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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류 더미 속에서 발견한, 아내의 오래된 발자국

주민등록초본의 삶의 경로

by 간달프 아저씨

며칠 동안 청약 중도금 대출을 준비하느라 정신없이 서류를 챙겼다.

등본, 초본, 각종 증명서들. 책상 위에 쌓여가는 종이의 두께가 내 책임감의 무게처럼 느껴지던 오후였다


그러다 아내의 주민등록초본을 출력해 들여다보는 순간, 문득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초본이라는 건 참 독특한 문서다. 딱딱한 행정 서류인 동시에, 한 사람의 삶의 이동 경로가 고스란히 담긴 연대기다. 나는 그 문서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아내의 과거를 조용히 마주했다.


한 줄씩 내려가며 기록을 따라 읽었다. 유년기, 청소년기, 그리고 어른이 되기까지..

대략 1~2년에 한 번씩 바뀌는 주소들. 어떤 해는 반년을 채우지 못하고 이사한 흔적도 있었다.

나는 그 문자들 뒤에 숨어 있을 풍경을 상상해 보았다. 새로 짐을 싸던 부엌의 냄새, 처음 들어간 방의 낯선 공기, 정든 학교를 떠나던 날의 조용한 서운함, 익숙해지기도 전에 다시 떠나야 했던 반복되는 작별들.


아내는 가끔 자신의 어린 시절이 조금 복잡했다고, 그래서 일찍 철이 들었던 것 같다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그 말이 어떤 의미였는지, 그 깊이를 나는 이제야 비로소 이해하게 된 것만 같았다.

문서를 손에 들고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내 앞에서 늘 밝게, 단단하게, 그리고 담담하게 살아가는 사람.

그 강함 뒤에는 이렇게 여러 번 흔들렸던 시간들이 있었구나.

아내가 ‘강한 친구’가 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구나. 그리고 마음 한구석에서 조용히 울림처럼 다짐이 일어났다. 그 시간들을 견디며 여기까지 걸어온 사람을, 나는 더 잘 품고, 더 잘 돌봐야겠다.


생각해 보면 결혼 이후 아내는 단 한 번도 “좀 쉬고 싶다”는 말을 크게 한 적이 없다.

늘 나와 가족을 먼저 챙기고, 주어진 자리에서 흔들림 없이 서 있으려 애쓴다. 아마 익숙한 것이다.

늘 변하는 환경 가운데서도 스스로 중심을 잡아야 했던 그때의 연습들이.


초본을 조용히 접어 서류 봉투에 넣으면서, 나는 오늘의 우리가 얼마나 감사한지 새삼 느꼈다.

이제는 이사를 기록하는 종이에 또렷하게 찍혀갈 주소가 ‘함께 만들어가는 집’이라는 사실이,

아내에게 조금 더 따뜻한 시간이 되기를 바랐다.


대출 서류를 준비하는 일은 여전히 귀찮고 복잡했지만, 그 과정 속에서 뜻밖의 선물 같은 순간을 얻었다.

사람의 마음은 이렇게 종이 한 장에서도 깊게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오늘 다시 배웠다.


그리고 더 단단하게 마음을 정리했다. "이 친구를, 나는 평생 잘 지켜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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