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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완 Jul 23. 2023

인터넷에서 죽고 싶다는 사람을 대하는 법

전문의 소견이 아닙니다

페이스북에 죽고 싶다는 글을 남기는 사람이 종종 있다. 남 일 같지 않다. 나는 10년 넘게 자살 생각과 싸웠고, 몇 년 전에야 비로소 휴전 상태를 이끌어냈다. 그 과정에서 자살 연구자들의 책을 여러 권 읽었다. 자살 생각에도 패턴이 있었다. 이제는 사람이 어떤 상황에서 자살을 생각하고 실행하는지에 대해 어느정도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죽고 싶다는 사람의 글을 보고도 선뜻 댓글을 남기지는 못했다. 돕고 싶다는 마음과 어설픈 지식 수준만으로 문제에 개입하면 책임질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책임한 오지랖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괴롭게 했는지 잘 아는데, 나까지 그럴 수는 없었다.


페이스북에 죽고 싶다는 글을 남기면 민폐일까. 엄밀히 말하면 그렇다. 삶의 추한 면을 보여주는 일은 분명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한다. 하지만, 민폐 없는 세상이란 게 가능하기는 할까. 사람은 존재 자체로 상대에게 책임을 부과한다. 나 역시 다른 사람 탓에 책임을 떠맡는다. 사람은 원하든 원치 않든 서로에게 의존하는 사회적인 동물이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숨쉬는 일도 탄소배출이지 않은가. 다시 말해, 모든 사람은 존재 자체로 누군가의 민폐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어떤 민폐를 감당하고 어떤 민폐를 배제할 것인가이다. 우리는 죽고 싶다는 글을 배제해야 할까. 그건 위험하다. 죽고 싶다는 글을 원천 봉쇄하면 우리는 자살 징후 하나를 놓치게 된다. 누군가에게는 익명의 페이스북 친구가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일지도 모른다. 자살이 사회문제이고, 예방하기 위해서는 징후부터 발견해야 한다면, 죽고 싶다는 글을 마냥 민폐로 봐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자살하고 싶다는 글을 발견하면 무엇을 해야 할까. 그런 글을 발견하면 먼저 선택해야 한다. 사실로 간주할 것인가, 의심할 것인가. 우리는 그 글이 진심인지 알 수 없다. 간혹 단순히 '좋아요'를 받고 싶어서 약자를 행세하는 경우도 분명 있을 것이다. 실제로 유튜브에도 그렇게 행동해서 사람들을 분노하게 한 사건이 여럿 있었다. 페이스북이라고 다를 리가 없다. 그러니 어느 쪽을 고르던 나쁘지 않다. 사실로 보는 사람은 관대하고, 의심하는 사람은 신중하다. 인터넷 세상이 이 모양인데, 신중한 사람을 탓할 수는 없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간혹 자신의 불신을 댓글로 표출하는 사람이 있다. 떳떳하게 살라는 오지랖은 덤이다. 이는 명백히 비합리적인 행동이다. 페이스북 글만 보고 상대가 정말 아픈지 어떤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증거가 부족해서 의심하는 것이지, 사정을 다 알아서 의심라는 게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댓글 하나가 돌이킬 수 없는 무책임일 수 있다. 따라서, 죽고 싶은 마음을 의심한다고 해도 그 의심을 댓글로 남길 필요는 없다. 그런 댓글을 쓰는 사람과 약자 행세를 하며 좋아요를 수집하는 사람이 무엇이 다를까.


자살하고 싶다는 글을 사실로 간주하는 사람은 좀 더 생각할 거리가 많다. 사실이라고 친다면, 그 다음은 도울지 말지 고민해야 한다. 이 갈림길이 굉장히 까다롭다. 돕고 싶은 마음만으로 길을 고르면 안 되기 때문이다. 선의가 나쁜 결과까지 정당화해 주지는 않는다. 선의와 무책임은 한끗 차이다. 좋은 의도로 일을 벌여놓았는데 결과가 나쁘다면 반성해야지 그래도 좋은 의도를 실천했다며 기뻐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댓글을 남기기 전에 상대를 적절히 도울 자격이 있는지 생각해야 한다. 여기서 내 경험담은 근거가 될 수 없다. 자신이 어떤 조건에서 어떻게 자살 생각을 극복했는지, 그 원리가 무엇인지 어느정도 파악하고 있지 않다면, 그저 운 좋게 재난을 피한 것이라고 여겨야 한다. 남에게 자랑해도 될 성공담이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애초에, 인터넷 세계에서 상대가 내 경험담을 믿어야 할 근거가 어디에 있을까. 상투적인 긍정 문구는 상대에게 또 다른 짐일 뿐이다. 그런 걸 남기느니 차라리 '슬퍼요'만 누르는 게 낫다.


남을 돕는 일은 쉽지 않다. 선의는 세상을 바꿀 힘이지만, 그 힘에 합리적인 전략이 빠진다면 파괴만 남을 뿐이다. 그래서 세상은 기부와 자원봉사가 아니라 계획과 강제로 움직인다.


그럼에도 못 본 척 지나갈 수 없다면, 몇 가지만 기억하자. 하나, 사람은 누구나 극단적인 상황에 내몰리면 자살을 생각할 수 있다. 다른 침투 사고가 그렇듯, 자살 생각도 의지대로 억제되지 않는다. 사실상 자살 생각은 내 머릿속에 들어 온 남의 생각이다. 둘,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은 의도치 않게 시야가 좁아진 상황에 처했을 가능성이 있다. 고통이 역치를 넘으면, 사람은 다른 가능성을 생각할 수 없게 된다. 그 순간 자살 생각이 떠오른다면, 죽음 뒤에 무엇이 있거나 말거나 자살을 시도하게 된다. 어린아이들도 그런다. 이런 현상 역시 개인이 마음대로 조절하기 어려운 영역이다. 아무리 죽을 위기에 놓여도 1시간 이상 숨을 참을 수 없는 게 사람인데, 마음 속 일까지 다 통제할 수 있기를 바라서는 안 된다. 셋, 자살을 예고하는 글에 즉시 반응하기보다 시간을 조금 들여야 한다. 자살은 쉬운 일이 아니라서, 자살 생각이 곧바로 자살 시도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모든 생물은 살고 싶어 한다. 따라서 시간이 지나면 상대도 조금 차분해 질 수 있다. 어차치 시야가 좁아진 상태에서는 어떤 말도 들리지 않을 것이다. 넷, 자살이 무엇도 해결해 주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믿자. 내가 삶의 가치를 믿지 않는데, 누구에게 자살하지 말라고 권유할 수 있을까. 마지막 다섯, 원리를 파악하지 못했다면 내 성공담 따위 늘어놓지 말자.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내가 어떤 조건에서 어떤 방법으로 자살 생각을 극복했는지, 그 방법이 왜 효과 있는지 설명할 수 없다면, 내 성공담은 검증되지 않은 샘플들 중 하나일 뿐이다. 애초에, 상대가 내 성공담을 믿어야 할 근거는 없다.


이런 원칙을 기억하며, 요즘 같은 세상에 자살 생각이 얼마나 흔한 일인지, 왜 죄책감 가질 필요 없는지, 삶이 가혹하더라도 왜 살아야 하는지 이야기해 주자. 이 순서를 지켜야 한다. 위로에도 절차가 있다. 우선 상대에게 공감하고, 상대의 시야를 넓혀 준 다음, 상대에게 다른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다짜고짜 대안부터 들이미는, 소위 말하는 T 행동은 자제해야 한다.


만약 누군가가 내게 왜 죽지 않고 살아야 하는지 묻는다면 이렇게 이야기해 주고 싶다. 사실 자살은 주제 넘는 짓이다. 사람은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자살하지만, 죽는다고 해서 고통에서 벗어나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우리의 추론 능력으로는 죽음 이후에 대해 알기 어렵다. 모든 추론은 추론으로 검증할 수 없는 전제에서 시작되어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진리를 탐구할 수는 있어도 단정지을 수는 없다. 죽으면 다 끝이라고 믿어도 되지만, 그게 진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죽음 뒤에 무엇이 있는지 모른다면, 함부로 죽음으로 도약해서는 안 된다. 최초의 자살연구가 에드윈 슈나이드먼이 이야기한 것처럼, 자살은 일시적인 문제에 대한 영원한 해결책일지도 모른다.


죽음 뒤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지만, 삶 속에 의미가 있다는 점은 이야기할 수 있다. 흔히 삶의 의미를 철학의 영역으로만 생각하지만, 현대 과학은 사람이 언제 삶이 의미있다고 느끼는지 밝혀냈다. 삶의 의미를 형이상학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지만, 삶 속에서 삶의 의미를 느껴 볼 수는 있다. 애초에 사람은 누구나 살고 싶어한다. 자살을 고민하는 와중에도 살겠다고 숨을 쉬고 있지 않은가. 적어도 나는 내 주관적인 경험을 부정할 수 없다. 죽고 싶다고 말하는 와중에도, 내 몸은 살기 위해 일한다. 죽으면 다 끝이라고 이야기할 수 없어도, 살아야 희망이 있다고 이야기할 수는 있다.


실제로, 인간의 역사는 피와 약탈의 기록이자 동시에 기적 같은 희망의 기록이다. 최초의 기독교인은 끔찍한 탄압을 극복하고 로마제국을 정복했다. 유대인은 지옥 같은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아서 진실을 전했다. 세상이 아무리 험악해 보여도, 우리는 누군가가 사랑과 정의에 이끌려서 문제 해결에 뛰어든다는 점을 믿을 수 있다. 우리도 알게 모르게 누군가의 사랑 덕에 큰 재앙을 피했는지도 모른다. 그림자가 있는 곳에 빛도 있다. 로마인이 이야기한 것처럼, 살아있다면 희망은 있다.


이런 생각마저 마음을 편하게 해 주지 않는다면 전문의를 찾아야 한다. 무엇이든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자기계발 문화에 속지 말자. 부처님도 그렇게 말한 적 없다. 극단적인 자조론은 인지 왜곡의 증상일 뿐이다.


아무리 유복한 환경에서 살아도 자살을 생각할 수 있다. 자살 생각은 고통을 견디기 어려울 때 나타나는 자연 현상이다. 자연 현상이라고 해서 다 떳떳하게 여겨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적어도 자살을 생각하고 표출했다고 해서 부끄럽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자살하고 싶다는 글을 올리는 일은 그저 누군가에게 두들겨 맞아서 '아야!'라고 외치는 일과 다를 게 없다. 우리나라는 서로에게 충분히 가혹하다. 그러니 큰 위기를 예측할 수 있는 징후마저 무분별하게 공격하지는 않기를 바란다. 무책임한 댓글 탓에 누구도 내 위기를 발견해 주지 않는 세상을 만들지도 모른다. 그런 세상에서 과연 누가 안전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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