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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백구십칠 Nov 29. 2020

기네스 펍에서 만난 호의의 퍼스트 펭귄

 맥주를 좋아한다. 좋아한다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로.

언젠가부터 맛있는 맥주를 마시게 되면 꼭 사진을 찍어 따로 저장해 두었는데, 그 사진들이 300장을 넘어갈 정도이다.

지금까지 마셨던 수많은 맥주 중에 최고의 맥주를 하나만 고르라고 한다면 꽤 오랜 숙고의 시간을 거쳐야 하겠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맥주를 고르라고 한다면 바로 선택할 수 있다. 영국 런던에서 마셨던 기네스 맥주이다.


때는 3년 전 여름. 유럽여행의 두 번째 도시로 방문했던 런던에서 우리 부부는 제대로 된 기네스 생맥주를 마실 수 있는 (라고 가이드 북에 나와있는) 펍에 찾아가기로 했다.

기네스라고 하면 아무래도 영화 <킹스맨>이 먼저 떠오른다.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는 슈트 브랜드의 광고 카피 같은 대사를 리드미컬하게 내뱉고는 멋지게 적들을 제압하는 콜린 퍼스. 그리고 그가 적을 제압한 후 시원하게 들이켰던 맥주가 바로 기네스였다.


실제로 찾아간 런던의 펍에서는 콜린 퍼스와 같이 멋지게 차려입은 미중년 대신, 현지의 쾌활한 젊은이들이 시끌벅적하게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바텐더 앞 바 테이블에 자리를 잡은 우리는 바로 기네스 두 잔을 주문했다. 그리고 영국에서 마신 첫 기네스는 정말 맛있었다.


물론, 한국에서도 원한다면 얼마든지 기네스 생맥주를 마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술이라는 것은 술 자체의 맛과 마시는 곳의 분위기, 그날의 소음 같은 것들이 합쳐져 '최종적 맛'을 완성한다고 생각한다.

그날의 기네스는 '시원하다, 청량감이 있다, 풍미가 남다르다'도 아닌 '맛있다'였다. 표현력이 빈곤한 나로서는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펍의 분위기와 현지 젊은이들의 유쾌한 잡담 소리, 그리고 기네스의 맛에 취해 한잔을 거의 비워가고 있을 때쯤, 한 영국인 청년이 들어와 바텐더에게 기네스를 주문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단어로 추가 주문을 하였는데 이미 익숙한 주문인 듯 고개를 끄덕인 바텐더는 기네스에 무언가를 섞어서 청년에게 내어 주었다.

'저게 뭐지? 나중에 인터넷을 찾아봐야겠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행동파인 아내는 이미 그 청년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저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네가 주문한 그게 뭔지 알 수 있을까?"

 "Guinness and black currant. 아직 안 마셔봤니? 꽤 괜찮은 술이야"
 "그렇구나. 고마워. 우리도 기네스를 좋아하는데 신기해서 물어봤어"


청년은 아주 친근하게, 그리고 예의 바른 말투로 말을 이어갔다.
 "괜찮다면 지금 마셔볼래?"
 "응?"
 "여기 같은 걸로 두 잔 주세요"
그리고는 다짜고짜 계산을 하려 했다. 심지어 신용카드나 현금결제도 아닌 핸드폰만 가져다 대면 '띡'하고 계산이 끝나는 모바일 결제라 말릴 틈도 없었다.
 "아니야. 우리가 계산할게"
 "괜찮아. 이건 내가 살게. 그럼 Enjoy"


 그럼 Enjoy.
 그럼 Enjoy...


잠시 우리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생각을 주워 모으는 사이 영화와 같은 유려한 동작으로 Guinness and black currant 두 잔을 남기고 홀연히 떠나버린 청년이었다.


그 영국인 청년은 우리 부부에게 호의의 '퍼스트 펭귄'이었다.

펭귄 무리는 먹잇감을 구하기 위해 바다에 뛰어들어야 하지만 바다표범 같은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쉽게 뛰어들지 못할 때가 있다. 이때 가장 먼저 바다에 뛰어들어 머뭇거리는 펭귄 무리를 이끄는 펭귄을 '퍼스트 펭귄'이라고 한다.

경제학에서는 성공 가능성이 불확실한 시장에 먼저 뛰어들어 다른 후발주자들을 이끄는 리더 회사를 지칭하는 용어로 쓰이기도 한다.


처음 보는 다른 나라의 사람.

어떻게 반응할지도 모르는데 영국 청년은 용감하게 우리에게 먼저 호의를 베풀었고, 그의 호의는 나도 모르게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영국 사람들에 대한 부정적 인상을 극적으로 바꿔주었다.

영국인들은 대부분 차갑고 까칠할 것이라는 선입견에 갇혀 잔뜩 웅크린 채 런던 여행을 하고 있었는데 청년의 호의로 인해 '영국인들도 어딘가 모르게 친근하고 귀여운 구석이 있구나'하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야말로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가 아닌 '친절이 그 나라의 인상을 바꾼다'였다.


호의도 전염될 수 있다고 믿는다.

호의의 퍼스트 펭귄이었던 영국 청년의 친절을 이어받아 우리 부부는 이렇게 다짐했다. 언젠가 종로 광장시장 같은 곳에서 영국에서의 우리 부부처럼 호기심 가득한 눈동자의 외국인 관광객을 만나게 된다면 꼭 빈대떡과 막걸리를 대접해 주겠다고. 그리고 이렇게 말해주리라.


‘그럼 Enj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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