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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블린 연구소 Jan 16. 2023

조선 소녀 선자의 행복을 바랍니다.

소설 '파친코'를 읽고.

‘역사는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유명한 첫 문장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읽었다. 선자는 일제 강점기에 부산 영도에서 태어났다. 먼저 태어났던 세 명의 형제들은 일찍 잘못되었다. 바닷가 일꾼들을 상대로 하숙집을 하던 부모는 딸을 지극정성으로 키운다. 항상 먹을 것이 부족하고 땔감을 아껴야 하는 형편이었지만, 선자는 의지가 굳은 사람으로 성장한다. 15살에 선자는 장터에서 만난 남자의 아이를 가지게 된다. 하지만 그는 가정이 있다고 하면서 혼인할 수 없다고 한다. 선자네서 머물던 목사 이삭은 그녀의 딱한 처지를 알게 된다. 그는 오사카로 가기 위해서 부산에 온 사람이었다. 이삭은 괜찮다면 자신이 태어날 아기의 아버지가 되어주겠다고 한다. 어린 선자는 뱃속의 아이와 함께 아직도 서먹한 남편을 따라 시모노세키행 배에 오른다.


 선자의 시선을 따라가면서 당시 조선과 일본의 모습을 생생하게 구경할 수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아빠 손을 잡고 나섰던 부둣가 장터는 활기가 넘쳤다. 어물전 아지매는 선자를 볼 때마다 머슴아들 조심하라고 타이르고, 석탄 배달부는 집집마다 새로운 소식도 실어 나른다. 이삭이 데려간 읍내 일본식 우동집이 그녀가 처음 가본 ‘식당’이었다. 변변한 건물도 없는 곳에서 자란 시골 소녀가 마주한 시모노세키항과 오사카역의 압도적인 모습도 그려볼 수 있었다. 일본사람들이 ‘돼지우리촌’이라고 멸칭하는 조선인 거주지에도 가보았다. 손바닥만한 방에 두 가족이 사는 건 기본이고, 방 안에서 실제로 돼지를 키우기도 했다.


 그 시절 조선인들이 감당했던 고단함을 고스란히 목격할 수 있었다. 일제 강점기, 태평양 전쟁, 육이오 전쟁과 같은 거대한 파도가 개인의 인생에는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지켜보았다. 역사책에서는 그저 몇 줄로 정리되는 사실과 해석이 전부지만, 그 속에서 실제로 몸부림치며 살아남아야 했던 사람들의 절박함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오사카역에서 처음 인사한 시댁 아주버님의 눈빛이 마뜩잖을 때 내 마음도 아팠다. 스무 살도 안 된 선자가 김치 수레를 끌고 시장판에 나왔을 때 느꼈을 막막함 때문에 나도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역사, 사회적으로 생각해 볼 거리가 많은 소설이었다. 그런데 솔직히 난 그런 점에는 그다지 눈길이 가지 않았다. 누구의 잘못으로 조선이 다른 나라 손에 넘어갔는지 별로 관심 없다. 일본 안에서 조선 사람의 신분이 무엇이든, 조선말을 하는지 일본어를 쓰든지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바라던 것은 엄마가 정성스럽게 싸준 보따리 하나 들고 머나먼 타국을 찾은 선자의 행복이었다. 조그만 섬마을 영도에서 태어난 소녀가 오사카에서 할머니가 될 때까지의 삶이 두 권의 책에 모아져 있었다. 잠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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