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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식토끼 Sep 26. 2024

바람 기다리는 아이

마거릿 미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강렬한 경험'은,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켜켜이 쌓아올린 것들을 순식간에 헤집어놓는다. 


물에 빠졌던 일, 병아리의 단단한 듯 약한 발이 손바닥에 닿는 감촉, 죽은 물고기를 처음 본 순간, 처음 맛본 LA갈비의 맛 같은 것들. 찰나의 그 순간들을 떠올리면 온몸이 움츠러들거나 침이 고인다거나 소름이 돋으며 상념보다도 몸의 세포가 먼저 반응하고는 한다. 그런 경험은 물고기를 무서워하게 되었다거나 LA갈비는 손으로 쥐고 뼈 주변의 살까지 꼭꼭 발라먹어야 한다든가 하는 사소하지만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그리고 그중에는 정말로 잊고 싶은 끔찍하거나 슬픈 ‘강렬한 경험’들도 있다. 민달팽이 같은 시절의 내가 상처받았던 강렬한 경험은 아직까지도 마음 한편에 ‘당장 필요한 것들이 담기지 않은 이삿짐 상자’처럼 묵직하게 놓여 있다. 신경 쓰고 싶지 않지만 문득 방을 돌아보면 존재감 있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그런 것. 언젠가는 풀어야 할 걸 알지만 열었다간 쏟아질 지질한 생활감과 나의 구질구질함이 지긋지긋해서 그냥 모르는 척 눈 감고 있는 것. 그냥 때 아닌 돌풍이 집 안으로 잦아들어 딱 저 상자만 집 밖으로 날려버렸으면 좋겠다. 유실물 센터 쪽은 쳐다도 보지 않을 테니. 상자가 내 것이 아닌 것처럼 지낼 수만 있다면…. 


그런 환상 같은 돌풍을, 잊을 수 없는 바람을 실제로 만난 적이 있다. 

그건 난생처음 느껴보는 바람이었다. 그리고 이후에도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바람이었다.


장녀였던 나는 가저본 적 없던 언니나 오빠를 무척 좋아했다. 특히 외가의 여섯 살 많은 친척 언니를 친언니처럼 따르곤 했는데, 명절마다 친척 언니의 친할머니 댁까지 따라나섰을 정도였다. 너그러운 친척 언니는 어린 친척 동생의 질척임을 싫은 내색 하나 없이 어디든 손을 꼭 잡고 데려가 주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일면식도 없던 할머니의 댁을 방문하게 되었다.


이모부의 차를 타고 한참 만에 도착한 할머니 댁은 끝도 없이 펼쳐진 논밭 가운데에 있었다. 그 집은 교과서에서나 보던 초가집이었고 할머니는 초가집 마루에 홀로 앉아 가족들을 반겼다. 물에 젖은 지푸라기의 쿰쿰한 냄새나 까맣게만 보이는 부엌, 초등학생은 들어 올릴 수도 없는 무거운 솥뚜껑 등 모든 게 낯설었지만 친척 언니가 함께라 괜찮았다. 초가집 뒤로는 대나무밭이 펼쳐져 있었는데 낮에도 어스름해서 쉬이 들어가지 못했고, 초가집을 나서서 오른쪽으로는 내 키만 한 옥수수들이 빼곡하게 심긴 밭이었다.


이내 할 일이 없어진 나는 초가집 마당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이모와 이모부는 옥수수밭에 나가셨고, 할머니는 여전히 툇마루에 앉아 나물을 다듬고 있었다. 그 옆에서 친척 언니는 할머니를 돕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 어디선가 웅웅 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 소리가 점점 커지자 방 안에 있던 친척 오빠들이 문을 벌컥 열고 와르르 쏟아지듯 튀어나왔다.


“온다!”


그 말을 신호로 어마어마한 굉음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귀를 틀어막을 새도 없이 마당 전체를 드리우는 거대한 그림자를 보고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거대한 생물이 하얀 배를 보이며 하늘을 가로질렀다. 어디선가 본 것 같다. 그래, 어항 속에 죽어 있던 물고기의 배가 저렇게 푸르스름한 듯 하얗게 빛났는데. 하지만 물고기라기엔 너무나도 거대했다. 그렇다면… 그래, 고래. 고래를 눈으로 직접 본 적은 없었으므로, 만약 고래가 내 머리 위에서 헤엄친다면 이런 기분일까 싶기도 했다. 


하얀 배를 드러낸 거대한 그것은 엄청난 울음소리를 내며 거센 바람과 함께 순식간에 내 머리 위에 다다랐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자이로드롭을 탔을 때 물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의 바람이라고 해야 할까. 머리를 낚아챌 듯 가까이 다가온 그것 때문에 나는 허리와 고개를 한껏 숙였다. 아, 이러다 잡아먹힐지도 모르겠다. 


순식간이었다. 그것은 나를 지나고 초가집 지붕을 아슬아슬하게 지나쳐 대나무숲 너머로 사라졌다. 귀가 먹먹할 정도의 굉음과 바람을 몰고 온 괴물체가 비행기란 것을 깨달은 후에도 나는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서서 한동안 비행기의 엔진소리를 들었다. 이내 소리가 잦아들고, 비행기가 지나갔던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옥수수밭은 잔잔하게 흔들렸고, 초가지붕도 그대로였으며, 하늘은 더할 나위 없이 푸르고 맑았다. 가는귀먹었다는 할머니는 그저 담담히 나물을 다듬고 있었다.


가만히 서서 눈만 끔뻑끔뻑하는 나를 보며 친척 언니와 오빠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이곳은 공항과 가까운 곳이라 하루에도 몇 번씩 비행기가 아주 가까이 지나간다고 했다. 머리에 부딪힐 염려는 없으니 걱정 말라는 말과 함께. 그 말을 듣고서도 나는 비행기가 지나갈 때마다 자꾸만 고개를 숙였다.


비행기가 지나갈 때마다 모든 게 덜컹거리고 엄청나게 시끄러웠지만 신기하게도 할머니와 초가집, 그리고 그 주변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 풍경이 단단하면서도 무척 생경했다. 바람이 휘몰아쳐도 나는 변하지 않을 수 있을까. 거세게 머리카락을 헤집어놓는 바람과 비행기가 지나가고 나면, 나는 비행기가 지나가기 이전의 시간과 다른 시간에 놓인 사람처럼 낯설게 하늘을 바라보았다. 분명 바람이 머릿속을 헹구면서 무언가를 가져간 것 같은데 알 수가 없었다. 당연했다. 나는 비행기가 지나가기 이전의 사람이 아니니까.


바람에도 흔들리던 그 아이는, 마음을 헤집어놓는 ‘강렬한 경험’들을 숱하게 겪고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어른이 되었다. 무겁고 습한 기억의 상자들을 한구석에 쌓아놓고 언젠가 바람과 비행기가 나타나 머릿속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기를, 그리하여 상자가 분실되기를 기다리는 어른이 되었다.


몇 년 전,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옥수수 밭과 대나무밭, 초가집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수많은 돌풍이 스쳐간 후,
어떤 것들이 변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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