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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매기 삼거리에서 Sep 13. 2020

전투

거래의 원리


할배 약방




1부. 선전 포고

2부. 전투

3부. 오폭

4부. 인연     




- 전투 -    




약국서 비싸야 1,500원이다. 허나 여기는 귀래면. 약 살 데가 여기밖에 없다. 시골이고 나이 든 할배니 감안해서 최대 두 배까지 인정. 그래서 3,000원이다.


이런 때는 최종적, 확정적, 불가역적으로 할래 말래 최후통첩 하는 게 고수다. 슬그머니 오른손을 바지 호주머니에 넣는다. 만원 권 다섯 장을 뭉쳐 접은 데서 만 원 한 장을 떼어내 손가락으로 분리한다. 혹시라도 다섯 장이 한꺼번에 달려 나오지 않도록. 황산벌의 계백 장군처럼 배수진을 치고 결사 항전의 의지를 다진다. 


"안 되는데. 더 없나?"

"만 원 한 장밖에 없어요. 칠천 원은 택시비 내야 하구요."

"에이, 그럼 차라리 안 받겠네. 약 지어 줄 테니 그냥 먹게."    


오옷, 변방에 이런 고수가 있다니. 초강수를 일초도 망설임 없이 바로 절초 신공으로 맞받아치다니. 돈이 아니고 마음을 건드리다니. 내 인상이 후덕하니 마음을 흔들어 보는군.    



[실전 비지니스]    


무릇 비지니스의 하수는 자기 원가를 말한다. 상수는 상대의 이익을 강조한다. 고수는 마음을 산다.

무릇 거래에서 안 팔겠다고 잘라 말하거나 차라리 거저 가져가라고 말하면 정말로 이윤이 없는 거다. 이때는 조금 더 주어도 좋다.   



진짜 5,000원짜리여? 약국서 보통 1,000원, 끽해야 1,500원 하니 그럴 리는 없다.

아님 정말 공짜로 준다고? 이건 아니다. 공짜인 건 좋으나 처절한 패배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아님 정말 비법? 할배가 자존심 상해서? 

정신 바짝 차리자. 보통 할배가 아니다. 나 정도 고수가 이리 헷갈리니 절정 고수가 틀림없다. 


허나 어쩌랴? 삐거덕 알루미늄 문짝, 어둑한 조명, 연탄난로를 보면 연탄 한 장 값이 아쉬울 터. 흔들려서도 밀려서도 안된다.    


"아, 그래두 삼천 원은 받으셔야죠."    


할배는 이 말을 듣고 잠시 머뭇하더니 아무 말 없이 오른쪽으로 돌아서 한 걸음 뗀다. 바로 약 진열대. 가로도 세로도 여러 줄 여러 칸인 데서 약을 주섬주섬 챙긴다.

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핫핫 성공이군. 삼천 원. 거 봐. 삼천 원 맞잖아. 


시간이 걸린다. 할배가 병에 든 물약 한 병과 반투명 종이 봉지 두 개를 내와서 내 앞에 다시 마주 선다. 병은 내려놓고, 봉지 위쪽을 문방구 가위로 하나씩 조심스럽게 반듯하게 자르고는 내게 내민다.  


"여기서 바로 먹게."    


뭐 이렇게 오래 걸려? 정말 비법? 너무 궁금하다. 물약은 약국 가면 흔히 주는 거. 별 거 없다. 봉지 하나를 내려다보니 가루다. 이것도 특별한 게 아닌 거 같다. 두 번째 봉지 안을 보려는데 할배가 손등으로 슬쩍 가린다. 


"그냥 바로 먹게."   


진짜 비법이라서 숨기려고? 아님 켕겨서? 

뭔가 이상하다. 먹는 척하면서 봉지 안을 슬쩍 보니 알약들이다. 얼핏 보기에도 수가 많다. 다 흰색. 사각에 모서리가 라운드고 양 배가 통통하게 큰 거 두 개, 가운데 골이 얕게 파이고 작은 거 두어 개, 조금 길쭘한 거 두어 개. 전부 예닐곱에 네댓 종류는 되는 거 같다.  


무슨 알약이 이리 많아? 양으로 조지는 겨? 이것저것 다 멕이면 낫는다? 

비법은 아닌 거 같다.


근데 봉지 두 개 다 밀봉되어 있었고 가위로 개봉했으니 미리 만들어 놓았잖아. 그럼 비법 맞나? 잔머리를 부지런히 굴리는데,    


"어서 먹게. 이거 먹으면 십 분이면 나을 걸세." 

"삼겹살 먹은 거도 있고 뭐 그렇게 빨리 나을까요?"

"급체, 소화 불량, 토사곽란은 삼일 지나 배가 고프면 완전히 낫는 거네. 이 약은 먹고 십 분이면 진정될 걸세. 약 먹고 아무것도 먹지 말게."  


배가 고프면 완전히 낫는다. 듣고 보니 과연 그렇다. 이 냥반은 말만 하면 참 알아듣기 쉽게 설명한다. 한의학에 정통한 게 맞다. 신뢰가 간다.

신뢰? 앗, 또 흔들린다. 안돼! 이미 3,000원으로 낙찰 봤잖아. 다른 말 못 하게 얼른 먹어 버리자. 그럼 빼도 박도 못한다.

서둘러 두 봉지 약을 입에 털어 넣고 약물 병을 따서 물약 반을 입에 물고 얼른 다 같이 삼킨다.   


“꿀꺽.”    


알약이 너무 많고 급하게 삼키니 물약은 넘어가되 알약의 반 가량이 목에 걸린다.

나머지 물약 반을 다시 입에 넣고 꿀꺽. 


그리고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서 아까 분리해 둔 만 원 한 장을 찾는다. 만에 하나 지폐가 더 달려 나오면 도로아미타불 작전 실패에 개망신이니 신중하다. 주머니 속에서 양 눈 삼아 엄지와 검지로 비벼보니 만 원 한 장이 틀림없다. 꺼내서 당당하게 카운터에 놓는다. 

할배가 5,000원 한 장을 거슬러 준다.    


어랏, 3,000원으로 얘기 다 됐는데? 약도 이미 삼켜 버렸는데? 할배가 아직도 5,000원에 미련? 만 원을 손아귀에 넣었으니 자기 맘대로? 

전쟁이란 승기를 잡았을 때 밀어붙여야 하고, 남자가 칼을 뽑았으면 단칼에 베어야 하는 법. 


"삼천 원 드린다고 했잖아요. 칠천 원 주셔야 택시 타고 가요. 아니면 집에 못 가요." 


이미 끝난 거래임을 상기시키고, 덧붙여서 어기면 집에 못 간다고 대못을 콱 박는다. 할배는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머뭇머뭇 2,000원을 더 내준다.    


이겼다! 만세!


희대의 오 분 귀래대첩은 이렇게 나의 승리로 끝났다.

우히히히  


자만은 금물. 흥분을 가라앉힌다. 그래도 이런 촌에서 이런 고수를 만나다니. 더구나 20여 년  연장자 아니신가? 공손히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린다.    

뒤돌아 나오려는데 문 바로 옆에 원통형 용기에 담긴 지팡이 여남은 개가 눈에 뜨인다. 하나 빼서 바닥에 대고 짚어 보니 허리춤 길이에 가볍다. 손잡이가 디귿 자로 굽은 채 굵고 아래로 내려가면서 점차 가늘어진다. 벌레 먹은 홈과 결이 있는 게 자연목 같다. 바닥을 짚는 끝은 흰색 금속으로 굽이 달려 있어 포인트가 살고 닳음 방지로도 좋다. 언뜻 조악해 보이지만, 실용적이라 외려 마음에 든다. 음, 산에 갈 때 다들 공장서 대량 생산한 스틱인데 이건 폼 좀 나겠군. 산책할 때 못된 개가 달려들면 쫓기도 좋고. 


"이거 얼마예요. 지금 돈은 없지만 나중에라도 사게요."

"그거 말고 이쪽을 보게."   



[실전 비지니스]    


무릇 거래에서 가격을 묻는데 대답도 않고 다른 걸 권한다면 수준에 안 맞는다는 거다. 높이 보거나 낮추어 보거나. 이 때는 조용히 따르는 게 좋다. 



군말 없이 할배가 가리키는 곳을 고개 들어 본다. 천장 아래에 우측 벽 쪽으로 줄을 매고 거기에 처마 밑에 고드름처럼 지팡이 수십 개가 일렬로 걸려 있다. 그곳만 보면 마치 지팡이 전문점 같은데 일부러 찾지 않으면 보기가 어렵다. 온통 붉은 칠이고 천장 불빛을 가까이 받아서 그런지 광이 난다. 얼핏 고급스럽고 정열 되어 있으니 멋져 보인다.   


앗, 비싼 거다. 겁이 더럭 난다.    


"아니요. 이거면 돼요. 얼마죠?"

"오만 원"    


띠우우웅, 50,000원이라고라? 이 냥반은 불렀다 하면 5,000원 아니면 50,000원이네. 가격을 5자로 매기나? 비슷한 지팡이를 전에 천냥하우스에서 본 거 같은데. 할배네 거도 끽해야 만 원 대 같은데 50,000원?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

입 꾹 다물고 약방을 나선다.  


다시 술자리 합류.    


두어 시간 동안 저녁 식사 겸 술을 찾는 손님이 네댓 팀. 테이블마다 주문에, 추가 주문에, 불판 갈아주랴 주인 모녀가 분주하다. 손님들은 술기운을 받아 왁자지껄. 그리곤 한 팀, 두 팀 자리를 털고 일어나고 더 이상 손님이 없다. 시골에 이 정도라도 붐비니 그나마 다행이다.  


우리 셋은 첫 주문한 삼겹살 삼 인분을 끝내 남긴다. 보기만 많은 게 아니라 실제 그랬다. 삼 인분 시켰는데 밑반찬, 아니 밑안주 일 인분은 서비스이고 삼겹살은 육 인분 분량. 된장찌개에 공깃밥은 당연히 포기했고. 소주 네 병까지 합쳐서 전부 다 42,000원. 계산서를 살펴보니 삼겹살 이 인분 같은 일 인분에 일만 냥, 소주 한 병 삼천 냥이다. 


조용히 계산을 끝내고 흥업서 출발한다는 택시를 부르고 나니 시간이 십여 분 남는다. 믹스 커피 한 잔 마시며 배웅을 대기 중인 주인아줌마에게 말을 건넨다. 


"밑반찬과 삼겹살 양이 푸짐하네요. 시골 인심이 아직 살아있네요" 

"여기서 우리 집만 그래요."    


대개 이런 말은 감사, 격려와 함께 양 줄이면 안 된다는 경고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주인들은 보통 반색하며 자주만 와 달라고 응답한다. 경고에 대해서 자주 안 오면, 장사 안되면 양을 줄일 수도 있다고 예고하는 거다. 허나 난 경고는 빼고 감사와 나도 음식점 하는 입장에서 이윤 좀 챙기면 좋겠다는 바람만 담아 선의로 한 말이다.  


택시 도착    


셋 중 하나인 친구 집으로 술자리를 옮길 시간이다. 기사는 75세 노인이다. 귀래 토박이고, 귀래에 택시가 이거 딱 한 대란다. 약방 할배에 대해 잠깐 여쭈니, 시골은 동네 숟가락 수 까지 꿴다더니 역시 줄줄. 약방 하신지 60년, 홍천서 오래 하셨고 귀래 온 지 15년이란다. 연세야 검버섯이 말해주고 너무 캐물으면 프라이버시에 실례이고 이동 시간도 짧아 이 정도로 끝낸다.    


귀래 전원주택    


승리의 기쁨을 더해서 본격적으로 셋이서 신선놀음을 즐긴다. 할배가 시킨 대로 나는 술, 안주는 일절 안 먹고 미네랄이 풍부해 건강에 좋은 자연의 지하수만 홀짝홀짝 마신다. 본래 술이 얼콰해야 제대로 신선이 되는 법이나 오늘은 술을 더 안 마셔도 흥겹다. 기분이 되살아나니 할배 약 덕인가 속이 많이 진정된 거다.   

친구 사이에 신선놀음이래야 별 거 없다.  


술이면 뭐든 좋다. 소주, 막걸리, 동동주, 맥주, 와인...

다만 권하되 알아서 마신다.  


뭐든 말하고 싶은 대로 한다. 

다만 자랑질하지 않는다. 배려한다.   


뭐든 하고 싶은 대로 한다. 

노래, 춤, 눕고 싶으면 눕고, 방귀 참지 않고 뿌웅 뀌고.


다만 싫어하면 멈춘다.

쉽다. 눈치 안 보고 마음 편히 술 마시고 떠들고 놀면 그게 신선놀음.


싸다. 인당 이삼만 원이면 충분하다.

다만 여자가 끼면 영 딴판이 된다.  


몇 시간 실컷 즐기고 기분 좋게 잠자리에 든다. 

할배 약이 확실하게 잘 듣는다. 





3부 예고 




반전 또 반전

예측 불허

흥미진진  


이 뿐인가? 


생활에 지혜를

거래에 원리를

노년에 행복을  





-- To be continue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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