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넷. 너희들은 지나가고, 나는 진보한다
“선생님, 사실은요. 그 애랑 이렇게까지 된 건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였어요.
다른 ○○는 어린이집에서부터고요. 올해 같은 반 된 걸 알고 얼마나 껄끄러웠는지 몰라요.
이젠 저희도 다 컸으니 그러려니 하고 지낼 뿐이죠.”
고등학교에 있다 보면, 학폭으로 교육청에 보고할 수준은 아니나, 그 수위를 넘을 듯 말 듯한 일들이 많다.
담임으로서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기도 하고, 담임을 하지 않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학생들과 함께 각종 프로젝트를 진행하려면 상담이 꼭 필요한 이유다. 어떤 아이는 봇물 터진 듯, 불편한 친구 관계 이야기를 막 털어놓기도 하고, 어떤 아이는 끝까지 괜찮다고 하다가(심지어 ‘학교생활이 즐겁다’라고까지 말했다!) 1년이 훌쩍 지나고서야 속내를 훅 털어놓고 졸업하는 아이들도 있다.
더러는 이듬해 대학생이 되어 커피 들고 찾아와 놀라운 반전(?)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한다.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나고 보니, 그 힘들었던 인간관계조차 추억이더라고요.”
“웃긴 게, 그렇게 힘들었던 시기를 겪고 나니, 대학 생활이 쉬워졌어요.”
다 과거에서 헤어 나오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아이들에게 항상 하는 말이, ‘너희들의 인생이 수많은 점으로 이루어진 선이라면, 지금 고2 담임으로 나를 만난 이 시기는 하나의 점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그러니, 수행평가 관리하겠다고 친구들에게 밉상 짓하면서 ‘공공의 적’ 되지 말고,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억울한 느낌이 강하게 드는 일이 있다면 무겁게 고민하지 말고, 누군가에게 털어놓아도 된다고 말해 둔다.
그렇게 상담을 진행하다 자연스럽게 흘러드는 문제의 기원은 늘 초등학교 시절이다.
부모의 돌봄이 서서히 느슨해지고, 양육 패턴도 어느 정도 윤곽을 잡고 나면 아이 간의 역학관계가 생기기 시작한다. 이렇다 할 ‘문제’는 생기지 않지만, 늘 소소한 문제들은 있어 왔고, 문제를 ‘문제 삼지 않으려고’ 하는 분위기도 있다. 그래서인지 초등학교 시절부터 쌓인 교우관계가 고등학교 때까지 자잘하게 이어지며 더 이상 못 참겠다느니, 신고하느니 마니 하는 일까지 벌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초등학생은 어떨까.
이제는 급변하는 사회에 걸맞게 ‘초등 사춘기’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사전적 의미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성인이 되어가는 시기. 대개 12세에서 16세까지를 일컬었다. 그러나, 최근 한 의학신문 기사에 의하면, 35만 명 이상의 여학생을 대상으로 건강행태 조사를 진행한 결과, 초경 기준 연령이 10.5세다. 빠른 아이는 초등 3학년부터 사춘기라는 얘기다. 2차 성장의 속도만큼 아이들의 정신연령도 알아서 성숙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루 평균 초등생의 게임 시간이 2~3시간인 걸 감안하면 앞으로 이 아이들의 루틴도 쉽게 그려진다.
학교, 학원, 숙제, 틈틈이 게임, 검색. 더군다나 초등 때부터의 악질적인 언어 폭행과 잘못된 성 지식은 대부분 어릴 때부터 추천받는 알고리즘 콘텐츠에서 비롯된다고 하니,
초등 고학년일수록 전방위적인 질적 관리가 필요하다는 뜻이겠다.
초등 전문가들은 사춘기가 앞당겨진 만큼 부모님도 사춘기 대비를 심리적으로 앞당길 것을 권한다.
갑자기 돌변한 아이를 보고, 충격을 받거나 우울해할 것이 아니라
‘너도 어른이 되어 보겠다고, 내게 이렇게까지 해대는구나.
빠르다 빠르다 하더니 내 아이도 그렇구나.
그럴 때가 지금이구나.’
하며 침착하게 대응할 준비를 하라는 말이다.
침착하라고? 부모가 침착해야 아이도 덜 혼란스럽다고? 돌고 돌아 다시 질문이 내게로 왔다.
이 시기가 너와 내게 과한 상처가 되지 않으려면 나는 뭐부터 준비해야 하는 거지?
‘어떻게 침착해 질 건데?’
‘네 아이한테 어디까지 해 줄 수 있어?’
‘너도 있고, 아이도 있어야 하는 거잖아.
아이가 더 크려고 혁명에 가까운 용트림을 할 텐데, 이제까지 해 온 방식으로 되겠어?
너도 변해야 해. …그동안 애썼다.’
이제까지의 내 모습이었던 ‘엄마’와 결별할 시간이다. 그게 준비 아닐까. 관련 전문가들은 그랬다.
부모가 감정 정리가 잘되어야 한다고. 그래서 불필요한 감정이 아이에게 감염되지 않도록 감정을 분류하는 훈련도 필요하고, 중년 부모로서 여러 가지 목표와 가치를 재설정할 필요도 있단다. 그렇다. 결국, 내가 유연하게 업그레이드된 태도를 유지하면, 초등 사춘기조차 ‘중간 항로의 조류’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다.
변화의 시작은 생각부터다. 이제껏 아이들에게 해 오던 내 행동과 말투에 결별을 고할 때다.
숙제했냐는 말, 안 된다는 말, 그만하라는 말. 나부터 그만하자.
‘시즌 1: 지도와 훈육의 시대’를 지나 ‘시즌 2: 존중과 호기심의 시대’를 준비하는 거다.
조금은 슬프지만, 하나씩, 천천히, 너를 내 마음에서 살금살금 떼어내는 기분으로.
지난달의 일이다. 아이가 고집스럽게 아이돌 앨범과 포토 카드를 사 달라고 했다.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한두 개를 사 주었는데, 지속적으로 사달라며 조르길래 버럭 화를 내고 말았다. 이건 마케팅이라고, 부담스러운 가격에다 이런 방면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던 네가 무슨 계기로 이렇게까지 하는지부터 알아야겠다고 했다.
당연히 아이는 내게 말해주지 않았다. 미친 듯이 몰아붙인 내 무서운 말투도 한 몫했겠지만, 바위처럼 딱딱하게 굳은 아이 표정을 보고 직감했다. 그동안 내게 마음이 닫혀 있었구나. 찝찝했지만, 일단 앨범을 사 주었다. 그리고, 학원 이동할 때마다 말없이 같이 듣기 시작했다. 전혀 내 취향이 아닌 음악을 아이가 빠져 있다는 이유로 그렇게 열심히 들은 적은 처음이었다.(마치 유아기 때 드라이브할 때마다 영어노출을 위해 DVD를 틀어놓는 느낌이랄까) 한 달 정도 지난 후, 아이는 말해 주었다. 그동안 학교 다니며 이렇다 할 친구가 없었는데, 올해는 마음 맞는 친구가 많은 반에 배정되었고, 그중 한 명이 이 그룹의 광팬이라 옆에서 구경하다가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고. 그리고, 자신은 이 그룹 중 누가 좋고, 어떤 곡의 가사가 마음에 들며, 이런 팬심 활동이 한참 재밌는데, 아마 중학생이 되면 시들해질 것 같다고 했다.
순간,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았다. 이렇게 어른스럽게 말할 줄 알다니. 그렇게 말해줘서 정말 고맙기도 했고, 그동안 아이 혼자 감당했을 외로움이나 내 눈치를 보며 망설였을 시간을 생각하니 대견했다.
아이는 한순간, 이미 어른이었다.
“그랬구나. 괜찮아. 네가 그렇게 말해 주니까 엄마도 이제 다 이해가 되네. 엄마는 그런 줄 몰랐어.
그냥 네가 비싼 앨범만 집요하게 사 달라고 해서(푼돈도 아니고) 속상했지.
이제부터는 용돈 금액 내에서 해결하자.”
아이는 어른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 개운한 표정을 지었다. 차 안에서 계속 흘러나오는 아이돌 그룹 음악이 후렴구를 향했다. 내가 큰 소리로 따라 불렀더니, 아이들은 어설프다고 난리였다.
나더러 그만하라며 키득거리는 모습은 또 어릴 때 모습 그대로다.
부대끼는 과정이 있겠지만, 변화하려면 어쩔 수 없다. 혹시 초등 사춘기 아이를 두고 있는가.
그렇다면 잘 준비해 두자. 초등 사춘기는 지나가지만, 우리는 지나가지 않는다. 진보한다.
“당신이 침착할 수 있다면,
아이는 더 안전한 마음으로 흔들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