데, 절약을 주제로 한 공익적인 내용이었다. 이후 각종 글쓰기 대회에 도전했다. 한번은 부상으로 카메라를 받았는데, 기뻐서 눈물이 난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처음 알았다. 나중에는 청소년 문학상, 지역사회에서 주최하는 공모전 등 대회를 찾아서 직접 글을 투고하기도 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건 재미있었고, 어른들의 칭찬을 받을 수 있었고, 상장과 상품, 때로는 상금이라는 손에 잡히는 보상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지독한 내향형 인간. 책 뒤로 숨곤 하는 아이. 하지만 나는 늘 문을 두드렸다. 아마도, 내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입증하고 싶어서.     


  한 때는 글쓰기를 업으로 삼고 싶었다. 책을 읽고 소설을 쓰며 평생을 산다면 행복할 것 같았다. 하지만 글을 써 생계를 유지하기에는 내 재능이 한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일찍이 깨달았다. 글쓰기와 문학에 대한 열망은 그대로여서 대학 전공은 국문학과로 선택했다. 책읽기와 글쓰기에 더 가깝고 싶었다면 문예창작과로 진학했어야 할 텐데. 또 그만큼 문학에 진심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성실한 대학생은 못 됐지만, 욕심 많은 대학 생활을 했다. 문학 소녀보다는 열망 소녀에 가까웠는데 전공과 복수전공, 부전공을 8학기에 마쳤다. 졸업 후에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준비생, 그러니까 백수라는 명칭이 전부였는데 휴학을 할 용기도 없었기에 단거리 달리기 하듯 대학 생활을 했다.      


  그 시기에도 책은 도피처가 되어 주었다. 마음에 긴장이 필요할 때는 자기계발서, 현실을 잠시나마 잊고 싶을 때는 고전 문학을 읽었다. 철마다 문학상 수상작을 찾아보는 건 은밀한 재미였다. 책 속의 수많은 화자들은 그들만의 인생을 살아내느라 분투했다. 때로는 나의 초라한 얼굴과 맞닿아 있어서 정면으로 바라보기 힘들기도, 나와는 전혀 다른 세계와 시대를 은연히 걸어가는 게 마냥 신기하기도 했다.      


  책은 친구이자 스승이었다. 어둡고 눅진한 시간을 견딜 수 있게 도와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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