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 맞다. 이 글을 드리면 되겠다. 여기에 다 쓰여 있으니까. 그럼 할아버지는 글 속에서 나와 함께 백년, 운 좋으면 천년 사시는 거야. 사람들을 즐겁게 하면서. -
1부. 선전 포고
2부. 전투
3부. 오폭
4부. 인연
- 선전 포고 -
2018년 1월의 한가운데 날.
한낮의 온기가 아직은 남아 있는 초저녁의 아늑함이 귀래 면사무소 소재지를 부드럽게 감싸 안는다. 절친 셋이 술자리를 시작하기엔 때, 곳, 분위기가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중심 도로. 색 바랜 아스팔트 길은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굳이 고개를 들지 않아도 한눈에 냉큼 잡힐 정도로 가깝다. 길 좌우로 줄러리 늘어선 상점들은 거의 다 일층이고 육이오 전쟁 나고 부로꾸로 지은 거도 여즉 있다. 노변 주차가 띄엄띄엄 하니 어느 가게든 아무 때고 바로 차를 댈 수 있고 해질녁이라 인적마저 드물다. 중심이랄 것도 없어서 시내를 관통하는 도로라고는 이거 하나뿐이다.
귀복식당.귀하고 복 있는 식당일까? 귀래의 복 있는 식당일까? 기억하기 쉽고 흔치 않고 궁금증까지 불러일으키니 이름 한번 잘 지었다. 도로 남쪽 입구 귀래초등학교 옆에 자리 잡은 건물은 단층이고 외관이 허름하다. 정면은 조선 왕비가 대례복을 입을 때 하던 대수머리를 닮아서 간판이 가뜩이나 낮은 건물을 거반 차지했다. 안에 형광등을 넣은 파나플렉스 간판은 도로를 향해서, 같은 재질인 측면 입간판은 인도 쪽으로 귀복식당 네 글자를 등빛에 담아 쉬임 없이 흩뿌린다. 어쩌다 지나는 이의 눈길을 붙들어 보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어서 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서니 여주인이 주방에서 일하다 말고 나와서 반갑게 맞이한다. 얼굴선이 부드럽고 눈매가 서글서글하니 젊었을 때 사내깨나 따랐을 미인형이다.
실내. 의외로 깔끔하다. 탁자를 벽과 일렬로 죽 길게 놓았다. 탁자와 나란히 통로를 내어 직선으로 주방을 연결하니 동선이 뻥 뚫려 오가기 쉽고 자연스럽다. 한가운데를 통째로 비우고 설치한 큼지막한 난로가 반가워 얼른 다가서서 위로 양손을 뻗는다. 뜨거운 열기가 손바닥에 전해지며 금방 온몸이 훈훈해진다. 좌우로 나란히 꾸민 방들. 실내나 방이나 탁자를 앞에 두고 앉은 사람들이 없으니 우리가 저녁 타임 첫 손님이다.
우측 첫 번째 방. 더 깔끔하다. 상을 가운데 두고 안쪽 자리에 둘, 맞은편에 하나가 마주 앉으니 기대한 순간이 마침내 온 듯 들뜬다. 바닥은 방석을 깔지 않아도 될 정도. 궁둥이를 들썩이지 않아도 되니 적당히 따스하다. 도로 쪽 벽은 방충망을 덧댄 새시 창이다. 벽의 반을 차지했다. 여니 환기가, 닫으니 밀폐 또한 잘되어 단열에 도움된다. 미닫이 창의 아래턱받침에는 지난여름에 죽어 널브러졌을 법한 모기나 곤충 사체 하나 없다. 구석까지 깨끗한 거로 보아 계절이 바뀌고 대청소를 한 게 틀림없다.
창 반대쪽 벽에는 상단에 원산지 표시와 메뉴표가 쌍둥이처럼 똑같은 규격으로 다정하게 바싹 붙어 있다. 백지에 흑색으로 프린터 출력해서 코팅했다. 글자가 잘 보이고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으니 원근이 맞고, 벽면과 구도와 배치도 적정하다. 벽은 밝되 무늬가 튀지 않게 도배해서 천정의 형광등 빛과 어우러져 은은하다. 화려하지는 않으나 이것저것 신경을 많이 썼다. 주점을 겸한 시골 식당치곤 단아하고 편안하다. 바닥의 온기를 잃기 싫어 궁둥이를 끌고 열린 미닫이 방문으로 다가간다. 큰 소리로 주문한다.
"여기요. 삼겹살 삼 인분에 소주 한 병이요."
모녀. 상차림 하느라 방을 들락날락하는 딸은 20대 후반. 주방과 주고받는 말투나 나이 차이로 보나 여주인이 엄마고 서빙하는 여자는 딸이 틀림없다. 딸은 키 크고, 몸매 늘씬하고, 골격은 탄탄하여 건강미가 넘친다. 눈꼬리가 살짝 치켜올라 성깔은 조금 있어 보인다. 딸도 엄마도 나름 매력적이어서 시골 식당서 썩긴 아깝다. 무슨 사연이 있겠지.
밑반찬으로 굴 한 접시, 동그랑땡과 큼지막한 직사각 고기전. 이것만도 일 인분이 충분하다. 밑반찬보다 밑안주라는 말이 어울린다. 삼겹살은 두툼하고 접시에 쌓인 양이 얼핏 봐도 육 인분. 이리 줘도 남는가 싶을 정도다. 시골이라 그런가 푸짐하다.
넉넉한 밑안주에 두터운 삼겹살을 맛나게 먹다 보니 금방 배가 부르다. 헌데 속이 답답하고 오한이 나며 컨디션이 급격히 나빠진다. 술자리 초반이고 술도 약해서 소주를 반잔씩 나누어 천천히 마셨는데도 그렇다. 속이 아픈 듯 불편해 앉은 자세가 힘들어 자꾸 몸을 외로 비틀게 된다. 밖에 나가서 맑은 공기를 마셔 본다. 그것마저 도움이 안 된다. 허나 실내에서 대기 중인 딸에게 말 붙일 좋은 핑곗거리는 생겼다.
"약국이 어디 있지요?"
"여기는 약방이에요. 나가서 왼쪽으로 조금 걸어가면 버스정류장이 있어요. 거기예요."
맞다. 여긴 면이고 시골이다. 젊고 건강한 미모에 잠시 취해 놓을 뻔한 정신을 퍼뜩 차린다.
"아, 그렇구나. 약방이지. 속이 안 좋아서 약 좀 사 먹어야 하는데."
"일찍 문 닫았을지 몰라요."
거리. 약국과 약방을 구분 못 해 조금 머쓱해진 기분을 떨치려 말을 더 잇지 않고 바로 거리로 나선다. 어둠이 방금 내려 밤이라 하기엔 이른 시간인데 거리엔 사람 하나 안 보인다. 일찍 문 닫은 가게가 연 거보다 많아서 뭉터기로 이빨 빠진 모습에 불빛마저 귀하다. 삼 대 손짜장집, 당구장을 지나 사거리를 건넌다. 통닭집, 방앗간, 그리고 차부슈퍼. 차부라는 두 글자가 정겹게 다 온 발길을 붙든다.
차부는 버스부라고도 일컬었다. 버스터미날이라는 말이 생기기 전에 명칭이니 60년대 용어를 아직껏 쓰고 있는 거다. 도시는 버스터미널이지만 면이라서 주정차된 버스 한 대 보이지 않으니 버스정류장이라고 부르는 게 맞다. 차부슈퍼에 붙어서 차부 즉 버스정류장, 그리고 주유소가 이어진다. 가는 길 내내 단 한 사람도 보이지 않으니 겨울밤이 더 적막하고 스산하다. 번잡한 도시에는 없는 옛 거리의 풍경이 오랜만이라 오히려 반갑다.
약방. 잠깐 걷다 보니 찾던 약방이다. 태어나 처음 와 본다. 불빛이 새어 나오는 걸로 보아 다행히 아직 문을 열고 있다. 가게만큼 자그마한 간판에 상호는 보이지 않고 네모반듯하게 약이라고 쓰였다. 겉보기에도 낡은 알루미늄 새시문을 여니 삐거덕 비명을 지른다.
안은 네댓 평. 협소하고 어두침침하다. 문 바로 앞에 가로로 매대가 놓여 있다. 커다랗고 둥근 무쇠 난로가 매대 앞이면서 안으로 진입하는 비좁은 통로를 떡하니 막고 있다. 연탄 석 장씩 석 줄 쌓는 난로인 거 같다. 공간이 작아서 난방은 반이면 충분할 텐데 생뚱맞게 크다. 키 작은 할아버지가 연탄집게를 들고 허리 굽혀 난로에 연탄을 갈고 있다. 주인인가 일꾼인가 긴가민가. 다른 이 더 보이지 않으니 주인이 맞는갑다.
"안녕하세요."
내가 먼저 인사한다. 나를 힐끗 보고는 아무 대꾸가 없다. 손님보다 탄 가는 게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일인 양 서두르지 않는다. 하던 일 다 마치고 나서야 카운터 안쪽으로 들어선다. 잠시지만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 같아 기분이 슬쩍 상한다. 허긴 약방이 여기밖에 없으니 내가 아픈 게 죄지. 허긴 늙으니 따스한 게 최고것지. 허긴 할배니 연탄이라도 갈아 놓아야 밤새 꺼지지 않고 내일이 오것지.
정면으로 마주 보니 카운터보다는 높고 내려다볼 정도로 왜소하다. 얼굴은 양 구레나룻 쪽으로 검은콩과 들깨를 섞어서 한 줌 쥐어 뿌린 듯 검버섯 투성이다. 팔순은 넘어 보인다. 고객으로서 대우는 포기하고 여기에 온 이유를 댄다.
"삼겹살 먹다 말고 얹힌 거 같아서 왔어요. 그저께 밤에 방어회 다섯 조각 먹고 어제 새벽에 두 번 토하고 잠을 못 잤어요. 살짝 상한 걸 먹은 거 같아요. 하루 지나 나은 줄 알고 방금 삼겹살 먹었는데 속이 많이 안 좋아요."
"한의학에서 급체, 소화 불량, 토사곽란이라 하지. 요즘 병원에선 그걸 다 합쳐서 식중독이라 한다네."
신뢰가 팍 간다. 한약방서 들을 법한 용어를 현대 의학으로 단박에 연결시킨다. 알아듣기 쉽고 관록에 권위까지 듬뿍 느껴진다. 올커니, 제대로 왔군.
"네. 맞아요. 가끔 이럴 때 물약 작은 거 한 병에 가루약 한 봉지면 낫더라구요. 그거 얼마죠?"
"자네는 증상만 말하게. 진단, 처방은 내가 하는 거라네. 다른 증상이 또 있나?"
어랏, 완전 의사네. 호랑이 없는 굴에 여우가 왕 노릇? 허긴 병원도, 의원도, 약국도 없으니 뭐. 헌데 살짝 거부감이 생긴다. 더 자세히 증상을 말할 수 있고, 그러는 게 내게 이롭지만 그래 봤자 체하는 데 먹는 약은 뻔하니 말을 줄인다.
"그게 다예요."
"수십 년 된 비법이 있다네. 내가 개발한 거지. 딱 들을 걸세."
비법? 뭔 비법? 신뢰가 갑자기 불안으로 바뀐다. 되짚어 보니 권위를 내세웠고 사설이 길었다. 거기다 비법이라니. 수상하다.
[실전 비지니스]
무릇 거래에서 가격을 말하기 전에 전문가인 양하거나 말이 길어지면 가격이 센 거다. 과도하게 칭찬하거나 입에 침을 바르는 립 서비스도 그렇다. 가격에는 이런 품이 포함되어 있는 거다. 이때는 얼른 가격부터 물어보는 게 정수다. 듣다 보면 빠져나오기 난처하다. 다 듣고도 안 사면 뒤로 흉보거나 욕한다.
더 늦기 전에 단도직입 가격을 묻는다.
"얼마죠?"
"오천 원만 받겠네."
뜨악, 5,000원?
약국 가면 박카스 병만 한 물약 한 병에 가루약 한 포나 쥐똥 같은 까만 약 한 포면 충분한데? 다해서 보통 1,000원, 비싸야 1,500원인데.
"약국서 천오백 원에 사 먹었어요. 그 정도면 잘 들어요. 돈도 얼마 없어요."
"얼마나 가졌나."
헐, 그게 왜 중요하지? 약이든 뭐든 사면서 이런 적은 없다. 약값이 고무줄? 흥정?
나가 누구인가?
젊어서 10년 대기업 근무하며 서울 여의도 33층 빌딩에서 수입부터 구매에다 지방 영업까지 갈고닦은 비지니스맨 아닌가? 외국인, 것도 거대 미국 제조회사, 세계적인 거상 미쓰비시 상사, 미쓰이 상사부터 국내 도매업자, 소매업자까지 두루 섭렵했던 나 아닌가?
그뿐인가?
원주 시장 바닥서 20년 창업 또 창업, 도전 또 도전, 업종을 다섯 번 바꾸고 매번 맨땅에 헤딩하며 산전수전 다 겪었던 나 아닌가? 100원짜리 싸구려 양말부터 1,000원 천냥하우스 상품군, 10,000원 화장품류, 10만 원 의류에다 100만 원, 500만 원짜리 18K 목걸이, 순금 팔찌, 귀금속류까지 웬만한 건 다 직접 사서 소매로 팔아 봤다. 무려 3,000여 품목. 것도 인파가 가장 붐비는 핵심 상권에서 30만 원주시민을 상대했던 나 아닌가?
시골 바닥에 앞창 모자 눌러쓰고 검정 잠바때기 걸치고 꺼주하니까 할배가 날 우습게 본겨? 약 한 가지 못 팔아 봤다고 무시하는겨? 방어 본능에 뿌리 깊은 반항 기질까지 발동한다. 바지 주머니에는 친구들과 술 먹으려고 만원 권으로 다섯 장 현금 50,000원과 신용카드가 있다. 걸기적거리는 잔돈은 빼놓고 와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