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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매기삼거리에서 Sep 13. 2020

할배 약방

거래의 원리


- 아, 맞다. 이 글을 드리면 되겠다. 여기에 다 쓰여 있으니까. 그럼 할아버지는 글 속에서 나와 함께 백년, 운 좋으면 천년 사시는 거야. 사람들을 즐겁게 하면서. -         




1부. 선전 포고

2부. 전투

3부. 오폭

4부. 인연      




- 선전 포고 -     




2018년 1월의 한가운데 날.  


한낮의 온기가 아직은 남아 있는 초저녁의 아늑함이 귀래 면사무소 소재지를 부드럽게 감싸 안는다. 절친 셋이 술자리를 시작하기엔 때, 곳, 분위기가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중심 도로. 색 바랜 아스팔트길은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굳이 고개를 들지 않아도 한눈에 냉큼 잡힐 정도로 가깝다. 길 좌우로 줄러리 늘어선 상점들은 거의 다 일층이고 육이오 전쟁 나고 부로꾸로 지은 거도 여즉 있다.


노변 주차가 띄엄띄엄 하니 어느 가게든 아무 때고 바로 차를 댈 수 있고 해질녁이라 인적마저 드물다. 중심이랄 것도 없어서 시내를 관통하는 도로라고는 이거 하나뿐이다.


귀복식당. 귀하고 복 있는 식당일까? 귀래의 복 있는 식당일까? 기억하기 쉽고 흔치 않고 궁금증까지 불러일으키니 이름 한번 잘 지었다. 도로 남쪽 입구 귀래초등학교 옆에 자리잡은 건물은 단층이고 외관이 허름하다. 정면은 조선 왕비가 대례복을 입을 때 하던 대수머리를 닮아서 간판이 가뜩이나 낮은 건물을 거반 차지했다.


안에 형광등을 넣은 파나플렉스 간판은 도로를 향해서, 같은 재질인 측면 입간판은 인도 쪽으로 귀복식당 네 글자를 등빛에 담아 쉬임없이 흩뿌린다. 어쩌다 지나는 이의 눈길을 붙들어 보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어서 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서니 여주인이 주방에서 일하다 말고 나와서 반갑게 맞이한다. 얼굴선이 부드럽고 눈매가 서글서글하니 젊었을 때 사내깨나 따랐을 미인형이다.  


실내. 의외로 깔끔하다. 탁자를 벽과 일렬로 죽 길게 놓았다. 탁자와 나란히 통로를 내어 직선으로 주방을 연결하니 동선이 뻥 뚫려 오가기 쉽고 자연스럽다. 한가운데를 통째로 비우고 설치한 큼지막한 난로가 반가워 얼른 다가서서 위로 양손을 뻗는다.


뜨거운 열기가 손바닥에 전해지며 금방 온몸이 훈훈해진다. 좌우로 나란히 꾸민 방들. 실내나 방이나 탁자를 앞에 두고 앉은 사람들이 없으니 우리가 저녁 타임 첫 손님이다.  


우측 첫 번째 방. 더 깔끔하다. 상을 가운데 두고 안쪽 자리에 둘, 맞은 편에 하나가 마주 앉으니 기대한 순간이 마침내 온 듯 들뜬다. 바닥은 방석을 깔지 않아도 될 정도. 궁둥이를 들썩이지 않아도 되니 적당히 따스하다.


도로 쪽 벽은 방충망을 덧댄 샤시창이다. 벽의 반을 차지했다. 여니 환기가, 닫으니 밀폐 또한 잘되어 단열에 도움된다. 미닫이 창의 아래 턱 받침에는 지난 여름에 죽어 널브러졌을 법한 모기나 곤충 사체 하나 없다. 구석까지 깨끗한 거로 보아 계절이 바뀌고 대청소를 한 게 틀림없다.


창 반대쪽 벽에는 상단에 원산지 표시와 메뉴표가 쌍둥이처럼 똑같은 규격으로 다정하게 바싹 붙어 있다. 백지에 흑색으로 프린터 출력해서 코팅했다. 글자가 잘 보이고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으니 원근이 맞고, 벽면과 구도와 배치도 적정하다.


벽은 밝되 무늬가 튀지 않게 도배해서 천정의 형광등 빛과 어우러져 은은하다. 화려하지는 않으나 이것저것 신경을 많이 썼다. 주점을 겸한 시골 식당치곤 단아하고 편안하다. 바닥의 온기를 잃기 싫어 궁둥이를 끌고 열린 미닫이 방문으로 다가간다. 큰 소리로 주문한다.  


"여기요. 삼겹살 삼 인분에 소주 한 병이요."    


모녀. 상차림 하느라 방을 들락날락 하는 딸은 20대 후반. 주방과 주고받는 말투나 나이 차이로 보나 여주인이 엄마고 서빙하는 여자는 딸이 틀림없다. 딸은 키 크고, 몸매 늘씬하고, 골격은 탄탄하여 건강미가 넘친다. 눈꼬리가 살짝 치켜올라 성깔은 조금 있어 보인다. 딸도 엄마도 나름 매력적이어서 시골 식당서 썩긴 아깝다. 무슨 사연이 있겠지.  


밑반찬으로 굴 한 접시, 동그랑땡과 큼지막한 직사각 고기전. 이것만도 일 인분이 충분하다. 밑반찬보다 밑안주라는 말이 어울린다. 삼겹살은 두툼하고 접시에 쌓인 양이 얼핏 봐도 육 인분. 이리 줘도 남는가 싶을 정도다. 시골이라 그런가 푸짐하다.


넉넉한 밑안주에 두터운 삼겹살을 맛나게 먹다 보니 금방 배가 부르다. 헌데 속이 답답하고 오한이 나며 컨디션이 급격히 나빠진다. 술자리 초반이고 술도 약해서 소주를 반잔씩 나누어 천천히 마셨는데도 그렇다. 속이 아픈 듯 불편해 앉은 자세가 힘들어 자꾸 몸을 외로 비틀게 된다.


밖에 나가서 맑은 공기를 마셔 본다. 그것마저 도움이 안된다. 허나 실내에서 대기 중인 딸에게 말 붙일 좋은 핑곗거리는 생겼다.    


"약국이 어디 있지요?"

"여기는 약방이예요. 나가서 왼쪽으로 조금 걸어가면 버스정류장이 있어요. 거기예요."   


맞다. 여긴 면이고 시골이다. 젊고 건강한 미모에 잠시 취해 놓을 뻔한 정신을 퍼뜩 차린다.    


"아, 그렇구나. 약방이지. 속이 안 좋아서 약 좀 사먹어야 하는데."  

"일찍 문 닫았을지 몰라요."   


거리. 약국과 약방을 구분 못 해 조금 머쓱해진 기분을 떨치려 말을 더 잇지 않고 바로 거리로 나선다. 어둠이 방금 내려 밤이라 하기엔 이른 시간인데 거리엔 사람 하나 안 보인다. 일찍 문 닫은 가게가 연 거보다 많아서 뭉터기로 이빨 빠진 모습에 불빛마저 귀하다. 삼 대 손짜장집, 당구장을 지나 사거리를 건넌다. 통닭집, 방앗간, 그리고 차부슈퍼. 차부라는 두 글자가 정겹게 다 온 발길을 붙든다.


차부는 버스부라고도 일컬었다. 버스터미날이라는 말이 생기기 전에 명칭이니 60년대 용어를 아직껏 쓰고 있는 거다. 도시는 버스터미널이지만 면이라서 주정차된 버스 한 대 보이지 않으니 버스정류장이라고 부르는 게 맞다. 차부슈퍼에 붙어서 차부 즉 버스정류장, 그리고 주유소가 이어진다. 가는 길 내내 단 한 사람도 보이지 않으니 겨울밤이 더 적막하고 스산하다. 번잡한 도시에는 없는 옛거리의 풍경이 오랜만이라 오히려 반갑다.


약방. 잠깐 걷다 보니 찾던 약방이다. 태어나 처음 와 본다. 불빛이 새어 나오는 걸로 보아 다행히 아직 문을 열고 있다. 가게만큼 자그마한 간판에 상호는 보이지 않고 네모반듯하게 약이라고 쓰였다. 겉보기에도 낡은 알루미늄 샤시문을 여니 삐거덕 비명을 지른다.


안은 너댓 평. 협소하고 어두침침하다. 문 바로 앞에 가로로 매대가 놓여 있다. 커다랗고 둥근 무쇠 난로가 매대 앞이면서 안으로 진입하는 비좁은 통로를 떡하니 막고 있다. 연탄 석 장씩 석 줄 쌓는 난로인 거 같다. 공간이 작아서 난방은 반이면 충분할텐데 생뚱맞게 크다. 키 작은 할아버지가 연탄집게를 들고 허리 굽혀 난로에 연탄을 갈고 있다. 주인인가 일꾼인가 긴가민가. 다른 이 더 보이지 않으니 주인이 맞는갑다.  


"안녕하세요."  


내가 먼저 인사한다. 나를 힐끗 보고는 아무 대꾸가 없다. 손님보다 탄 가는게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일인 양 서두르지 않는다. 하던 일 다 마치고 나서야 카운터 안쪽으로 들어선다. 잠시지만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 같아 기분이 슬쩍 상한다. 허긴 약방이 여기밖에 없으니 내가 아픈 게 죄지. 허긴 늙으니 따스한 게 최고것지. 허긴 할배니 연탄이라도 갈아 놓아야 밤새 꺼지지 않고 내일이 오것지.


정면으로 마주보니 카운터보다는 높고 내려다 볼 정도로 왜소하다. 얼굴은 양 구렛나루 쪽으로 검은 콩과 들깨를 섞어서 한줌 쥐어 뿌린 듯 검버섯 투성이다. 팔순은 넘어 보인다. 고객으로서 대우는 포기하고 여기에 온 이유를 댄다.  


"삼겹살 먹다 말고 얹힌 거 같아서 왔어요. 그저께 밤에 방어회 다섯 조각 먹고 어제 새벽에 두 번 토하고 잠을 못 잤어요. 살짝 상한 걸 먹은 거 같아요. 하루 지나 나은 줄 알고 방금 삼겹살 먹었는데 속이 많이 안좋아요."

"한의학에서 급체, 소화 불량, 토사곽란이라 하지. 요즘 병원에선 그걸 다 합쳐서 식중독이라 한다네."  


신뢰가 팍 간다. 한약방서 들을 법한 용어를 현대 의학으로 단박에 연결시킨다. 알아 듣기 쉽고 관록에 권위까지 듬뿍 느껴진다. 올커니, 제대로 왔군.


"네. 맞아요. 가끔 이럴 때 물약 작은 거 한 병에 가루약 한 봉지면 낫더라구요. 그거 얼마죠?"

"자네는 증상만 말하게. 진단, 처방은 내가 하는 거라네. 다른 증상이 또 있나?"    


어랏, 완전 의사네. 호랑이 없는 굴에 여우가 왕 노릇? 허긴 병원도, 의원도, 약국도 없으니 뭐. 헌데 살짝 거부감이 생긴다. 더 자세히 증상을 말할 수 있고, 그러는 게 내게 이롭지만 그래 봤자 체하는 데 먹는 약은 뻔하니 말을 줄인다.  


"그게 다예요."

"수십 년 된 비법이 있다네. 내가 개발한 거지. 딱 들을 걸세."


비법? 뭔 비법? 신뢰가 갑자기 불안으로 바뀐다. 되집어 보니 권위를 내세웠고 사설이 길었다. 거기다 비법이라니. 수상하다.   



[실전 비지니스]


무릇 거래에서 가격을 말하기 전에 전문가인 양하거나 말이 길어지면 가격이 센 거다. 과도하게 칭찬하거나 입에 침을 바르는 립 서비스도 그렇다. 가격에는 이런 품이 포함되어 있는 거다. 이때는 얼른 가격부터 물어 보는 게 정수다. 듣다 보면 빠져 나오기 난처하다. 다 듣고도 안 사면 뒤로 흉보거나 욕한다.    

더 늦기 전에 단도직입 가격을 묻는다.  



"얼마죠?"

"오천 원만 받겠네."


뜨악, 5,000원?

약국 가면 박카스 병만한 물약 한 병에 가루약 한 포나 쥐똥 같은 까만 약 한 포면 충분한데? 다해서 보통 1,000원, 비싸야 1,500원인데.   


"약국서 천오백 원에 사먹었어요. 그 정도면 잘 들어요. 돈도 얼마 없어요."

"얼마나 가졌나."    


헐, 그게 왜 중요하지? 약이든 뭐든 사면서 이런 적은 없다. 약값이 고무줄? 흥정?


나가 누구인가? 


젊어서 10년 대기업 근무하며 서울 여의도 33층 빌딩에서 수입부터 구매에다 지방 영업까지 갈고 닦은 비지니스맨 아닌가? 외국인, 것도 거대 미국 제조회사, 세계적인 거상 미쓰비시 상사, 미쓰이 상사부터 국내 도매업자, 소매업자까지 두루 섭렵했던 나 아닌가?    


뿐인가?     


원주 시장 바닥서 20년 창업 또 창업, 도전 또 도전, 업종을 다섯 번 바꾸고 매번 맨땅에 헤딩하며 산전수전 다 겪었던 나 아닌가? 100원짜리 싸구려 양말부터 1,000원 천냥하우스 상품군, 10,000원 화장품류, 10만 원 의류에다 100만 원, 500만 원짜리 18K 목걸이, 순금 팔찌, 귀금속류까지 웬만한 건 다 직접 사서 소매로 팔아 봤다. 무려 3,000여 품목. 것도 인파가 가장 붐비는 핵심 상권에서 30만 원주시민을 상대했던 나 아닌가?   


시골 바닥에 앞챙 모자 눌러 쓰고 검정 잠바때기 걸치고 꺼주하니까 할배가 날 우습게 본겨? 약 한가지 못 팔아 봤다고 무시하는겨? 방어 본능에 뿌리 깊은 반항 기질까지 발동한다. 바지 주머니에는 친구들과 술 먹으려고 만원 권으로 다섯 장 현금 50,000원과 신용카드가 있다. 걸기적거리는 잔돈은 빼놓고 와서 없다.    

좋아, 어디 한번 붙어보자. 배가 살살 아프기는 하지만 이 정도야 뭐.


두둥    


시골 약방 검버섯 할배 vs. 도심서 날아 다닌 50대 후반 장년의 대결   


이건 돈 몇 푼 문제가 아니다. 자존심 문제다.

이건 피 터지는 백병전이 아니다. 피 말리는 심리전이다.

이건 나이 차이가 문제 아니다. 세대 간 주도권 다툼이다.  


건곤일척. 싸움을 건다.     


"만 원밖에 없어요. 택시 타고 가야 하니까 딱 삼천 원 남아요."  





2부 예고




5천 원이냐, 3천 원이냐

뺏냐, 빼앗기냐

피 말리는 심리전 


이 뿐인가    


생활에 지혜를

거래에 원리를

노년에 행복을





- 전투 -    





약국서 비싸야 1,500원이다. 허나 여기는 귀래면. 약 살 데가 여기밖에 없다. 시골이고 나이든 할배니 감안해서 최대 두 배까지 인정. 그래서 3,000원이다.


이런 때는 최종적, 확정적, 불가역적으로 할래 말래 최후통첩 하는 게 고수다. 슬그머니 오른 손을 바지 호주머니에 넣는다. 만원 권 다섯 장을 뭉쳐 접은 데서 만 원 한 장을 떼어내 손가락으로 분리한다. 혹시라도 다섯 장이 한꺼번에 달려 나오지 않도록. 황산벌의 계백 장군처럼 배수진을 치고 결사 항전의 의지를 다진다.


"안되는데. 더 없나?"

"만 원 한 장밖에 없어요. 칠천 원은 택시비 내야 하구요."

"에이, 그럼 차라리 안 받겠네. 약 지어 줄테니 그냥 먹게."    


오옷, 변방에 이런 고수가 있다니. 초강수를 일초도 망설임 없이 바로 절초 신공으로 맞받아치다니. 돈이 아니고 마음을 건드리다니. 내 인상이 후덕하니 마음을 흔들어 보는군.    



[실전 비지니스]    


무릇 비지니스의 하수는 자기 원가를 말한다. 상수는 상대의 이익을 강조한다. 고수는 마음을 산다.

무릇 거래에서 안 팔겠다고 잘라 말하거나 차라리 거저 가져가라고 말하면 정말로 이윤이 없는 거다. 이때는 조금 더 주어도 좋다.   



진짜 5,000원짜리여? 약국서 보통 1,000원, 끽해야 1,500원 하니 그럴 리는 없다.

아님 정말 공짜로 준다고? 이건 아니다. 공짜인 건 좋으나 처절한 패배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아님 정말 비법? 할배가 자존심 상해서?

정신 바짝 차리자. 보통 할배가 아니다. 나 정도 고수가 이리 헷갈리니 절정 고수가 틀림없다.


허나 어쩌랴? 삐거덕 알미늄 문짝, 어둑한 조명, 연탄난로를 보면 연탄 한 장 값이 아쉬울 터. 흔들려서도 밀려서도 안된다.    


"아, 그래두 삼천 원은 받으셔야죠."    


할배는 이 말을 듣고 잠시 머뭇하더니 아무 말 없이 오른쪽으로 돌아서 한 걸음 뗀다. 바로 약 진열대. 가로도 세로도 여러 줄 여러 칸인 데서 약을 주섬주섬 챙긴다.

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핫핫 성공이군. 삼천 원. 거 봐. 삼천 원 맞잖아. 


시간이 걸린다. 할배가 병에 든 물약 한 병과 반투명 종이 봉지 두 개를 내와서 내 앞에 다시 마주선다. 병은 내려 놓고, 봉지 위쪽을 문방구 가위로 하나씩 조심스럽게 반듯하게 자르고는 내게 내민다.  


"여기서 바로 먹게."    


뭐 이렇게 오래 걸려? 정말 비법? 너무 궁금하다. 물약은 약국 가면 흔히 주는 거. 별 거 없다. 봉지 하나를 내려다보니 가루다. 이것도 특별한 게 아닌 거 같다. 두 번째 봉지 안을 보려는데 할배가 손등으로 슬쩍 가린다.


"그냥 바로 먹게."   


진짜 비법이라서 숨기려고? 아님 켕겨서?

뭔가 이상하다. 먹는 척하면서 봉지 안을 슬쩍 보니 알약들이다. 얼핏 보기에도 수가 많다. 다 흰색. 사각에 모서리가 라운드고 양 배가 통통하게 큰 거 두 개, 가운데 골이 얕게 패이고 작은 거 두어 개, 조금 길쭘한 거 두어 개. 전부 예닐곱에 너댓 종류는 되는 거 같다.  


무슨 알약이 이리 많아? 양으로 조지는 겨? 이것저것 다 멕이면 낫는다?

비법은 아닌 거 같다.


근데 봉지 두 개 다 밀봉되어 있었고 가위로 개봉했으니 미리 만들어 놓았잖아. 그럼 비법 맞나? 잔머리를 부지런히 굴리는데,    


"어서 먹게. 이거 먹으면 십 분이면 나을 걸세."

"삼겹살 먹은 거도 있고 뭐 그렇게 빨리 나을까요?"

"급체, 소화 불량, 토사곽란은 삼 일 지나 배가 고프면 완전히 낫는 거네. 이 약은 먹고 십 분이면 진정될 걸세. 약 먹고 아무것도 먹지 말게."  


배가 고프면 완전히 낫는다. 듣고 보니 과연 그렇다. 이 냥반은 말만 하면 참 알아 듣기 쉽게 설명한다. 한의학에 정통한 게 맞다. 신뢰가 간다.

신뢰? 앗, 또 흔들린다. 안돼! 이미 3,000원으로 낙찰봤잖아. 다른 말 못 하게 얼른 먹어 버리자. 그럼 빼도 박도 못한다.

서둘러 두 봉지 약을 입에 털어 넣고 약물 병을 따서 물약 반을 입에 물고 얼른 다 같이 삼킨다.   


“꿀꺽.”    


알약이 너무 많고 급하게 삼키니 물약은 넘어가되 알약의 반 가량이 목에 걸린다.

나머지 물약 반을 다시 입에 넣고 꿀꺽.


그리고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서 아까 분리해 둔 만 원 한 장을 찾는다. 만에 하나 지폐가 더 달려 나오면 도로아미타불 작전 실패에 개망신이니 신중하다. 주머니 속에서 양 눈 삼아 엄지와 검지로 비벼보니 만 원 한 장이 틀림없다. 꺼내서 당당하게 카운터에 놓는다.     


할배가 5,000원 한 장을 거슬러 준다.    

어랏, 3,000원으로 얘기 다 됐는데? 약도 이미 삼켜 버렸는데? 할배가 아직도 5,000원에 미련? 만 원을 손아귀에 넣었으니 자기 맘대로?

전쟁이란 승기를 잡았을 때 밀어붙여야 하고, 남자가 칼을 뽑았으면 단칼에 베어야 하는 법. 


"삼천 원 드린다고 했잖아요. 칠천 원 주셔야 택시 타고 가요. 아니면 집에 못 가요."


이미 끝난 거래임을 상기시키고, 덧붙여서 어기면 집에 못 간다고 대못을 콱 박는다. 할배는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머뭇머뭇 2,000원을 더 내준다.    


이겼다! 만세!


희대의 오 분 귀래대첩은 이렇게 나의 승리로 끝났다.

우히히히  


자만은 금물. 흥분을 가라앉힌다. 그래도 이런 촌에서 이런 고수를 만나다니. 더구나 20여 년  연장자 아니신가? 공손히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린다.    

뒤돌아 나오려는데 문 바로 옆에 원통형 용기에 담긴 지팡이 여남은 개가 눈에 뜨인다. 하나 빼서 바닥에 대고 짚어 보니 허리춤 길이에 가볍다. 손잡이가 디귿 자로 굽은 채 굵고 아래로 내려가면서 점차 가늘어진다. 벌레 먹은 홈과 결이 있는 게 자연목 같다. 바닥을 짚는 끝은 흰색 금속으로 굽이 달려 있어 포인트가 살고 닳음 방지로도 좋다. 언뜻 조악해 보이지만, 실용적이라 외려 마음에 든다. 음, 산에 갈 때 다들 공장서 대량 생산한 스틱인데 이건 폼 좀 나겠군. 산책할 때 못된 개가 달려들면 쫒기도 좋고.


"이거 얼마예요. 지금 돈은 없지만 나중에라도 사게요."

"그거 말고 이쪽을 보게."   



[실전 비지니스]    


무릇 거래에서 가격을 묻는데 대답도 않고 다른 걸 권한다면 수준에 안 맞는다는 거다. 높이 보거나 낮추어 보거나. 이 때는 조용히 따르는 게 좋다.



군말 없이 할배가 가리키는 곳을 고개 들어 본다. 천장 아래에 우측 벽 쪽으로 줄을 매고 거기에 처마 밑에 고드름처럼 지팡이 수십 개가 일렬로 걸려 있다. 그곳만 보면 마치 지팡이 전문점 같은데 일부러 찾지 않으면 보기가 어렵다. 온통 붉은 칠이고 천장 불빛을 가까이 받아서 그런지 광이 난다. 얼핏 고급스럽고 정열되어 있으니 멋져 보인다.   


앗, 비싼 거다. 겁이 더럭 난다.    


"아니요. 이거면 돼요. 얼마죠?"

"오만 원"    


띠우우웅, 50,000원이라고라? 이 냥반은 불렀다 하면 5,000원 아니면 50,000원이네. 가격을 5자로 매기나? 비슷한 지팡이를 전에 천냥하우스에서 본 거 같은데. 할배네 거도 끽해야 만 원 대 같은데 50,000원?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

입 꾹 다물고 약방을 나선다.  


다시 술자리 합류.    


두어 시간 동안 저녁 식사 겸 술을 찾는 손님이 너댓 팀. 테이블마다 주문에, 추가 주문에, 불판 갈아주랴 주인 모녀가 분주하다. 손님들은 술기운을 받아 왁자지껄. 그리곤 한 팀, 두 팀 자리를 털고 일어나고 더 이상 손님이 없다. 시골에 이 정도라도 붐비니 그나마 다행이다.  


우리 셋은 첫 주문한 삼겹살 삼 인분을 끝내 남긴다. 보기만 많은 게 아니라 실제 그랬다. 삼 인분 시켰는데 밑반찬, 아니 밑안주 일 인분은 서비스이고 삼겹살은 육 인분 분량. 된장찌개에 공기밥은 당연히 포기했고. 소주 네 병까지 합쳐서 전부 다 42,000원. 계산서를 살펴보니 삼겹살 이 인분 같은 일 인분에 일만 냥, 소주 한 병 삼천 냥이다.


조용히 계산을 끝내고 흥업서 출발한다는 택시를 부르고 나니 시간이 십여 분 남는다. 믹스 커피 한 잔 마시며 배웅을 대기 중인 주인 아줌마에게 말을 건넨다.


"밑반찬과 삼겹살 양이 푸짐하네요. 시골 인심이 아직 살아있네요" 

"여기서 우리 집만 그래요."    


대개 이런 말은 감사, 격려와 함께 양 줄이면 안 된다는 경고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주인들은 보통 반색하며 자주만 와 달라고 응답한다. 경고에 대해서 자주 안 오면, 장사 안되면 양을 줄일 수도 있다고 예고하는 거다. 허나 난 경고는 빼고 감사와 나도 음식점 하는 입장에서 이윤 좀 챙기면 좋겠다는 바람만 담아 선의로 한 말이다.  


택시 도착    


셋 중 하나인 친구 집으로 술자리를 옮길 시간이다. 기사는 75세 노인이다. 귀래 토박이고, 귀래에 택시가 이거 딱 한 대란다. 약방 할배에 대해 잠깐 여쭈니, 시골은 동네 숟가락 수 까지 꿴다더니 역시 줄줄. 약방 하신지 60년, 홍천서 오래 하셨고 귀래 온지 15년이란다. 연세야 검버섯이 말해주고 너무 캐물으면 프라이버시에 실례이고 이동 시간도 짧아 이 정도로 끝낸다.    


귀래 전원 주택    


승리의 기쁨을 더해서 본격적으로 셋이서 신선 놀음을 즐긴다. 할배가 시킨대로 나는 술, 안주는 일절 안 먹고 미네랄이 풍부해 건강에 좋은 자연의 지하수만 홀짝홀짝 마신다. 본래 술이 얼콰해야 제대로 신선이 되는 법이나 오늘은 술을 더 안 마셔도 흥겹다. 기분이 되살아나니 할배 약 덕인가 속이 많이 진정된 거다.   

친구 사이에 신선 놀음이래야 별 거 없다.  


술이면 뭐든 좋다. 소주, 막걸리, 동동주, 맥주, 와인. . .

다만 권하되 알아서 마신다.  


뭐든 말하고 싶은 대로 한다.

다만 자랑질하지 않는다. 배려한다.   


뭐든 하고 싶은대로 한다.

노래, 춤, 눕고 싶으면 눕고, 방귀 참지 않고 뿌웅 뀌고.


다만 싫어하면 멈춘다.   

쉽다. 눈치 안 보고 마음 편히 술 마시고 떠들고 놀면 그게 신선 놀음.


싸다. 인당 이삼만 원이면 충분하다.

다만 여자가 끼면 영 딴판이 된다.  


몇 시간 실컷 즐기고 기분 좋게 잠자리에 든다.

할배 약이 확실하게 잘 듣는다.





3부 예고




반전 또 반전

예측 불허

흥미진진  


이 뿐인가?


생활에 지혜를

거래에 원리를

노년에 행복을                               





- 오폭 -   





다음날


아침 일찍 혼자 차 몰고 집으로 출발한다. 전원 주택에서 원주까지 삼십여 분 거리. 시간이 넉넉하니 작정하고 어제 일을 되짚어 보기로 한다. 속이 편해지니 차창 밖에서 달리는 풍경처럼 몸과 마음이 다 가뿟하다.   


약값 오천 원, 지팡이 오만 원은 정당한가? 결론부터 내자면 정당하다.


첫째, 파는 자 마음이다.   


싫으면 안 사면 되고, 미우면 안 가면 그만이다. 사는 자 마음에 안 든다고 갑질하는 사람들 드물지만 있다. 파는 자에게 욕설하고, 상품 집어던지고, 가게 안팎을 드나들며 소리쳐서 손님 내쫒고, 심지어 인터넷에 올려 가게 문 닫게 한다고 겁을 준다.


이 정도면 범죄 행위다. 형법상 모욕죄, 재물손괴죄, 폭행죄, 영업방해죄, 협박죄에다 실제 인터넷에 올리면 명예훼손죄다. 그것 때문에 가게 문 닫게 생겼으면 형사 처벌은 물론 민사로 손해 배상까지 해야 한다. 이런 고객은 왕 아니다. 왕도 법을 지켜야 한다.  


둘째, 그렇다 해도 심하지 않나? 약값은 두 배, 지팡이는 다섯 배라니? 그럴 수 있다.   


면에 약방이 하나뿐이라 독점이다. 시골이라 주민 수가 적고 접근성마저 떨어져서 박리다매는 애초에 글렀다. 그러니 비싸게 파는 게 맞다.    



[실전 비지니스]   


무릇 최고의 장사꾼은 비싸게 많이 판다. 그 다음 싸게 많이 판다. 그 다음 적당한 가격에 적당히 팔거나, 비싸게 적게 판다.

문제는 싼데도 적게 파는 거다. 대변신해야 할 때다. 업을 접을 때가 임박했기 때문이다.

돈을 벌려면 비싸게 많이 팔거나, 싸게 많이 팔아야 한다.

적당한 가격에 적당히 팔면 먹고는 사나 결국 경쟁에 치인다.

대개 차별화가 가른다. 그러니 팔려고 하기 전에 무엇이 다른가를 살펴야 한다.

경쟁이 심할수록 차별화가 더욱 필요하다.   


무릇 최고의 차별화는 새로움이고 출발은 창의이다. 

최선의 차별화는 남다름이고 출발은 역발상이다.

차선의 차별화는 색다름이고 출발은 발상의 전환이다.

대개 새로움의 뿌리는 엉뚱한 상상이고, 남다름이나 색다름이나 뿌리는 PMA다.

Positive Mental Attitude 적극적 사고

시장 지배적 관점에서 최고의 차별화는 독점이다.



허나 어쩌랴?


약방에 알미늄 샤시문은 삐거덕 거리고, 조명은 어둡고, 난방은 연탄난로인 것을 보건대 손님이 적어도 너무 적다. 이 정도니 직원은 당연히 둘 수 없다. 게다가 병원 하나 없으니 처방전 받을 일 없고, 최근에는 편의점까지 비상 상비약을 팔아 집객을 방해하니 사정이 오죽 딱하겠나? 얼마나 운영이 어려우면 지팡이를 팔고 있겠나? 본인 인건비는커녕 용돈이나 건질 요량으로 근근히 유지하고 있는 거다.


딱하게 볼 일만은 아니다.     


팔순에 소일거리가 있어 움직이는 건 건강에 좋다. 용돈까지 버는 건 대단한 일이다. 게다가 아픈 사람 병을 낫게 하니 보람까지 있다. 약방에 생뚱맞게 지팡이를 갖다 놓은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거다. 수많은 상품 중에서 왜 유독 노인용 지팡이 하나만 콕 찍었을까? 노인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으신 게다. 게다가 지팡이는 할아버지가 없더라도 오래동안 두고두고 유용하다.


노인 사정은 노인이 알고, 죽음을 예감하는 노인에게는 기억되고 싶은 소망이 있다. 전국 어디나 당대에만 약방을 운영할 수 있기에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면 여기 약방 또한 흔적도 없이 사라질 터. 그 전에 이리 경륜이 훌륭한 분이 자리를 지키는 건 병원은 커녕 약국 하나 없는 시골에서 주민에게 행이요 복이다.   


가매기 삼거리 집 도착    


허락 받은 외박이나 아내에게 자초지종을 고한다. 먼저 귀복식당이 양이 참 많다고 자랑한다.


"그 식당 먹을 만해요?"    


맛있다 하니 아내는 다음에 가족이 모이면 다 함께 꼭 가잔다. 요즘 그렇게 맛있고 양까지 많은 집 없단다.

맞다. 나는 왜 가족 생각을 못했지? 역시 마누님은 현모양처고 나는 철이 없다.     


약방에서 있었던 일을 상세히 말해 주고 난 후 묻는다.   


"체하는 데 먹는 약이 오천 원이면 비싼 거 아냐?"    


아내는 알약 수가 많으니 오천 원이 맞다고 한다.

듣고 보니 그렇다. 역시 마누님은 현명하시다. 나보다 낫다.  


아참, 처방전이 없으니 건강보험도 안 되지 않나?

그렇다면 건강보험공단에서 받는 돈이 없으니 오천 원도 싼 거다.


배가 고파 아내에게 해장 라면 끓여 달래서 먹으니 맛나다.

할아버지가 삼 일 지나 배 고프면 완전히 낫는 거라 했는데 약 먹고 바로 다음날 배가 고프니 벌써 다 나은 거다. 비법이 맞다.    


이러고 보니 내가 잘못한 게다. 내 멋대로 가격에만 집착해서 약값을 넘겨짚고 후려친 거다.

이러하니 지팡이 또한 지레짐작한 게 틀림없다. 자연목 무늬 살리려 칠을 안 한 게 상품이고 잔뜩 떡칠해서 번질번질한 게 하품인 게다. 상등품이니 문 앞에 두고 하품이라 눈에 잘 안 뜨이는 천정 구석에 걸어 둔 거다. 내가 만 원밖에 없다며 택시비니 뭐니 연신 죽는 소리를 하니까 할아버지는 내 형편에 맞추어 지팡이를 저렴한 걸로 권해 주신 거다.    


약이든 지팡이든 할아버지는 병을 살펴 주시고 주머니 사정을 배려하신 건데, 나는 자만으로 가득차서 대결이랍시고 괜한 시비를 걸며 깝죽댄 거다. 삼장법사 손바닥에서 재롱 떤 손오공이다. 나는 얼굴에 검버섯이 피어야 그때나 철이 들래나 보다.   





- 인연 -   





방어 덕이다.    


한 달 전.  


친구 딸 결혼식에 갔었다. 서울시청 앞 더프라자 호텔. 어이구야. 사방에 화환이 얼마나 많은지 사선으로 겹쳐 놓아 백 개는 훌쩍 넘어 보였다. 화환이 이 정도니 예식과 피로연이 이어서 열린 축구장 반만 한 대연회장은 하객으로 미어터졌다. 십여 명이 둘러앉는 원형 테이블 수십 개가 빈 좌석 없이 꽉 들어찼다.


호텔 측은 미처 자리를 잡지 못한 일부 사람들을 별도의 부페 레스토랑으로 안내했다. 연회장의 비좁은 테이블에 스테이크 달랑 한 접시보다 훨씬 낫다. 게다가 흔한 부페에서 볼 수 없는 방어회, 참치회가 비싸고 맛난 거라 회로 몇 접시 거의 배를 채웠다. 이 행운을 계기로 나와 친구 둘은 펄쩍펄쩍 뛰는 방어를 즉석에서 회 뜬 걸 먹기로 진즉에 날자를 잡고 장소는 원주로 정했다.


이틀 전.     


어둠이 드리울 시간. 원주어시장. 일 년 전쯤 개장했단다. 시장이라고 이름을 붙일 만하게 독채로 높고 넓게 현대식으로 지었다. 새 건물에 입주한 이십여 개 횟집들은 구획을 나누어 줄과 열이 잘 맞고 한결같이 깔끔하다.


어류, 패류에 러시아산 대게까지 어지간한 횟감은 다 갖추었다. 수족관에서 유유히 빙빙 도는 대방어 몇 마리가 눈에 들어온다. 애인이라도 만난 듯 반가워 멈춰 선다. 그 우아한 자태에 슬며시 빨려든다.    


"방어 해체 전문입니다. 대방어 맛이나 한번 보세요."    


주인에게 눈길을 주자 주인은 내 소매를 잡아끈다. 안쪽으로 들어서니 여기를 보란다. 도마 아래 뻥 뚫린 수납 공간에 대방어 대가리가 세 개나 된다. 눈 여섯이 나를 빤히 쳐다본다. 회 뜨면서 잘라낸 걸 맛 보자는 건가? 냉장이 아닌 상온인데? 상했을까 걱정된다.


주인이 제일 큰 거를 꺼내어 으스대며 보여준다. 엄청 커서 웬만한 개머리다. 가까이 보니 눈이 밤톨만한 게 동그랗고 선명해서 바닷물에 넣으면 대가리만으로도 헤엄칠 것처럼 싱싱하다.  


“세 마리 다 오늘 잡은 겁니다.”    


주인이 자랑하는데 정작 좌석에는 술 손님이 보이지 않는다. 벌써 다 먹고 자리를 뜬 건가? 오늘 잡은 게 맞나 의심이 든다. 주인은 목 부위를 회 뜨며 자랑을 이어간다.   


"이 부위가 가마살입니다. 가마살은 아무나 못먹어요. 아는 사람만 먹어요."    


한 접시 만들어 횟집 주인, 맞은편 횟집 주인과 그 부인 그리고 나, 넷이 회를 앞에 두고 둘러앉는다. 그래, 주인과 함께 여럿이 먹으면 별일 없을 거야. 한 점을 두 손가락으로 집어서 초장 약간에 와사비 듬뿍 찍어 입에 넣는다. 쫀득쫀득. 난생 처음 식감, 별미 중 별미다. 식감이 너무 훌륭해 먹다 보니 다섯 점이나 꿀떡꿀떡. 주인도 연실 주워 먹으며 자화자찬.     


“방어회는 큰 놈일수록 맛있어요.”  


이 정도 서비스와 친절에 안 넘어갈 사람 있으랴. 내일 셋이 들른다고 주인과 약속했다.  


아뿔싸.    


불길한 예감은 적중하기 마련인가 역시나 이게 살짝 상한 듯. 다음날 새벽 두 시경부터 두 번 토하고 배가 아파서 잠을 못 이루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 본다. 주인이 상한 걸 알고서 같이 먹지는 않았을 거다. 설사 대가리가 상했다고 해도 몇 조각 시식했을 뿐이다. 살짝 맛이 갔을 뿐이어서 증상이 심하지도 치명적이지도 않다. 죽은 눈알마저 그리 선명했으니 그 전에 회 뜬 몸통은 아주 싱싱한 정상이었을 터. 무엇보다도 선의였고 서비스였다. 그러니 주인을 탓하기 어렵다. 살다 보면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오후에 횟집 주인에게 전화해서 간밤의 고약한 사정을 말하니 주인은 괜찮단다. 하지만 나는 배가 살살 아프니 날 것인 회를 피해야 할 상황. 친구 둘에게 원주의 새로운 명소를 소개하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고 어쩔 수 없이 주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예약을 취소했다.


그래서 한 달 기다린 대망의 대방어회를 다급하게 회 아닌 메뉴로 변경, 따라서 장소 급 변경, 또 변경. 결국 귀래 귀복식당서 삼겹살 먹다가 급체해 약방까지 가게 된 거다.    


그러고 보니 할아버지와 예사 인연이 아니다. 한 달 전 친구 딸 서울 결혼식이 귀래 시골 약방 할아버지로 이어지다니. 다음에 면에 갈 일 있으면 2,000원 꼭 더 드려야겠다. 여섯 번째이자 마지막 도전. 아내와 함께 직접 개발해 고향 마을 가매기 삼거리에서 시작한 치킨집이 자리잡으면 오만 원 지팡이도 하나 사드려야겠다. 그리고 할아버지 모시고 귀복식당 가서 삼겹살 푸짐하게 대접하고, 머지않아 기억으로만 남을 약방과 그에 얽힌 인생 이야기를 듣고 싶다.     


근데 사과는 어떻게 하지? 방어가 맺어준 인연? 방어 덕에 돌고 돌아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다고? 이리 얽히고 저리 설킨 인연의 미로를 어떻게 설명드리나?  


아, 맞다. 이 글을 드리면 되겠다. 여기에 다 쓰여 있으니까. 그럼 할아버지는 글 속에서 나와 함께 백년, 운 좋으면 천년 사시는 거야. 사람들을 즐겁게 하면서.   


할아버지,


호의를 개구지게 대해서 죄송해요.


그리고 병 고쳐 주셔서 고맙습니다.


부디 약방 오래 하시어요.


건강하게 오래 오래 사시게요.




이 글을 귀래면 약방 할아버지께 바칩니다.     




2018. 0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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