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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기명 Aug 25. 2023

인생을 광고처럼 산다

 “괜히 가을을 수확의 계절이라 부르는 게 아냐.”


 연말에 했던 수많은 다짐들. 꽤 현실적인 성향이기에 낭만이 있는 다짐은 1년 주기로 하진 않는다. 길게는 1년 내에 이루고 싶은 목표를 몇 가지 세워두는데 그 와중에 비현실에 가까운 목표는 9-10개월이란 시간의 숙성을 거쳐 가을에 윤곽을 드러난다. 그래, 이게 농부의 마음이지. 심은 대로 나온다고 보장할 수 없는 이 예측불가함을 안고 지극정성 물을 주고 온도와 습도까지… 또 영양제까지 챙겨주는 이 마음을 매년 가을이 되면 흙 한 톨 손에 묻히지 않고 체감하게 된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일 년의 루틴을 구조적으로 보면 하나의 광고가 만들어지는 단계와 닮았다. 일생을 돌이켜 봤을 때 첫 시작은 이랬다. 길고도 짧은 1년을 어떻게 보낼까 나 자신에게 OT를 주듯 생각을 정리한다. 인생은 브랜딩 그 자체 아닌가. 앞으로의 What to do를 나열하고 우선순위를 생각해 꽤 현실적인 기준으로 How to do 단계로 진입한다. 실제론 How to pay의 단계라 할 수 있겠다. 인풋을 넣으려면 그만큼 자본이 있어야 함을 또 뼈저리게 느낀다. 요즘 너도나도 치는 테니스도 레슨비가 30분에 4만원이니... How to pay에 골머리를 앓지만 D.P의 명대사를 늘 읊어대면서 계좌이체를 한다. “뭐라도... 해야지...”


 자체적인 OT의 기간이 마무리되면 아이데이션 타이밍이다. 다양한 시도를 말 그대로 도전해본다. 보컬 트레이닝이라면 친구와 만나기 10분 전 코노를 갔다 온다든지, 지하철 출퇴근길에 글을 써본다든지 누군가는 너무 과몰입하는 거 아니냐고 물어볼 정도로 몰입한다. 이 과몰입이 혼자만의 발버둥이 되지 않는 게 중요하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다이어트를 결심했거든, 주변에 널리 알려라.’ 만나는 사람마다 ‘살이 빠졌다~’, ‘운동하는 거 맞냐?’ 등 수많은 오지랖이 있어야 목적에 가까워진다고 했다. 이 방법이 잔혹하지만, 전적으로 동의한다. 내 목표를 주변에 널리 알리기로 했다. 아이데이션 회의 첫 번째에 오픈할 A안을 가족이나 연인에게 먼저 공개하는 것처럼 주변 지인의 리액션과 피드백을 겸허히 수용하는 시간을 거치기로 한다.


 아이데이션의 결과물이 다른 사람들에게 공유되지 않고 내 폴더에만 둥둥 떠다니는 것만큼 슬픈 일은 없다. 좋은 아이디어는 누구나 좋다고 생각하더라. 마찬가지로 좋은 목표는 지극히 나에 포커스 맞춰진 것이더라도 남에게 영감이 되고 새로운 시작을 촉진시킬 수 있는 힘이 있다. 이런 것들은 내부순환하는 지하철처럼 제자리를 빙빙 돌지 않는다. 외부에 퍼진다. 주변 사람들에게 알게 모르게 퍼진다. 광고적 상황에선 우리의 크리에이티브가 클라이언트에게 소개되는 단계이다. ‘당신의 브랜드가 겪고 있는 문제에 대한 해답이 담긴 크리에이티브가 우리에겐 있어요’를 적극 어필하는 카피 및 아이디어. 3-4개월간 숙성된 우리의 고생들이 카피와 비주얼 그리고 논리가 되어 그들을 설득하는 하나의 장표로 표현된다.


 이제 수십 개의 업체들과 협업해 아웃풋을 만들어낸다. PPM북을 보면 여실히 느껴진다. 편집, DI 녹음, ART 세팅 등등. 같은 자리에 앉아 미팅하지는 않았지만 하나의 광고를 만들어내기 위해 우린 같은 방향의 길을 걷게 된다. 협업이란 게 개인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게 아닐까 싶다. 글을 쓴다면, 정기적으로 글을 쓸 수 있게 하는 일종의 강제성을 부여할 스터디의 존재라든지, 메모장에 고여있지 않고 세상에 공유할 수 있는 플랫폼이라지. 다양한 콜라보를 펼칠 수 있기에 우리의 취미나 목표는 고민의 흔적이나 낙서를 넘어 어쩌면 하나의 예술로까지 치환될 수 있는 기회가 언제든지 열려있다고 본다.


 PPM에서의 클라이언트와 협의가 이뤄진 내용을 기반한 촬영을 마치고 실제 온에어까지 집행되었다. 짧게는 2개월부터 길게는 1년까지. 그동안의 땀과 한숨이 모여 탄생한 결과물이 세상에 공개될 때이다. 개인의 목표 또한 온에어 기간이 있다. 운동이라면 몇 주만 쉬면 공기 빠진 풍선처럼 0의 상태로 수렴하던 근육들이 몇 개월을 거쳐 완성된 것이라면 프레임을 갖출 수 있게 된다. 거울 속에 마주한 프레임을 본 그 순간이 운동이란 결과물의 온에어가 아닐까. 글 또한 마찬가지. 좋아하는 작가의 문체를 필사하고 따라 쓰는 걸 몇 개월 동안 유지된다면 어느 순간 내 글에서 그 작가의 향이 느껴지기도 한다. 흉내 낼 수 없지만 근접한 향. 근접하다는 것도 사실 대단한 일이다. 우리가 수많은 광고를 보면서 영감을 얻고 레퍼런스 삼은 것과 비슷하게 우리가 지향하는 목표의 이상향을 닮은 결과물을 결국 자기 것으로 만들었을 때. 그 희열과 뿌듯함은 여럿 광고인에게 원동력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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