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일을 맞아 오랜만에 극장을 찾았다. 익숙한 패턴. 사람들 사이를 가로질러 키오스크 앞으로 간다. 화면을 클릭하며 보고 싶은 영화를 고르고, 시간을 선택하고, 좌석을 선택한다. 영화 시작까지는 15분쯤 남았으니 여유롭게 팝콘을 사러 가 볼까나. 역시 팝콘은 달달한 카라멜 맛 반, 고소한 기본 맛 반이다. 콜라는 제로코크.
주문을 하고 나서 팝콘을 받으러 가는데. 어라? 이제 팝콘 픽업까지 무인으로 바뀌었네?
처음 보는 시스템에 허둥지둥. 뭐야? 이거 어떻게 받는 거지? 무슨 버튼을 눌러야 하지? 한참을 버벅거리다가 겨우 팝콘을 받아왔다. 출력된 영수증의 바코드를 찍으면 픽업 박스의 문이 자동으로 열리는 시스템이었다.
혹시 허둥대는 내 모습을 누군가 보지 않았을까 하는 민망함과 내가 벌써 이런 거에 적응하지 못할 나이가 되었나 하는 황망함에 잠시 멍한 상태가 되었다.
사실 예전부터 새로운 기술에 빠르게 적응하는 편은 아니었다. 귀찮아했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 세상은 언제나 빠르게 변화하고, 이전의 기술보다 더 앞선 기술은 늘 등장하지만 새로운 기술을 익히느라 생기는 스트레스보다는 이전의 기술을 고집함으로써 따라오는 불편함을 선택하는 편이었다. 그러다 보니 모두가 세상 편해졌다고 칭송하는 배달앱을 까는 시점도 더는 전화로 주문하기 불편해진 시점이었고, 지금은 누구나 익숙하게 타고 이용하고 있는 전동 킥보드 또한 최대한 이용을 늦추고 있다.
'귀찮아. 그냥 걸어 다니지 뭐' 하는 생각으로.
하지만 극장에서의 허둥거림은 종류가 달랐다. 나의 선택과는 무관하게 익숙하게 먹던 팝콘을 먹기 위해서는 기존의 행동 패턴을 그 자리에서 바꿔야 했고, 그러지 못한다면 팝콘조차 먹을 수 없는 불가항력적 시스템이 떡하니 내 앞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아주 미묘했지만 두려움이 느껴졌다. 이러다 나도 빠르게 변화하는 기술 흐름을 놓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모두가 익숙하게 이용하는 시스템을 나만 누리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닐까. 포모 증후군이었다.
포모 증후군은 'Fear Of Missing Out' 즉, 소외되는 것에 대한 공포심을 말하는 영문의 앞 글자를 딴 심리학 용어이다. 원래는 마케팅적 측면에서 모두가 소비하는 상품이나 문화를 자기만 향유하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는 심리를 일컫는 말로 주로 쓰였다. 최근엔 주식이나 암호화폐 투자로 큰 수익을 올리는 주변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자기만 투자의 기회를 놓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두려워하는 모습에 빗대어 많이 쓰이고 있는 듯하다.
상품이나 투자기회뿐 아니라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의 기술 흐름에 뒤처지지 않을까 두려워했던 극장에서의 느꼈던 공포감 역시 포모 증후군이었다.
생각해 보면 이런 공포심은 도처에 깔려있다. 익숙하게 사용하고 있는 키오스크도 누군가에게는 장벽일 것이다. 실제로 서울시가 서울시민 5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서울시민 디지털 역량 실태조사'에 따르면 55세 이상 서울시민 중 ‘키오스크를 한 번도 사용해 본 적없다’고 답한 비율이 절반 이상이었다고 한다.
키오스크를 사용하지 않은 이유는 ‘필요가 없어서(29.4%)’라는 답변도 있었지만, 사용 방법을 모르거나 어려워서(33.8%)’, ‘뒷사람 눈치가 보여서(17.8%)’라는 답변들도 있었다.
이전부터 키오스크라는 새로운 기술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은 존재했을 것이다. 하지만 주류에 속해있었던 나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고 비로소 내가 이용하기 어려운 종류의 키오스크가 등장하자 비주류가 됨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고 이런 문제에 대한 뒤늦은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라틴어 문구이다. 고대 로마에서는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을 위한 화려한 개선식을 열고 모두의 열렬한 박수를 받으며 시내를 가로질러 행진을 했는데 노예 한 명이 장군과 같이 탑승하여 계속해서 속삭였다고 한다.
"메멘토 모리...메멘토 모리..."
지금은 승리의 영광을 마음껏 누리지만 너무 우쭐대지 마라. 우리는 모두 인간일 뿐이다. 우리는 언젠가 모두 죽음을 맞이한다.
세상은 빠르게 변화하고, 오늘도 모두의 일상을 바꿔줄 것만 같은 새로운 기술들이 탄생하고 있다. 하지만 기억하자. 우리는 모두 언젠가 첨단 기술의 비주류가 될 수 있다. 기술적, 사회적 혜택의 경계선 밖에 놓인 사람들을 위한 활동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던 과거의 나 그리고 누군가에게 속삭이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