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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첫 인사는 어떻게

by 길엽

우리집에서 아침에 제가 제일 먼저 일어납니다. 새벽 5시가 되면 그냥 눈을 뜹니다. 나이가 들면 새벽잠이 적어진다는데, 요즘 깊이 실감합니다. 아직은 10월 말이라 아침 저녁으로 선선하여 새벽에 눈을 뜨면 기분도 상쾌합니다. 아내가 7시 20분쯤에 잠에서 깨어 아침 식사용 '죽과 해독주스'를 달라고 하기 때문에 2시간 정도는 온전한 제 시간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밥솥이 비어 있네요. 집에 오랜만에 들어온 큰아들이 어제 밤늦게 밥을 다 먹었던 모양입니다. 제가 지난 주 나고야에 다녀왔을 때 잠깐 집에 들어온 큰아들이 밥을 했는데, 물을 적게 넣은 탓에 퍼석퍼석한 것이 안남미처럼 보이더군요. 큰아들이 그저께 저에게 자신이 밥을 하면 아버지처럼 맛있게 되지 않는다고 하네요. 언뜻 보면 저를 칭찬해 주는 듯하지만 결국 제가 밥을 해야 한다는 뜻이겠지요. 그래서 제가 아침밥을 짓기로 했습니다.


쌀과 검은 콩, 렌탈 콩, 그리고 찹쌀까지 섞어서 열심히 씻고 안칩니다. 아내가 찹쌀밥을 유난히 좋아합니다. 저야 아무 거나 잘 먹기 때문에 별로 까다롭지 않지만 장기간 '죽과 해독주스'로 식사를 대용하는 아내가 밥을 예전처럼 오롯이 먹기 힘들어 합니다. 어쩌다 밥 생각이 나서 숟가락을 들게 되면 찹쌀을 넣었나 안 넣었나를 확인할 정도지요. 그렇게 아침밥을 제 나름대로 정성껏 안쳐 놓고 며칠 간 미루어 두었던 책을 펼칩니다. 명색이 한문학 전공자라 한문 관련 도서를 꾸준히 읽어야 하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소홀했었지요. 소여(蘇輿)가 짓고 허호구 외 번역한 <춘추번로의증 春秋繁露義證>입니다. 비교적 난해한 문장들이라 하루에 한 바닥씩 곱씹어 가면서 읽고 있습니다.


오늘 공부할 부분은 "새로 왕이 된 사람은 반드시 그 제도를 고친다. 今所謂新王必改制者."입니다. 짧은 문장에도 크고 깊은 의미가 있음을 배웁니다. 학문이 일천한 저에게는 대학자의 견해가 큰 공부가 되지요.

한 단락을 놓고 원문과 번역문을 비교하면서 몇 번이나 읽고, 다시 인터넷에 관련 자료나 블로그 글 등을 살펴 보는 것도 배우는 즐거움을 느끼게 하는 듯합니다. 퇴직하고 나니 이런 시간이 주어져서 좀더 보람찬 나날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 무슨 책을 읽지 하는 기대감도 좋은 것 같습니다. 자랑일까요. ㅎㅎ.


그렇게 조금씩 이해하면서 읽고 있는데, 아내가 잠에서 깨어 거실로 나오더니 아침 식사 대용 '죽과 해독 주스 주세요.'라고 합니다. 아기가 태어나 세상에서 제일 먼저 만나는 얼굴이 엄마 얼굴이지요. 엄마가 환하게 웃는 모습을 제일 먼저 만나기 마련인데, 그러면 그 순간 아가의 평생 삶이 결정될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산모가 몸이 불편하거나 산모의 현재 상황이 좋지 않은 경우는 또 다른 것이겠지요. 어쨌든 세상의 모든 엄마는 자신의 아기가 태어날 때 환하게 웃어주기 마련이지요. 그러면 그 기억이 아가의 평생에 남는다고 하네요. 그것과는 결이 다르지만, 아내가 잠에서 깨어나 거실로 나오면 오늘은 환하게 웃으면서 인사를 건네보자고 마음 먹었습니다. 물론 평소에도 제가 잘 웃긴 합니다.


그런데 막상 아내 얼굴을 맞닥뜨리는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생각이 나지 않네요. 안녕, 잘 잤어, 잘 잤나. 괜찮나? 졸 불편한 거 같네. 어제 늦게 잤나. 요새 축구 본다고 피곤한가 보네 등등이 떠올랐는데 어떤 말을 해서 아내 기분을 즐겁게 해줄까 고민하다가 그만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래서 아내도 머쓱하게 저를 쳐다보다가 다시 안방으로 들어갑니다. 출근 준비로 말입니다. 세상에! 무슨 말을 해서 아내를 기쁘게 할지 고민하다가 타이밍을 놓쳤네요. 아내가 저에게 물어옵니다.


"왜, 당신 나한테 할 말이 있어? 내가 뭐 해주꼬. 필요한 기 있나."


"아니, 없다."


참 맹숭맹숭하지요. 고민만 하다가는 아침 인사하는 것도 잊어버립니다. 세상사 모두 타이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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