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티는 사람들
그녀는 대학병원의
고객상담실장이었다.
의료분쟁의 전화는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환자와 보호자,
언론과 법률 자문이
한 줄에 엉겼다.
진료지연,
오진 의심,
안전사고가
한 줄로 들어왔다.
보상과 법률 검토가 달린 전화는
밤을 오래 잡았다.
그녀는 수화기 너머의 울분을
하루에 스무 번쯤 받았다.
"변호사를 써야 할까요?"
"소송하면 이길 수 있나요?"
보호자들은 물었다.
환자를 잃었거나,
잃을까 두려운 사람들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녀는 끝까지
병원 사람일 수밖에 없었다.
규정과 매뉴얼 안에서만
대답해야 했다.
그 선을 넘지 못한 채,
수화기를 내려놓고 나면
남은 말들이
가슴에 남았다.
제대로 설명도 못 듣고
서류에 도장을 찍은 보호자들,
합의금을 받고 돌아가면서도
눈물을 멈추지 못하던 사람들.
그 얼굴들이
퇴근길까지 따라왔다.
그녀는
집으로 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이 사람들 편에 서서
처음부터 끝까지
설명해 줄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는 시간도,
권한도 없었다.
그녀에게 허락된 것은
병원 매뉴얼 몇 줄뿐이었다.
연봉은 높았지만,
시간은 얇았다.
그녀는
하연의 엄마였다.
이혼 뒤에도
그 사실은 바뀌지 않았다.
자발적 독립을 택했고,
커리어는 올랐지만,
하연에 대한 사랑은
줄지 않았다.
줄어든 것은
곁의 시간뿐이었다.
퇴근길마다
하연의 사진을 넘겨 보며
하루를 닫았다.
그 시간,
하연은 기다림을 배웠다.
기다림이 오래가면,
상처가 된다.
***
10월의 어느 월요일 밤.
오랜만에 아빠와의 약속으로
들떠있는 하연을 차에 태우고
여의도 레스토랑으로 가기 위해
올림픽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오늘만큼은,
하연이가 아빠와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하연을 약속장소에 데려다 주고,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야 했다.
오늘 밤, 이수역 근처에서
야간 상담이 한 건 잡혀 있었다.
상담을 마치면,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야 했다.
하연이 물었다.
"엄마, 오늘은
아빠 오는 거 맞지?"
"응. 오늘은
아빠가 먼저 도착해 있대."
"엄마는 같이 저녁 안먹어?"
"오늘은 하연이랑 아빠랑
좋은 시간 보내,
엄마는 오늘 병원에서
급한 상담이 있어서…"
"엄마 저녁은 어떻해?"
"엄마는 걱정마..."
창밖으로 여의도 불빛이
비에 젖어 번졌다.
와이퍼가
한 번 더 지나갔다.
비가 조금씩
굵어지고 있었다.
***
저녁 6시 47분.
여의도 진입로 사거리.
비보호 좌회전 표지판이
어둠에 젖어 있었다.
그 순간에도,
민원전화가 울렸다.
'명백한 의료사고인데
병원이 책임을 져야
할 것 아닙니까?'
그녀가 말했다.
"죄송합니다.
지금 이동 중입니다.
도착하면 먼저
보호자분 부터 뵙겠습니다."
"상황 설명 드리고,
책임은 피하지 않겠습니다."
한 손으로 핸들을,
한 손으로 전화를 쥐고 말했다.
네 모서리의 흐름이 어긋났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곧 병원으로 가겠습니다."
그녀는 좌회전을 붙였다.
좌측에서…
빨간불을 찢고 달린 직진 차.
그 차의 헤드라이트가
하연 엄마쪽으로 박혀 들어왔다.
충돌 직전,
온 몸을,
하연이 쪽으로 틀었다.
조수석에 충격을 막으려는
마지막 몸의 기억이었다.
금속이 접히는 소리가 터졌고,
유리가 비처럼 흩어졌다.
운전석의 하얀 에어백은
얼굴을 왼쪽으로 빗겨나갔다.
충격은 왼편으로 모였다.
빛과 파편은
하연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팔은 끝까지
조수석을 밀어냈다.
하연의 안경이
앞유리창에 부딪혀서
깨져나갔다.
'엄마는 걱정마...'
마지막 말이
하연의 무의식에 남았다.
대시보드 경고등이
깜빡였다.
냄새는 금속과 분진이었다.
사이렌이 가까워졌다.
비에 젖은 도로 위에,
찌그러진 차체가
숨을 잃은 짐승처럼
누워 있었다.
마지막으로 기억한 것은,
조수석을 밀어내던
오른팔의 감각뿐이었다.
***
같은 날,
저녁 7시 38분.
김서준의 휴대폰이 떨렸다.
낯선 번호였다.
"하연이 보호자 분
맞으시죠?"
"네… 무슨 일이죠?"
"여의도 사거리에서
사고가 났습니다.
차량 충돌사고입니다."
"탑승자 두 명 모두
중상입니다.
현재 의식 없고,
자발호흡 미약,
응급수술 준비 중입니다."
손에서 휴대폰이 미끄러졌다.
다시 집어 들었을 때,
손이 떨렸다.
코트를 걸쳤지만,
신발 끈은 묶지 못했다.
엘리베이터가 내려오는 동안
숨이 앞질렀다.
계단으로 뛰어 내려갔다.
13층에서 1층까지.
병원에 어떻게 닿았는지,
기억은 비어 있었다.
***
병원 입구,
자동문이 열렸다.
흰 빛이
복도 끝까지 흘렀다.
고무 바닥 냄새와
형광등 아래
분주히 스치는 가운 자락,
그리고 서둘러 차트를 넘기는 손길들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중증외상환자 들어옵니다!"
의료진이
침상을 밀고 지나갔다.
한 걸음씩 옮겼다.
기계는 불규칙하게 울렸고,
마음은 그 소리를
따라갈 수 없었다.
응급실 어디에도
하연과 하연 엄마를
찾을 수가 없었다.
응급수술실로
의사 여러 명이
심각한 표정으로 들어갔다.
'시간이 몇 시간이나 흘렀을까…'
복도 끝 자동문이 열렸다.
수술 가운 위에
낙서처럼 피가 튄
응급의와 간호사가
걸음을 줄였다.
간호사가 외쳤다.
"김하연 보호자분!"
"네!"
김서준은 간호사에게
다가갔다.
간호사 옆 응급의가
마스크를 턱까지 내렸다.
눈이 붉었다.
"김하연 보호자분 이세요?"
"네, 제가 하연이 아빠입니다."
응급의 손에 소독약 냄새가
남아 있었다.
"먼저, 하연 양은
교통사고로 경막하출혈이 있었고,
우측 측두엽이 붓고,
뇌압이 급격히 올랐습니다."
"방금 전 응급 천공술로
압력을 일부 뺐습니다."
"현재 혈압과 산소포화도는
안정적입니다.
중환자실로 이동한 뒤
추가 검사를 진행하겠습니다."
의사가 차트를 넘겼다.
"곧바로 정밀 CT를 찍고,
결과에 따라 감압 개두술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수술 위험은
출혈, 감염, 발작, 편마비,
언어장애 가능성 등이 있고,
수술을 해도
후유증이 남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현재로선
뇌 압박을 줄이는 게
생명을 지키는 최우선입니다."
입술이 말랐다.
"하연이는…
깨어날 수 있습니까?"
의사가 숨을 고르고 답했다.
"예후는 수술 경과를
봐야 합니다.
다행히 초치가 빨랐고,
회복 가능성은 있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의사가 자세를 더 낮췄다.
"…어머님에 대해서는,"
흘러내린 안경을 올리며
다시 말을 이었다.
"사고 당시 이미 의식이 없으셨고,
복부와 흉부에 심한 손상이 있어
병원 응급수술 원칙에 따라
즉시 수술을 진행했습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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