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 화양연화

by 문홍

여름방학이 끝나고 다시 학교 기숙사로 돌아가는 큰 딸아이에게 진심으로 나는 사과를 전했다.

뜬금없는 타이밍이었지만 나는 큰 아이에게 나의 진심을 전할 그 타이밍을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 ㅇㅇ야, 엄마가 정말 미안했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너한테 엄마가 너무 큰 상처를 준 것 같아. 네가 태어났을 때 엄마는 너무 행복했고 너를 위해서는 내 목숨도 아깝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그런 내가 너에게 세상에서 제일 가혹한 사람이 돼버렸어. 너의 마음에 어떤 상처가 남아있든 그건 절대 네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어. 부모님이든 동생들이든 그 어떤 것도 너의 짐이 아니라는 걸 꼭 말해주고 싶었어. 그리고 너는 눈부시게 빛나는 네 인생을 걸어갔으면 좋겠어. 언제가 됐든 네 안의 억울한 감정이 떠올라서 엄마한테 사과받고 싶은 게 생기거든 꼭 얘기해 주면 좋겠다. 절대 혼자서 감당하려고 하지 말고 꼭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 너는 절대 혼자가 아니라고, 너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너를 위해 같이 있어줄 거라고.. 알겠지?"


뜬금없는 나의 고백에 연신 고개만 끄덕이는 딸아이와 나는 설움을 감추지 못하고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다.

그렇게 딸아이는 떠났고 늦은 밤 잘 도착했다는 메시지와 함께 장문의 글이 함께 도착했다.


'엄마'

나는 벌써 코끝이 시큰해서 크리넥스 티슈를 눈가로 가져갔다.


'엄마, 사실 엄마와 떨어져 지내면서 그동안 엄마가 했던 집안일 들을 내가 맡아서 하는 게 힘들기도 했고 엄마가 없다는 사실을 친구들에게 숨기기도 했어요. 알잖아요, 엄마는 우리 친구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인싸였잖아요. 사실 친구들이 나보다 엄마를 더 좋아했을 만큼 엄마는 나에게 대단한 '문여사'였어요. 그런 엄마가 한순간에 사라져 버린 것이 조금은 충격이었어요. 그래도 나는 큰아이니까 아빠도 챙겨야 하고 동생들도 챙겨야 하는 상황에 놓여있다는 거 잘 알아요. 그런데 그건 엄마잘못이 아니에요. 상황이 이렇게 된 거잖아요. 나는 이 만큼 자라는 동안 엄마한테 너무 많은 걸 받았어요. 엄마가 얼마나 고생하면서 우리를 키웠는지 잘 알고 있고요 친구들이 못해본 경험들을 나는 엄마를 통해서 다 해봤다고 생각해요. 그 보다 동생들은 나만큼 엄마한테 받은 게 많지 않을 테니 앞으로는 동생들한테 더 신경 써주세요. 나는 지금 이 순간을 힘겹게 이겨내고 있는 엄마가 더 자랑스러워요. 오래오래 건강하게 우리를 지켜주세요. -사랑하는 딸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새끼가 어른인 나보다 더 어른이 되어가는 동안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지는 고통이 밀려왔다.


'아이는 부모가 자신을 아무리 학대하고 씻지 못할 상처를 줘도 그 부모를 백만 번 용서한다'는 말이 문득 떠올랐다.


나는 큰 딸아이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빌고 싶었다. 그런데 이미 그 아이는 나를 용서하고 있었다.

그 아이의 용서를 통해 나는 우리 부모님을 진작에 용서했다는 걸 깨달았다.

말로 주고받진 않았지만 딱딱했던 감정들이 허물어지고 말랑말랑한 감정들이 서로 교감되고 있다는 것을 진작에 느끼고 있었다.


진심은 사랑과 용서를 한 번에 전해주었다. 그러면서 가슴 한편으로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생겼다. 이제 서로 비밀을 터놓을 수 있는 동지가 생긴 듯 어떤 희망에 가슴이 벅차오르기까지 했다.


생사를 오가며 힘들게 버텨왔던 모든 시간들이 때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때 내가 그 많은 비밀들을 숨기지 않았더라면,

그때 우리 부모님이 나를 안아줬더라면,

그때 내가 참고 버티지 않았더라면,

그때 내가 무너지지 않았더라면......

모든 상처는 곪아서 터져야 그 안에서 새살이 돋아난다고 했다. 상처가 곪아터지는 아픔을 지나 그 자리에 새살이 돋아나는 시간을 인내해야 비로소 상처는 아무는 것이었다.



그 많고 많은 이유들이 그때의 나를 살게 했고, 그 많고 많은 이유들이 지금의 나를 일으켜 세우려 하고 있다.

아직 전쟁이 막 끝난 폐허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쉰셋의 나이지만 이제는 두렵지 않다. 강한 의지로 나를 살게한 내 안의 '나'를 믿고 세상으로 다시 나아가기로 결심했다.


이제 나를 사랑하고 나의 이야기를 함께 공감해 줄 사람들이 있는 그곳으로 담대히 첫 발을 내디뎌 보려 한다.


거창하지 않아도,

화려하지 않아도,

내 인생의 마지막 장면 '화양연화'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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