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비단 Aug 23. 2016

향가리

침선수필

'이곳이 맞긴 맞는 곳일까?'   

이정표라고는 눈 씻고 찾아보려야 찾을 수 없고 지나가는 차도 없고 행인도 없는 이 조용한 시골 마을에 과연? 지도 한 장을 달랑 들고서 벌써 한참 동안을 꼬불꼬불한 시골길을 헤매고 있었다.  주위에는 온통 논과 밭뿐이고 조금 멀리 야산이,  인가도 멀리 논 한가운데 드문드문 보일 뿐이었다.   어지간하면 지도만 보고도 어디든 잘 찾아가지만 이렇게 도로 번호도 없고 마을 이름도 없는 곳에선 속수무책이었다.  게다가 길을 물어볼 만한 사람도 없었다.  논두렁 밭두렁을 방향도 모르고 돌아다니다가 어찌어찌하여 조금 큰길로 다시 나왔다.   그리고 마당에서 경찰들이 농구 경기를 하고 있는 시골 파출소를 만나 겨우 길을 물었다.   


결국, ‘조금 가다가 오른쪽으로, 또 좀 가다가 다리 만나면 그 바로 직전에 왼쪽으로,  가다가 커다란 나무를 만나는데 그 앞의 갈라지는 길에서 다시 왼쪽으로……’ 이런 애매한 말을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처럼 붙잡고 길을 떠나 용케 그 경관이 말한 터널로 접어들었다.  이 터널만 지나면 바로 그곳이라고 했다.  그래도 명색이 ‘유원지’라고 이름 붙여진 곳이라는데 어찌 된 게 제대로 된 주차장도 없었다.   여기까지 오는 길에 안내판 하나 없었던 것을 생각하면  주차장을 생각한다는 것은 사치겠다.  깜깜한 터널을 나와 밝은 빛과 함께 갑자기 나타난 강변에는 그저 허름한 농가가 하나 있을 뿐, 그것도 자세히 보니 네 귀퉁이가 닳아서 무뎌진 나무판에 검은 매직으로 ‘메기 매운탕’이라 쓰여있는 걸로 봐선 음식점인가 싶었다.   한마디로 전혀 유원지다운 시설은 찾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비포장 강둑에 차를 세우고 달려 내려간 강변은 눈부신 모래와 동글동글한 돌멩이들이 깔려 있고 섬진강의 강물은 오후의 햇살에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강변의 돌멩이 위로 몸을 반쯤 끌어올린 노란 쪽배는 거실 거실 하게 칠이 일어난 노를 잃어버릴세라 색 바랜 몸 한가운데에 품고 있었다.   잔잔하게 흐르는 푸른 수면 위, 우아한 날갯짓으로 날아가는 흰 백로를 따라 눈을 돌리니 기암괴석의 반대편 강변과 몇 그루의 나무, 그리고 그 위에 지은 백로의 집이 보였다.   푸른 강물과 하얗게 부서지는 햇살,  그 뒤로 농도 연한 먹을 풀어놓은 듯한 색의 바위 절벽,  붉은 몸에 진한 초록의 잎을 달고 있는 노송과 그곳에 집을 지은 흰 백로.   갑자기 ‘펄럭’ 소리가 나며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한 두루마기의 동양화가 눈앞에 펼쳐졌다.  그리고 붓 끝에 석양의 빛을 묻힌 붓이 나타나 쉬지 않고  붓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백로의 날개 끝에 반짝이는 검은 깃털을,  절벽에 튄 영롱한 물방울을,  그리고 흐르는 강물에 반사된 빛을.   그러더니 이제 강물에는 똑같은 한 폭의 그림이 고스란히 비쳐 흐르기 시작했다.  


이곳에 주차장을 만들지 않고, 또 강가를 따라 주욱 늘어선 음식점도 필요하지 않은 이유를 알겠다.  지도에는 분명히 ‘향가리 유원지’라고 표시되어 있었지만 이곳을 오는 동안 그 어떤 유원지의 안내판도,  하물며 ‘향가리’라는 지명이 쓰인 어떤 이정표도 없었던 이유를.   그렇게 해서 사람의 발길을 덜 타고 또 아름답게 지켜졌다는 것을.    물론 이곳에도 사람의 손을 탔던 흔적이 있었다.   일제 시대 일본인들이 호남의 산지와 평화를 약탈하기 위해 철길을 조성했을 때 남원까지 이어지는 철길을 만들려고 아까 지나왔던 바로 그 터널을 뚫고 강을 건너기 위해 설치했던 아홉 개의 철길 교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하지만 완성되지 못한 교각은 이제 그 몸에 박힌 철근에서 녹물이 흘러 붉은 자국으로 물들고 또 섬진강의 물과 바람과 구름이 만들어낸 갖가지 얼룩과 세월의 더께가 피어있다.  철길이 미처 얹히지 못한 아홉 개의 오래된 교각들은 섬진강을 가로질러 이제는 갖가지 덩굴과 수풀로 반쯤 가려진 반대편의 터널을 향해 일렬로 서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주 오래전부터 이곳은 사람의 손길을 거부하는 알 수 없는 힘이 있었나 보다.  그래서 이 철길도 미완성으로 남게 하고 아직까지도 사람의 손과 발길이 드문 곳으로 남아있는 것이겠다.   


강변에 돗자리를 깔고 엎드려 책을 폈다.

남편과 아들은 납작한 자갈을 골라 강물에 물수제비를 뜨고 있다.  ‘퐁퐁 퐁퐁’,   여러 번 물을 희롱하고 자갈은 강물 속으로 영원히 사라졌다.   밀짚모자를 쓴 어떤 이가 노란 쪽배를 띄우고 노를 저어 가고 있었다.  식당 주인이 메기를 잡으려나 보다.  석양에 교각은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그 사이로 움직이는 배는 평화롭고 한가롭다.    눈이 책에서 멀어지고 마음은 수면을 따라 흘렀다.    삶의 귀중한 시간이 그저 마음으로만 와 닿는 세상을 품고서 섬진강의 미완의 교각 사이로 어울려 흘렀다.    


향가리 유원지  :  전북 순창군 섬진강변.                            

예부터 경치가 아름다워 시인 '묵개'가 천하의 풍류 한량들과 뱃놀이를 즐겨 각지의 기생들이 모여들어 지명을 아예 香佳里(향기 아름다운 마을)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아직도 이런 모습으로 남아있는지는 모르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오래된 물고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