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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완 Jan 01. 2023

더이상 성선설을 믿지 않기로 했습니다.

군대가 사람 보는 눈을 바꿨습니다.

저는 군대에서 사람의 본성이 선하다는 믿음을 버렸습니다. 선임과 동기들의 행동을 보고나서는, 사람이 선하게 태어난다는 생각을 고집할 수 없었습니다.


부대 선임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지위가 정당한지 의심하지 않고 당당하게 부조리한 요구를 했습니다. 밥을 먹으러 가기 전에 병영 현관에 집합할 때, 항상 후임은 선임을 부르러 가야 했습니다. 선임들이 특별히 바쁘거나 집합 시간을 몰라서가 아니었습니다. 선임들은 여유가 생길 때마다 누워서 텔레비전을 봤고, 집합 시간은 항상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선임들은 후임이 부르러 오기 전까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후임이 조금이라도 늦으면 적군의 침투를 방치했다는 듯이 화를 냈습니다.


이런저런 부조리에 적응하지 못하는 와중에, 사촌동생의 친구가 군대에서 자살했다는 이야기와 어려운 집안 사정이 끝없이 떠올라서 자잘한 실수를 많이 저질렀습니다. 자다가 다리 근육이 뭉치거나 자주 머리가 멍해졌습니다. 나중에는 과호흡 증상까지 나타났습니다. 숨을 거칠게 쉬다가 몸에 힘이 풀려서 여러 번 주저 앉았습니다. 처음에는 천식인 줄 알았지만, 군 병원에서 여러 검사를 받아 본 결과 아무런 진단도 받지 못했습니다. 중대장님께 요청해서 정신과 군의관을 만나 봤는데, 공황장애라고 진단받았습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부대 안에서는 제가 천식이라고 거짓말을 했다거나, 빨리 전역하기 위해 간부에게 정신병자로 만들어 달라고 졸랐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소문 중에는 제가 선임의 라면을 훔쳐먹었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한 달 단위로 빡빡하게 선후임 관계를 나누고 아무데서나 라면을 먹을 수 없는 부대 안에서, 말단 후임이 선임의 라면을 훔쳐 먹는다는 것이 말이 안 되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무튼 그런 소문이 돌았습니다. 흔히 여자는 같은 여자끼리 뒤에서 욕하고 허튼 소문을 퍼뜨린다고 이야기하지만, 남자도 똑같습니다.


선임과 동기들은 공황장애에 걸린 제가 꾀병을 부린다고 믿었습니다. 분명 군의관으로부터 공황장애라고 진단받았고, 법적으로 의사 진단 없이는 받을 수 없는 약을 먹었지만, 선임과 동기들은 제가 아프다는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20분, 30분 넘게 숨을 거칠게 쉬며 쓰러져 있는 제 모습을 봤으면서도, 선임들은 제게 정신 차리라고 경고했고, 동기들은 저를 욕하고 따돌렸습니다. 부대 간부에게 혼난 적은 없었습니다. 유독 같은 병사들이 난리였습니다. 다른 병사들에게, 저는 그저 폐급이었습니다.


한 동기는 자신에게 피해를 준다며 저를 타박했습니다. 저 같은 인간이 어떻게 군대에 왔냐며 쌍욕을 내질렀습니다. 저도 제가 부대에 폐만 끼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저는 저 나름대로 억울합니다. 예를 들어, 만원 전철에 여러 사람이 엉켜있는데, 제 오른쪽에 있는 덩치 큰 사람이 저를 밀치는 바람에 제 왼쪽에 있는 사람도 중심을 잃었습니다. 이럴 경우, 제 왼쪽에 있는 사람은 저를 탓해도 되는 걸까요? 순전히 제 부주의 탓에 걸린 공황장애도 아니고, 오고 싶어서 온 군대도 아니었습니다. 나쁜 의도를 갖고 제 발로 부대에 찾아가서 피해를 끼친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경우를 보통 불가항력으로 인해 발생한 피해라고 말하지 않나요?


하루에 두세 번씩 쓰러질 정도로 공황장애가 심해서, 결국 상병 계급도 달아보지 못하고 현역부적합심사를 통해 전역했습니다. 군 병원에 몇 개월 입원한 탓에, 밖에서는 약을 먹고 틈틈이 숨을 고르면 일상생활이 가능했습니다.


군대에서 겪은 일은 사람을 보는 관점을 크게 바꿨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누리는 지위, 자신이 내미는 요구가 정당한지 의심하지 않습니다. 눈 앞에 보이는 객관적인 증거보다, 자신의 검증되지 않은 경험을 더 신뢰합니다. 공정함이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고, 일상 속에서 타인을 공정하게 대우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불공정하게 대우받으면 참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렇다는 뜻은 아닙니다. 단지 그런 사람이 얼마든지 있다는 뜻입니다.


혹시나 해서 이야기하지만, 제가 남들보다 나은 사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공정함과 사회정의가 무엇인지 치열하게 고민하기는 해도, 저 역시 매순간 바르게 살지는 못했습니다. 군 복무를 깔끔하게 마치지 못했다는 점도 부끄럽습니다. 다만, 저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매순간 바르게 살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생각보다 변하기 어렵다는 점을 군대에서 깊이 깨달았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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