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 시간은 없지만, 놀 수는 있다

3장 다섯. 지금은 '놀이 기억'을 소환할 때

by 스쿠피


“엄마, 저거 봐봐. 계속 보고 있어야 해. 좀 있으면 나온다, 나왔다! 꺅!! 크크크, 정말 웃기지?”


분명히 아이와 함께였다. 그것도 최신 애니메이션이었다. 그런데, 나는 아이처럼 웃지 못했다. 애니메이션을 틀어놓고 내심 해 두고 싶었던 일의 구상을 마칠 생각이었으므로. 아이들은 재밌게 보고 있었지만, 나는 건성으로 대꾸하며 무릎 위에 놓인 노트북에서 쉽게 손을 놓지 못했다. 매번 매 순간, 아이들과 함께한다는 건 역시 불가능한 일이라 여기며.


육아서에 따르면, 아이가 “근데 말이야, 엄마…”하고 뭔가를 말하려고 할 때마다 따뜻한 시선으로 호응해 주라고들 한다. 쉽지 않다. 나는 얼마나 많은 날을 “말해. 엄마 다 듣고 있어.” 하며 빨래 개고, 설거지하며, 청소기를 돌렸던가. 왜 내 마음은 항상 시간에 쫓기어 아이들과 놀 시간이 없다고 부르짖기만 했는가. 어쩌다 참기름 짜듯 시간을 마련했음에도 왜 쉬이 차분하고 고요해지지 못했던 것인가. 무엇이 문제였던가.


놀 시간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놀아줄 시간 있다. 다만, 수많은 육아서에서 ‘밀도 있게, 있는 그대로 아이와 함께하는 진짜 놀이’를 강조하는 데 비해 우리는 아는 것이 없었다. 창의적으로 놀아보지 못했고, 협업하면서 놀아야 할 만큼 절박한 적도 없었다. 그저 타인과 비교하여 평범하고 무난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그 길을 택했다. 그것이 가장 익숙하고 편리한 방법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진짜 놀이가 뭘까. 그리고 왜 제대로 놀 줄 알아야만 할까. 그렇게 놀면 도대체 뭐가 좋길래? 이세돌이 인공 지능에 이겼던 바둑 한판은 소중한 역사로 남았다. 왜냐하면, 앞으로 두 번 다시 생기지 않을 일이기 때문이다. 『놀이의 힘』(EBS 놀이의힘 제작진 저)에 의하면, 인공 지능의 위협적인 성능 앞에서 인간 고유의 능력으로 대결할 수 있는 영역은 몇 개 되지도 않는다. 바로 4C인 창의력(Creativity), 비판적 사고(Critical thinking), 문제해결 능력(Communication), 협업 능력(Collaboration)이다. 게다가 전문가들은 이러한 영역은 죽어도 교육 기관에서 교사가 가르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어떤 책이니, 어떤 체험이니, 어떤 커리큘럼이니 다 필요 없다는 얘기다. 오히려 철저하게 스스로 ‘체득’하는 것이어야 한단다. 놀이다. 제발 아이들 편하게 놀게 해 주라는 얘기다. 스마트폰이나 게임 말고 삼삼오오 모여 놀던 놀이. 갑자기 땅따먹기, 공기놀이, 고무줄뛰기, 모래놀이가 생각난다. (실제로 이런 원초적인 놀이가 창의력의 원천이라고 한다) 듣고 보니, 세상 사람들이 다 손가락질해도 자기가 좋아서 우직하게 놀았던 사람들이 떠오른다. 평범함을 추구했던 내 인생에도 추억 속의 놀이가 있다는 건 다행이다. 요즘 아이들이 저런 원초적인 놀이에 제대로 빠진다는 건 엄청난 용기겠구나.


놀이터만 나가봐도 누가 있어야 말이지, 싶을 것이다. 실제로 지인은 아이가 놀이터를 좋아해서 일부러 학원을 알아보지 않고 줄곧 잘 지냈는데, 초등학교 입학할 즈음부터는 놀이터에 나오는 또래 아이가 한 명도 보이지 않아 어쩔 수 없이 학원을 보냈다고도 했다. 아무도 놀이터에 나와 놀지 않으니 학원 가서 ‘문제 해결 능력’이나 ‘협업 능력’을 길러야 하는 실정, 이게 한국식 ‘놀이’다.


시스템 탓을 하기에는 아이들의 성장 속도가 너무 빠르다. 가정에서 아이와 가장 가까운 가족인 부모로서 아이와 제대로 놀 수는 없을까. 누누이 말하지만, 놀 수는 있다. 그러나, 한번 실천해 보시라. 그리고 되새겨보시라. 그림 그리면서 지적하고, 블록 쌓으면서 훈수 두고, 보드게임하면서 깨알같이 규칙대로 한판 해내느라 내가 더 지친 적은 없는지. 아이와 놀아준다는 명목하에 내 불편한 감정을 섞지 말자. 억지로 놀아 주다가 꼭 과부하를 겪는다. 아이가 싫다는데 자신이 하고 싶은 놀이(놀이인지 학습인지 모를)를 고집하는 부모도 많다. 아무리 부모라도 정도가 심하면 그 또한 모종의 가스라이팅 아니겠는가. 부모인 나도, 아이도, 노는 게 즐거워야 한다. 그러려면 아이에게 놀이가 어떤 의미인지, 얼마나 소중한 가치가 빛바랜 형태로 남아 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아이와 놀아주어야겠다는 마음도 설익은 형태에서 숙성해야 하는 것이다.


‘엄마는 이렇게 놀아줄 수 있어!’가 아니다.


‘너랑 노니까 이런 느낌이구나!’ 가 되어야 한다.


혹자는 말한다. 아이와 제대로 놀아줄 수 있는 부모라는 건, 아이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 VIP 입장권을 손에 쥔 거나 다름없다고. 어쩌면 그것이 아이의 부모로서 누리는 최대의 혜택이자 탐험이 아니겠느냐는 뜻이다. 많이 부끄러웠다. 아이의 입장에서 부모에게만 주는 입장권이었는데, 건방지게 내가 아이의 세계에 언제든지 입 퇴장 가능한 프리패스권이라도 지닌 듯했다. 내가 낳았으니까, 이제껏 내 말을 잘 들어 왔으니까 당연히 이래야지 했던 것들, 이 정도는 한다는데 우리 애는 어떨까 하며 비교하려던 마음, 아무래도 놀기만 해서는 탐탁지 않은 마음에 따라오는 보상 심리. 그 모든 걸 품었던 나였다.


물론, 아이와 제대로 노는 부모도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무척 자연스러워서 갈등 자체를 당연하게 여기고 협의하는 게 익숙해졌다거나, 놀다가 서로의 치부가 드러나더라도 차분히 성찰의 계기로 받아들이는 경우들(진실게임도 제대로 하면 심각해질 수 있다!), 나아가 부모와 아이가 놀면서 했던 약속이 생활 습관으로 이어지며 짙은 신뢰감을 쌓는다면, 당신은 이미 육아 전문가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그러나, 함부로 부러워하지는 말자. 그들 역시 쉬운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진짜 놀이’가 되기 위해 고수한 태도가 있었을 것이다. 바로 놀이를 가장한 모든 껍데기를 걷어 내고 순수하게 아이를 놀게 하는 것. 최소한의 도움만 주고 ‘내버려두는 것’. 순수한 놀이시간을 만끽하며 ‘스스로 생각할 기회’를 주는 것. 그것이 자기 주도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믿어 주는 것’.


하나같이 현실에 맞지 않는 북유럽풍 지침서 같다는 거 안다. 그런데, 또 길게 보면 저게 맞겠다는 확신도 든다. 무엇보다 내가 겪어보지 않은 일이다. 내가 가지 못했던 길이다. 언제까지 애 즐거운 모습만 생각하며 살 수 있겠나 하는 걱정이 앞선다. 이번에는 애 들들 볶아서 현실에 맞추어 평범하게 사는 아이들 모습을 상상해 본다. 왠지 씁쓸하다. 평범함 속에서도 자신만의 ‘놀이’는 있어야 숨통이 트일 것 같다. 그 숨통의 싹을 틔우는 시기가 지금이란다. 지금 당장 ‘놀이’가 간절한 이유다.


“우리는 놀이를 멈추는 것이 아니라, 나이를 먹으며 놀이하는 법을 잊는다. ”

-조지 버나드 쇼-


부모가 되니, 나도 열심히 놀던 때가 있었다는 걸 잊곤 한다. 평범하지만, 노는 방법을 잊은 세대는 아니다. 어릴 때처럼 놀이하는 방법을 잘 기억하고만 있다면, 가능성은 있다. (갑자기 초등학교 때, 밤늦게까지 동네 골목에서 도둑 잡기 놀이하느라 엄마한테 파리채로 두들겨 맞았던 기억이…!!)


놀 시간은 없지만, 놀 수는 있다. 그것만 기억하자. 당신도 그렇지 않은가. 늘 뭔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면서도 틈만 나면 놀 궁리하며 설레고 신난 적, 있을 것이다. 아이와 진짜 놀이를 해 보자. 들떠 있는 모습과 빵빵 터지는 맑은 웃음소리. 살아내느라 잃어버렸던 내 여유를 돌려받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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