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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기명 Aug 23. 2023

러너스하이에 취한다

 입추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후덥지근한 공기는 한발 물러섰다. 엊그제 시즌 오프 할인으로 산 반바지는 어제까지만 해도 잘 산 바지였지만 이제는 몇 번 못 입을 것 같아서 그런지 괜한 소비였단 생각마저 들게 되는 시원함이었다. 출근룩이 바뀔 정도로 아침 공기가 달라졌다. 퇴근 후에 할일 없을 땐 괜히 보내기 아쉬운 날씨. 그럴 때마다 러닝을 한다. 가벼운 옷차림에 갤럭시워치를 차고 신발만 신으면 끝. 수많은 러닝메이트가 있는 당현천으로 간다. 러닝할 때마다 가는 곳이지만 여러 갈림길이 있어 기분에 따라 정할 수 있다. 아무 생각 없이 멍때리고 싶다면 자전거나 러닝을 자주 했던 눈에 익은 코스를 택한다. 러닝에만 집중하게 되고 평상시 하고 싶었던 사소한 생각들을 자유롭게 펼친다. 힘차게 교차하는 다리와 함께 머릿속도 이 생각 저 생각 징검다리 건너듯 뛰어다닌다.


 2차 장마가 시작되기 전. 저녁 약속을 일찍 마무리하고 집에 가던 길이었다. 마침 내일은 연차였고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없는 그런 날이었다. 어김없이 러닝을 하러 갔고 이번엔 매번 다녔던 중랑천까지 이어지는 코스 대신 도봉구로 가는 곳으로 방향을 돌렸다. 왼쪽 시야에는 가로등 불빛이 반사되어 일렁이는 검은 하천이 보였고 오른쪽엔 언제 어디서 너구리가 튀어나올 것 같은 우거진 풀숲과 농구장, 테니스장, 벤치의 연속이었다. 마주 오는 러너와 서로 앞다투어 달리는 사람들. 이 늦은 시간에도 운동하고 있는 사람들과 마주하면서 문득 생기라는 감정이 떠올랐다. 갈증을 느끼는 눈빛에서 초롱초롱함을 띤 눈이 되기까지. 드문드문 찾아오는 생기라는 것을 생뚱맞게 러닝을 하면서 맞이했다. 심리적으로 여유로울 때 찾아온 살아있다는 생각. 번뜩이는 눈빛을 장착한 채 호흡을 유지하고 러닝을 이어갔다.


 러너스하이. 내게 그 순간이 오는 타이밍은 이렇다. ‘조금만 보폭을 넓혀볼까?’ ‘들숨을 조금 더 깊게 들이마셔 볼까?’ ‘앞사람을 추월할까?’ 이런 고민거리가 없을 때. 자율주행모드를 켠 듯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는 그 순간에 생기가 찾아온다. 누가 등 뒤에서 밀어주고 있나 싶을 정도로 저항감 없이 앞으로 나가진다. 몇 km라도 계속 갈 수 있겠다는 체력의 뽕이 차오른다. 개인마다 다르겠지만 초보러너인 난 러너스하이 지속시간이 길진 않다. 1km 때 두각을 드러낸 생기는 3km가 가까워질 때 바닥을 친다. 그때 반환점을 돌며 집으로 복귀하는데 더 이상 뛸 수 있을까란 걱정을 기반한 러닝이 시작되고 떨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터덜터덜 집으로 들어간다. 그 와중에 나를 반기는 편의점 간판들의 유혹을 이겨내고 집에서 물 한 잔 들이켤 때는 달리진 않지만 2차 러너스하이를 마주한다. 목젖을 타고 몸속으로 달려가는 이 미네랄들. 쫘악 흡수되면서 내 안에 숨어있던 생기로움을 표출한다. “뭐니뭐니해도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게 물이지.” 맹물마저도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으로 포장해 버리는 이 마인드. 러닝의 온점을 찍는 물을 마시며 러너스하이에 거하게 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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