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선배들은 흔히들 말했다. "그게, 파란 피 물들이기야, 정신교육!!" 코로나 이전 회사는 신입사원이 되면 경력이든, 신입이든 상관없이 그룹 전체에서 주관하는 합숙 인사 교육을 받게 된다. 짧게는 2주에서 길게는 한달 정도. 그룹 인사 교육이 끝나면 각 계열사로 가서 또 인사 교육을 받는다. 보통이면 2개의 교육을 받는데 한 달씩 총 두 달의 시간이 소요된다. 그 후 부서 배치를 받게 되서 업무를 시작하게 되는데, 나 같은 경우는 또 하나의 교육을 받았다. 겨울에 채용한 신입사원들을 여름이 오기 전 모두 모아 놓고 큰 대회를 개최한다. 대회에서는 여러 행사가 있고 마지막 날 각 계열사별로 아주 큰 무대 위 공연을 펼친다. 그 공연을 준비하기 위해 신입사원들 중에서 일부 인원을 선발해서 별도의 합숙 교육을 시킨다. 공연 준비 신입사원으로 뽑힌 나는 그리하여 회사에 들어가서 총 4개월 동안 합숙 교육을 받았다. 다른 회사 역시 신입 사원이 되면 처음 한 달의 합숙 교육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는데, 4개월이라니. 부모님은 회사에 입사한 것이 맞는지 의아해 하셨다. 그도 그럴 것이 한 달에 한 번씩 캐리어에 짐을 꾸려 한 동안 집에 못 오고 연락도 잘 안되는 생활이 계속 되다보니 약간은 미심쩍어 하셨던 것 같다.
1월말부터 시작해서 6월 중순까지 이어진 길고 길었던 시간이, 오랜 회사생활을 끝내고 돌아보니 참 짧게 느껴진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길고 짧은 4개월의 시간으로 회사 생활이힘겨울 때마다 응원이 되고, 퇴사를 한 지금도 가슴 뛰면서 떠올릴 행복한 추억거리가 되었다. 밤 열시 열한시까지 하던 공부 안 하고, 아르바이트 안 하고, 거대한 또래 집단에 들어가 서로 머리 맞대고 무수히 많은 아이디어를 내고 실제로 계획해보고 수정해가고 연습해가는 일련의 활동들이 나는 참 좋았다. 잠을 2~3시간씩 밖에 못 자도 아침에 일어나면 기분이 좋고 에너지가 솟아났다. 물이 없어 배 위에서 팔닥대기만 하던 물고기가 넓은 바다로 던져져서 원없이 멀리멀리 헤엄쳐 가는 것처럼 좋았다. 처음 합숙할 때는 20명의 인원이 한 팀이었고, 두번째 합숙에서는 35명 정도, 마지막 합숙에서는 55명의 동기들과 합숙했는데, 점점 아는 사람이 많아져서 새롭고 좋았다. 나라는 존재가 이토록 사람을 좋아하고 그 속에서 에너지를 얻는 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단체마다 새롭게 붙어지는 별명들이 대장, 장군이었던 걸 보면 정말 내게 에너지가 넘쳐나긴 했나 보다. 내가 이런 사람인 줄 회사에 가서 처음 알게 된 사항이었다.
모든 합숙이 끝나고 본격적인 업무를 시작하고 나니 합숙 생활이 많이 그리웠다. 실제 업무보다도 난 합숙 체질이었나보다. 매일 매일의 교육들 속에서 행해지는 아이디어 미션과 수행, 무대 준비를 위한 춤인지 운동인지 모를 연습까지도 온 몸이 아파 힘들면서도 좋았다. 끝이 정해져 있어서 좋았던 것 같기도 한다. 마지막 날이면 모든 게 끝난다는 아쉬움. 다시 겪어보지 못할 경험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어 지나가는 시간을 붙잡고 싶었다. 마치 휴가 중 마주한 여행이 정말 좋아서 시간이 지나는게 아쉽고 붙잡고 싶은 느낌 그대로였다. 그런데 지나고 나서 동기들과 만나 이야기해보니, 그 합숙의 과정이 힘들다는 대화도 많이 흘러나왔다. 일단 잠을 절대적으로 못 자고 개인 시간, 휴일 다 반납해야하는 최소한 삶의 질 유지가 어렵다. 아이디어 계속 내는 것도 재미없고, 무엇보다 많은 사람의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큰 이유에서다. 그런데 나는 참 좋았으니, 살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해 봤다는 것, 안다는 것은 소중한 경험이고 앎이다.
만약,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취직했다면 이렇게 열심히 합숙 단체 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어했을까? 대학원을 정상적으로 졸업하고 갔으면 했을까?
아닐 것이다. 밝고 사교적이긴 하나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모으고 많은 사람 앞에서 춤을 추고 할 정도의 적극성은 없었다, 나의 몸뚱이에! 그런데 대학원을 뛰쳐나와 바닥을 쳐보고 주먹밥 장사를 할까 고민하다 회사에 들어갔으니, 너무 신이 난 거다. 얼마나 좋았겠는가, 인생이 척척 풀릴 줄 알았다가 터널을 만나 꽉 막혔는데 다시 터널 끝으로 나오고 만난 세상이, 드넓은 바닷가의 모래사장이니.. 원없이 뛰어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정말 신이 나서 굳이 안 해도 될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서는 일련의 행동들을 했고, 안 하던 행동을 하니 약간 일탈의 느낌으로 짜릿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 시간을 남들보다 더 소중히 느끼고 열심히 임했던 것 같다. 내게 오지 않을 것 같은 행복한 미래를 마주했을 때의 벅찬 마음으로 대했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인생의 바닥을 쳐 보는 것은 괴롭고 비참하고 슬프긴 하지만 전화위복의 기회로 훌륭한 경험이 된다고들 하는 것일까?
내게 물든 파란 피가 회사의 파란 피인지, 드넓은 바다가 주는 파란 피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정도면 파란피 물들이기 성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