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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엽 Apr 23. 2023

배달료만 4천 원이네

일요일 낮에 아이들 모두 집에 없어 아내와 단 둘이 남았습니다. 하루 자고 난 뒤 컨디션이 한결 좋아진 아내가 제 책상 앞에 의자까지 끌고 와서 점심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가끔은 저에게 이것 저것 해달라고 합니다. 최근에 00출판사에 공모한 원고가 선정되어 출간 지원을 받게 되어 원고 내용을 수정하느라 저도 꽤 바쁩니다. 그래서 한번 본 원고를 다시 꼼꼼하게 살펴 봐야 하는데, 아내가 자꾸 뭔가를 시키네요. 



머위 데친 것과 각종 채소를 앞에 놓고 된장이 안 보인다고 가져와 달라고 하고, 일전에 졸업생이 보내 준 고급 참치회를 냉장고에서 꺼내 달라 하기도 합니다. 어젯밤에는 그렇게 설사와 복통 때문에 애를 먹은 사람이 오늘은 딴 사람처럼 환한 미소와 함께 온갖 이야기를 들려 줍니다. 그것도 제 책상 바로 앞 턱 밑에 딱 앉아서.


"당신 바쁘제?"

라고 하면서도 자꾸만 말을 걸고 여러 가지 일을 시키는 아내 모습이 우습기도 합니다. 


점심을 같이 먹자고 강요하는 바람에 점심을 두 번 먹게 되었습니다. 늦은 아침 겸 점심을 홀로 몰래 먹은 것이 들통나서 같이 웃었습니다. 제가 평소에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리엑션도 잘 하고, 웃기도 잘 하는 편입니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이 저를 잘 놀립니다. 아내도 그렇게 저를 놀리기도 하네요. 점심을 저 혼자 몰래 먹으니 맛있었냐고 말입니다. 


점심을 같이 먹고 나서 아내가 휴대폰에 뭔가 주문을 합니다. 그리고 혼잣말로,


"오랜만에 설빙을 먹고 싶은데, 배달료만 4천원이네."


라고 하기에 제가 그런 것 신경쓰지 말고 빨리 주문해서 먹으라고 했지요. 자꾸만 배달료만 4천 원을 반복하기에 


"그러면 내가 가서 직접 가져올까. 당신 표정 보니 내가 그렇게 해주길 바라는 것 같네."

라고 답했습니다. 가게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지만 설마 그렇게나 멀리 있으려나 했지요. 아내가 설빙을 주문한 뒤에 근무 동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줍니다. 아내에게 잘 해주는 사람은 호평을 받을 것이고, 아내에게 좀 소홀한 사람은 비난을 받기 마련이지요. 직장 최고 수장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세요. 심각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분이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결론이 납니다. 그래서 저도 아내의 말에 크게 동조합니다. 사실 저는 그분에 대해 하나도 모릅니다. 그런 상황인데도 아내에게 동조하면서 함께 비난하지요. 


그분 이유도 모르게 욕을 먹으니 두고 두고 오래 살게 생겼습니다. ㅎㅎ. 일요일 오후 일본 손님들을 차에 태워 가까운 시골 농촌까지 안내하려고 했는데, 집에 큰아들도 딸아이도 없어서 오늘은 그냥 집에서 아내 시중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안내하지 않고 집에 함께 있겠노라 했더니 아내가 저리 좋아하네요. 그래서 설빙을 주문하여 사주는지 모르겠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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