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셋. 다정함 뒤에 숨은 에너지
“OO아. 이거 요즘 엄마가 읽고 있는 책인데 말이야. 엄마도 말투를 연습해야 한대.
엄마는 어떤지 한번 봐줄래? ”
“어디 봐. 음…. 응? 엄마는 나쁜 예시의 말도 많이 하고, 좋은 예시의 말도 많이 하는데?
둘 다 섞였어. 진짜 신기하다~~”
첫째의 쿨한 분석이다. 아이들은 지금도 수시로 낄낄거리며 엄마의 화내는 지점이나 형태를 반찬 삼아 이야기하곤 한다. 유치원 때는 속수무책으로 당했다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이후로는 조금씩 대들곤 했다. 그래도 엄마가 바쁘고 피곤한 줄 너무 잘 알아서(?) 이렇다 할 친구가 없어도, 준비물이 듬성듬성 빠져도, 묵묵히 잘 견뎌낸 아이들이다. 그러고 보니, 큰 애가 초등 저학년 시절, 담임과 딱 한 번 통화했던 때가 기억난다. 연말쯤이었는데, 담임과 통화가 끝난 순간, 그간 아이의 학교생활을 단박에 간파하고 밤새워 엉엉 울었다.
그리고 퉁퉁 부은 눈으로 아이를 보았다.
‘내 감정 정리는 됐고, 누구보다 힘든 건 너였을 테니, 이리 와 보렴. 그동안 고생 많았다.
너의 1년이 어땠을지 짐작이 가. 엄마가 바빠서 미안하다. 그동안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니.
완벽주의 성향의 깐깐한 담임 밑에서 너는 1년 동안 안타까운 아이로 주시받고 있었겠구나.
엄마가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속이 많이 상했던 만큼 있는 힘껏 아이를 부둥켜안았다. 금세 차오르는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를 때까지. 그것이 당시 나의 최선이었고, 내 수준이었다. 내 양육실태의 바로 미터였다. 아이는 가만히 안겨 엄마의 흐느낌을 흠뻑 느끼고는, 내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어른스럽게 닦아주며 말했다.
이젠 괜찮다고. 엄마가 힘들어도 열심히 일하는 걸 알고 있으니 굳이 말 안 했다고 했다. 고등학교 교사인 엄마는 생각지도 못한 초등 아이 생활 복장의 중요성, 받아쓰기 점수가 낮은 것이 그렇게 튀는 일인지도 몰랐다. 9등급제 무난한 성적 산출을 향해 학기제로 진행하는 각종 수행평가와 시험 문제 출제,
담당 업무와 학생들과의 상담까지 수시로 하고 나면 늘 녹초였으니까.
체력은 연약하면서도 성격이나 기질은 완벽주의였던 나는, 집에서까지 다정한 엄마의 가면을 쓸 여력이 없었다. 당시 휴직 중이던 남편에게 볼멘소리를 해봐야 의미 없는 일이라는 걸 깨닫고는 설움이 북받쳐 올라왔더랬다. 내 책임감과 자존심은 아이의 생활 실태를 보고받는 전화 한 통으로 산산조각이 났고, 완벽주의 엄마가 완벽주의 담임에게 속수무책으로 ‘죄송하다’는 말만 되풀이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마치 내 아이의 수더분한 모습이 내 부모 능력을 반영이라도 한다는 듯, 통화 내내 심리적 위축감을 느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직면’이란 그런 것이었다. 매우 따끔하고 쓰라린 데다 뒷수습마저 철저하게 외로운 경험.
한 인간은 이렇게 나약하고 이기적인 동물이구나.
나는 어느새 아이가 내 분신 같다고 느꼈으며,
건재했던 자존심이 상한 것에 치를 떨고 있었다.
도대체 무엇이 다정함이고, 무엇이 존중이며, 믿음인가.
아쉽지만, 지금도 존중이나 자존감, 믿음 따위가 들어간 책 제목을 보면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에 앞서 이해받아야 할 부분이 너무나 설익은 느낌으로 후루룩, 퉁 치고 넘어가는 것 같아서. 오늘 하루를 받아들이기까지 얼마나 많은 심리적 난관이 있었나. 다들 갑자기 존중을 배우고, 자존감 회복을 원한다고 해서 만들 수 있는 영역이 아니지 않은가. 너덜너덜한 일상에서 존중이 넘치는 가정을 꿈꾸자니 월반하려 애만 쓰는 부진아가 따로 없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내 아이를 무조건 믿는다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고, 어린아이의 의견이라고 일일이 존중하는 것도 녹록지 않은 일이었다. 그보다 내가 지닌 믿음과 자존감의 깊은 뿌리는 어디에서 나오는지부터 헤아리는 편이 납득하기 쉬웠음을 고백한다. 그래서 내 감정이 붉으락푸르락할 때면, 애써 다정해지기보다는 담담함을 선택하기 시작했고, 그런 행동 역시 아이들에게는 적정한 온도의 사랑으로 여겨질 수 있음을 알아가는 중이다.
혹자는 다정함을 우습게 보지 말라며, 그 뒤에는 엄청난 의식적 노력과 에너지가 숨어 있다는 논리를 펼친다. 다정해야 살아남는다는 논리보다는 훨씬 흡입력 있는 화두 아닌가. 개인적으로는 다정함에도 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인정받기 위한 다정함’과 ‘스스로 만족하기 위한 다정함’이다. 이게 직장에서는 가능한데, 집에서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먼저 사회생활을 떠올려보자. ‘친절함의 끝판왕’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타고난 책임감과 강한 인정욕구가 어우러져 웬만해서는 언성을 높이는 일이 없다. 그러나, 집에서는 어떤가. 가장 사랑하고 아껴야 할 사람들이지만, 가족들에게 존재 자체로 인정받기보다는 ‘기능적 인간’으로 여겨진 지 오래다. 나는 내 안에서 가족들에게 ‘스스로 만족하기 위해 다정해지기’를 버린 것이다.
가족들에게만큼은 존재 자체로 지내고 싶었던 탓에, 의식해서 다정해질 생각을 잃었다. 말 그대로 다정함을 위한 에너지는 바닥을 쳤는데도 꽉 찬 야근 업무처럼 퇴근 후에도 다정함을 강요받는 역할극 같았다. 기능적 인간이 다정함까지 장착해야 한다니. 억지 춘향으로 다정함을 연출했다면 아마 정신 분열이 오지 않았을까. 그건 나를 위한 다정함이 아니다. 가족들을 위한 것도 아니다. 그저 의식의 끈이 갈 길을 잃고 관성대로 이리저리 휘둘리고 만, 허깨비가 하는 짓에 불과하다.
생각 에너지의 방향 전환이 절실했다. 여기는 직장이 아니다. 인정받기 위해서 다정할 필요 없는 곳. 나를 위해, 내 존엄을 위해, 다정함이 당장 어렵거든 담담해지는 것부터 시작해보자. 정말 나를 나로 있을 수 있게 하는 존엄의 이유가 바로 서 있다면 담담함도 충분하게 다정함이 될 수 있다. 내가 납득할 수 있는 내 존엄의 수위. 그렇게 생각하니, 적어도 아이들에게 무턱대고 화내는 일은 줄었다. 대신 아직 반인반수 같은 모양새라 ‘다정함’이라는 카테고리에 안착할 수준에 못 미친다는 것쯤은 너그럽게 숙지하자. 내 감정이 존엄의 이유와 함께 머무는 정확한 위치. 그것만 알아도 충분히 승산은 있다. 아이의 ‘엄마 말투 반은 나쁜 예, 반은 좋은 예’라는 분석은 어쩌면 가장 진화한 내 말투 성적을 칭찬한 것일지도 모른다.
한편으로는 여전히 이런 의문도 든다. 왜 엄마만 다정함에 대해 이토록 치열해야 하는지, 아빠의 어설픈 다정함에는 왜 그토록 너그러운지, 가족 관계의 그물망은 사방팔방으로 뻗쳐 있는데 엄마의 공허함은 왜 점점 커져만 가는 건지 같은 것들 말이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에 대해 심도 있게 대화할 기회가 없다. 육아에서 엄마의 다정함이라는 키워드는 여러 가지 어폐가 있음에도, 급한 사람이 우물을 판다는 걸 증명하듯 독자층은 죄다 ‘엄마’들이지 않나. 뻔히 알면서도 눈앞의 현실에서 한 번 더 에너지를 끌어올리게 만드는 구조,
이게 팩트다.
그래서 다정하기 어려운 날엔 그냥 담담함을 택한다. 늘 ‘스스로 만족하기 위해’ 다정한 당신이라면 진심으로 부럽다. 그러나 만약, 혹시라도 그렇지 않은 부류의 당신이라면 어떤가. 함께 담담해져 볼만하지 않은가.
“아이야.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는 단단함, 그것이 담담함이란다.
엄마에게는 이것도 사랑의 모습이었다는 걸
언젠가 너도 알게 될 거라 믿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