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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티카카 Oct 13. 2021

학교 대신 병동으로

전라남도 광주광역시


고백하건대 내 사고는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누워서 보낸 지지한 시간이었지만 외과에 유일한 어린이였던 나는 원 없이 관심을 받았다. 싱긋 웃기만 해도 병실을 밝혀주는 주인공 같은 존재였다.  


기억을 더듬어 30년 전 병원 사람들을 추억해 볼까 한다.  




내 병실 침대는 창가 쪽에 있었다. 다리가 묶여 침대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었던 내게 창밖은 만화영화 같은 비현실의 세계였다. 가끔 밤에 깨어 반짝이는 가로등을 보곤 했다. 양을 세듯 병원에 들어오는 구급차 수를 세었다. 구급차의 의미를 잘 몰랐던 나는 양쪽으로 초록빛이 요란히 반짝이는 응급차를 기다렸다. 지금 생각하면 처마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환자 모습이 다행스러울 지경이다.  


병원에 있으면 아픈 일이 평범해 보일 때가 있다. 주위에 모두 각각의 사연으로 아픈 사람들뿐이다. 외과병동이라 사고로 입원한 이가 많았다. 추락이요, 교통사고요. 이유도 다양했다.


아침이 밝아오면 내 지루한 하루가 시작되었다. 엄마가 물레방아 손잡이 같은걸 돌리면 침대 등받이가 올라왔다. 비스듬히 기대앉으면 적신 수건으로 고양이 세수를 한다. 곧이어 엄마는 끈을 입에 물고 머리를 빗어주셨다. 잔머리 한 톨 나오지 않게 세게 묶을수록 엄마의 만족은 높아졌다. 눈꼬리가 정수리로 딸려 올라갈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 너무 세게 묶인 머리칼은 밤까지도 단정함을 유지했다. 자기 전 방울이 풀릴 때면 몇 초간 눈 뒤쪽이 얼얼했다. 머리 정돈이 끝나면 식사 시간이다. 병원 밥은 맛이 없다. 한숨을 쉬고 있으면 엄마는 국그릇을 곰국으로 바꿔주신다. 뼈에 좋다던 곰국을 1년 내 먹었다. 그리고 30년이 지난 지금도 난 곰국이 싫다.


식사를 마치고 나면 간호사 언니들 타임이다. 의사 선생님도 가끔 오신다. 심심한 8살에게 손님은 늘 환영이다. 수다쟁이가 되어 일을 방해한다. 그래도 누구 하나 찡 그리는이 없다. 어린아이는 병실에서 늘 환대받는다.


한주에 한 번은 눈높이 선생님께서 병원으로 찾아오셨다. 아이들에게 기피 대상인 선생님을 나는 참으로 손꼽아 기다렸다. 선생님은 오실 때 책 한 권씩 빌려다 주셨다. 사실 선생님보다 책을 더 기다렸는지도 모르겠다. 그 당시 나는 글씨가 쓰여있는 거라면 무엇이든 환영이었다. 어느 날 옆자리 언니의 책을 읽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회진 오는 의사 선생님께 처음 보는 단어를 물었다. 그게 어떤 단어였는지 기억은 없다. 다만 내 질문에 의사 선생님이 헛기침을 하고 병실 모두가 웃은 것으로 보아 로맨스 소설의 한 단어였나 싶다.



우리  병실에는 젊은 아저씨 한분이 있었다.  침대에서 거북이처럼 고개를 빼면 아저씨 자리가 보였다. 힘이 넘치던 아저씨는 휠체어를 타고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묶여 있던 나는 휠체어  아저씨가 너무 부러웠다. 나도 휠체어 타며 살고 싶다고 엄마에게 많이도 졸랐다.  번은 “~” 해줄  알았던 엄마는  말만 꺼내면 등짝을 때렸다. 스케치북에 휠체어  행복한 나를  장이고 그렸다. 그리고 하트가 잔뜩 그려져 있던 그림은  칭찬 한마디 받지 못한  외면당했다.


아저씨는 내 마음을 눈치챘는지 내가 볼 수 없었던 병원 이곳저곳을 설명해 주셨다. 어느 날은 스테이션에 있는 간호사 언니들 이야기를 잔뜩 해주셨다. 그리고 어떤 날은 큰 기계가 있다던 x-ray실 가는 법도 설명해주셨다. 나는 혼자도 갈 수 있게 귀를 쫑긋 세워 듣고 외웠다. 기대했던 x-ray실 견학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가엾은 내게는 이동식 x-ray만 허락되었던 것이다.  


일주일에 한 번. 외출 기회는 있었다. 병원 밖도 아니고 병실에서 샤워실 가는 길인데도, 전날부터 설렜다. 머리 감는 날은 눈높이 선생님 수업 다음으로 내가 기다리던 날이다. 묶여있는 나를 위해 침대채 샤워실로 입장했다. 가는 길은 기쁨 그 자체였다. 아저씨가 말해주셨던 간호사 스테이션도 지났다. 손을 흔들며 모두에게 인사를 했다. 일분에 한 걸음씩 가고 싶었던 내 마음과 다르게 엄마는 병실 침대를 쌩하니 몰고 갔다. 내 머리 감기는 주중 행사였다. 엄마 혼자는 할 수 없어 병실 식구들의 도움을 받았다. 침대에서 머리를 빼꼼 내밀면 엄마가 샤워기로 머리를 감겨주셨다. 상쾌했다. 향긋한 샴푸 냄새가 좋았다. 그것도 외출이라고 나는 금세 고단해졌다. 그리고 그날 밤은 꿀잠을 잘 수 있었다.  



병원에서도 삶은 흐른다. 아픈 사람들에게도 시간은 흐른다. 그리고 유행도 존재한다.


병실에는 동전을 넣으면 나오는 TV가 있었다. TV 바로 앞 명당자리가 내 것이었다. 만화영화 하는 시간엔 동전을 들고 엄마가 대기했다. 동전 넣는 시간을 못 맞추면 매정하게 화면이 나갔다. 톰이 제리를 잡는 흥미진진한 장면에서 ‘탓’ 하고 시청시간이 끊길 때가 있었다. 나는 멀쩡한 다리 한쪽을 쿵쿵대며 화를 냈다. 엄마는 몇 번은 미안해했고 몇 번은 화를 냈다. 나는 이거 하나 못 맞추는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어느 달엔가. 저녁밥 먹고 잘 시간 즈음 모두가 TV 앞으로 모였다. 요즘 신문에도 난다는 유명한 드라마라 했다. 나 보기엔 재미없어 보이는데 어른들 모두가 울고 웃으며 시청했다. 동전을 잔뜩 바꿔서 돌아가며 딸깍 딸깍 돈을 넣었다. 소등시간이라고 타박하러 들어온 간호사 언니도 한참을 서서 보다 돌아가곤 했다. 옆 병실에도 똑같은 걸 보고 있었다. 멀리서 메아리처럼 들리던 대사가 우리 방 대사와 겹쳐졌다. 사람들이 이렇게 좋아하는 드라마라니. 나도 나중에 드라마 만드는 사람이 되야겠다 다짐한다. 돈을 아주 많이 버는 부자가 될 것만 같다. 힘들어 보이던 엄마도 이때만은 행복해 보였다. 놀아달라 떼쓰고 싶었지만 착한 어린이라 참았다. 참을성 있는 어린이라. 내가 너무 대견스러워 어깨를 쭉 피고 선잠이 들었다.


오전엔 링거줄로 만드는 공예가 유행했다. 간호사 언니에게 링거줄을 받아 매듭을 여러 번 지어 작품을 만들었다. 열쇠고리도 만들고 벽에 거는 장식품도 만들었다. 나는 어려워 꼬기만 연습했다. 아저씨는 어디서 했는지 링거줄을 염색해 들고 왔다. 색이 입혀지니 더욱 예뻤다. 아저씨는 여러 개 만들어 간호사 언니들에게도 선물했다. 엄마와 옆 침대 아줌마는 아저씨가 간호사 언니에게 딱지를 맞은 것 같다며 웃었다. 딱지 맞는 게 무언지 묻고 싶었지만 이야기가 끊길까 가만 듣고만 있었다. 2주 정도 유행했던 링거줄 공예는 아저씨의 사랑처럼 시들해졌다. 그리고 여름이 찾아왔다.



매미 알람 소리에 잠이 깨던 여름의 한 날. 내 앞 침대에 언니가 한 명 들어왔다. 팔꿈치까지 깁스를 한 언니는 표정이 어두웠다. 양손이 모두 망가졌다 했다. 나처럼 다리를 매달지는 않았지만 다리에도 붕대 투성이었다. 이제 막 어른이 되었던 언니가 난 퍽 마음에 들었다. 눈 마주치길 기다려서 싱긋 웃어 보였다. 내 웃음 하나에 밝아지는 어른들과 달리 언니는 늘 싸늘했다. 노래를 좋아하나 싶어 제일 좋아하는 곡을 뽐낼 때도 언니는 어두웠다. 처음 보는 반응에 나는 풀이 죽었다. 나중에 어른들 하는 이야기를 엿들으니 언니는 아파트에서 뛰어내렸다고 했다. 떨어질 때 손을 짚어 뼈가 으스러진 거라고 속삭이셨다. 어른들은 이상하다. 목소리는 안 줄이고 귓속말을 한다. 비밀이라던 언니의 사연은 얼마 지나지 않아 병실 사람들 모두에게 퍼진다. 이야기를 들으면 속상해할 것 같아 나는 끝끝내 모르는 척 연기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랑은 친해질 법도 한데 언니 쪽 커튼은 늘 닫혀있다. 내 작전은 이번에도 실패다.

가끔 한밤중에 언니는 비명을 질렀다. 엄마는 내 귀를 막아주시며 언니가 무서운 꿈을 꾼 거라 이야기해주셨다. 그런데 나는 안다. 가끔 내 꿈에 사고 나던 날이 나올 때가 있었으니까. 언니도 그런가 보다 생각한다. 그리고 잠이 깬 그날 밤엔 언니가 아프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것 같다.


모두에게 말을 걸고 다니던 아저씨도 언니에게는 조심했다. 아저씨랑 이야기하면 기분이 나아질 거라고 언니에게 알려주고 싶었는데 끝끝내 그 말은 하지 못했다. 허벅지에서 쇠막대 빼던 날. 나는 무서워 못 봤는데 언니 보기엔 어땠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 말도 참았다. 드디어 소망하던 휠체어를 타고 산책 가던 날. 내가 얼마나 멋진지 묻고 싶었지만 그 말도 삼켰다. 그래도 퇴원하던 날. 언니는 내게 느릿하게 손을 흔들어 줬다. 엄마가 봤는지는 모르겠다. 내 상상이었는지도. 3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나는 언니가 가끔 생각난다. 어딘가에서 웃을만한 일을 찾아 조금은 행복해졌기만을 바란다.  





한 계절뿐인 입원기간이었지만 침대의 주인은 자주 바뀌었다. 호전되는 사람은 있어도 예전과 같은 모습으로 나가는 사람은 드물었다. 새로 들어오는 환자는 각자의 사고를 떠올리게 했다. 일상 같은 병실 생활이었지만 장애라는 불안함은 늘 공기처럼 떠다녔다. 퇴원하는 환자를 축복했지만 그가 가져가야 할 장애는 병실 모두를 절망케 했다. 내 차례는 어디메인가 가늠하는 사이 시간은 흘렀다.


지금의 나는 그 시절 병실 식구들의 현재를 알지 못한다. 다만 그 입원생활이 앞으로의 일중 최악의 일이기만을 바라볼 뿐이다. 어쨌든 우리 모두는 들어올 때보다 나은 모습으로 병원을 나섰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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