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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블린 연구소 Sep 04. 2023

시골 소녀의 대도시 입성 성공기.

넬레 노이하우스 '폭풍의 시간'을 읽고.

 넬레 노이하우스의 소설 ‘폭풍의 시간’을 읽었다. 미국 네브라스카주를 배경으로 셰리든 그랜트라는 소녀의 성장기를 그린 세 권짜리 시리즈물이다. 셰리든은 갓난아기일 때 지역유지이자 대농장을 소유한 그랜트 가문에 입양된다. 10대에 들어선 소녀는 파란만장한 인생 경험을 겪는다. 1권과 2권에서 양엄마와의 갈등, 유부남과의 사랑, 노래와 작곡에서 보이는 재능 그리고 유서 깊은 집안의 양녀가 된 ‘출생의 비밀’ 등이 드러난다. 마지막인 3권 ‘폭풍의 시간’에서는 가수라는 꿈을 좇아 캘리포니아 LA로 오게 된 셰리든의 사연이 펼쳐진다.


 소설을 읽으면서 음악산업의 빛과 그림자, 팝스타를 구름처럼 둘러싸고 움직이는 메니지먼트 팀, 콘서트 전의 긴장감과 공연과정 등 내가 잘 몰랐던 분야를 간접 체험할 수 있었다. 미중부 시골뜨기가 하루아침에 미국 전역에서 신청곡이 쇄도하는 인기가수가 된다. 아무렇게나 묶은 머리에 낡은 청바지를 입고 녹음실을 두드렸던 소녀가 몇 달 후에는 그래미상을 휩쓴다는 신데렐라 스토리에 책장이 빠르게 넘어간다. 물론 왕관의 무게는 겉보기보다 무거웠다. 어린 나이에 정상에 섰던 연예인들이 공연 후의 공허함을 토로하면서 술과 약물에 탐닉하는 이유도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이야기의 또 다른 축은 주인공 친엄마를 살해한 범인의 정체를 밝혀 나가는 과정이다. 다른 피해자들도 죽였다는 연쇄살인 혐의를 받고 있는 남자와 셰리든이 특수 감옥에서 대면한다. 콘크리트 벽이 미로처럼 건설된 특수 감옥 묘사가 긴장감을 끌어올렸다. 둘 사이에서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듯했고, 글을 읽고 있는데 한여름에도 서늘했다. 넬레 노이하우스는 역시 ‘타우누스 시리즈’같은 범죄 스릴러 장르에서 가장 빛이 난다.


 셰리든 삼부작을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는 주요 배경이 시골에 위치한 대규모 농장이라는 점이다. 드넓은 평야에 들어선 농장에 대한 묘사가 평화로운 수채화를 보는 듯해서 마음이 편안해졌다. 장밋빛 화강암으로 지어진 2층 본채 건물과 넓은 돌계단, 집 앞에는 잘 가꾸어진 꽃밭과 잔디가 펼쳐져 있었다. 조금 떨진 곳에는 부속건물들이 이어지는데 농기계 창고와 닭장, 곡물 저장고와 경비행기 격납고가 있다. 숲속을 가로질러 가면 손님들을 위한 별장이 있고, ‘목련 저택’이라는 로맨틱한 이름이 붙어있다.


 예전에 호주로 연수를 갈 때면 방대한 방목지와 목초지를 지닌 목장의 풍광에 빠져들곤 했었다. 소설을 읽다 보면 자꾸 그 시간과 장소가 떠올랐다. 리모컨으로 철재 정문을 들어 올리고도 진료차로 5분 정도는 더 들어가야 본관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진입로 양옆으로는 2층 버스만 한 트랙터들이 건초를 수확하고 있었고, 직원들 숙소 앞에서는 오늘 비번인 아저씨가 손인사를 건넸다. 목장 사무동과 진료소는 크기도 압도적이지만, 오래된 나무 기둥과 돌로 된 외벽이 자연스럽게 나이 들어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책장을 넘기면서 호주에서 지냈던 기억에 빠질 수 있어서 더욱 좋았다.


 시골 소녀의 LA 성공기로 무난하게 끝을 맺을 줄 알았던 소설은 마지막에 반전을 준비해 두었다. 셰리든은 16살 때 고향에서 성폭행을 당한 후에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범인을 돌로 쳐서 죽인다. 어린 소녀는 자신이 의지했던 니컬러스 아저씨를 찾아가고, 아저씨는 셰리든에게 같이 경찰서로 가자고 한다. 하지만 셰리던은 자신에게 쏟아질 마을의 시선과 양아버지의 실망 때문에 싫다고 한다. 그러자 니컬러스 아저씨는 시체를 묻어버리고, “이제 이 비밀은 죽을 때까지 너와 나만 알고 가자.”고 약속한다. 하지만 유기된 범인의 사체가 우연히 발견되고, 경찰은 유전자 감식을 통해서 니컬러스를 지목한다. 니컬러스는 자신이 했다고 순순히 자백하고, 한편으로는 셰리든에게 절대로 나서지 말라고 전한다. 셰리든은 이제 음악계 최고 스타가 되었지만, 모든 공연 스케줄을 취소하고 고향 네브라스카로 전용기를 돌린다. 어딘가에서 이미 접했던 스토리지만 항상 감동적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정직이 최선의 선택이라는 교훈이 심장에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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