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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식토끼 Oct 05. 2024

전망 좋은 방

E. M. 포스터 <전망 좋은 방>


창문을 열면 늘 기차 소리가 보였다.



내 방은 작은 베란다가 붙어 있던 방이었다. 배수시설이 없어 나무 마룻바닥으로 되어 있고 활용하기에 애매하게 작은 곳이라 자연스레 나의 공간이 되었는데, 내 전용 베란다가 있다는 건 기대했던 것보다 더 즐거운 일이었다. 해가 유독 잘 들었던 그 베란다에 문이 달린 책꽂이를 두고 좋아하는 책과 CD를 가득 넣었다. 그곳에서 가끔 바닥에 이불을 깔고 누워 음악을 듣기도 했고, 쪼그려 앉아 책을 읽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면 간헐적으로 어디선가 땅이 울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실제로 진동이 느껴진 것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두껍고 무거운 소리. 그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다가 천천히 땅으로 꺼지듯 사라졌다. 



기차 소리였다.

그래, 내가 사는 곳은 늘 기찻길과 가까웠다. 특히 내 방은 베란다 창문을 열면 기찻길이 보일 정도로 가까웠다. 정확히 말하면 방음벽이 높게 있어서 기차가 바로 보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그 묵직한 중량감이 내 방을 훑고 지나가고는 했다.



그 소리는 여름에 제법 청량하게 들렸다.

내 방 침대는 베란다 맞은편 한가운데에 있었다. 베란다 창을 통해 햇볕이 가장 많이 내리쬐는데다가 작은 방 한 가운데에 있어서 좁은 방이 더 좁아 보이는 참 이상한 위치였지만 난 퍽 마음에 드는 배치였다. 여름방학이면 해가 쨍쨍 내리쬐는 한낮에도 나는 창문을 활짝 열고 그 침대에 엎드려 만화책을 읽었다. 종종 부는 여름바람에 옅은 분홍 조개가 드문드문 그려진 커튼이 휘날리며 내 발바닥을 간질이곤 했다. 그게 무척이나 산뜻했다. 기차는 커다란 들짐승이 고로롱 코를 고는 소리를 들려주곤 했다. 그 소리에 맞춰, 나는 햇볕 아래에서 더운 줄도 모르고 낮잠을 잤다.



겨울에 창문을 꽁꽁 닫고 있을 때면 기차 소리는 소극적이지만 운치 있게 들려왔다. 먼 곳에서 기타 베이스가 웅웅거리는 것 같기도 했고, 콘트라베이스를 길게 연주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내 방은 혼자만의 방이 아니었다. 기차 소리가 함께 지내는 공간이었다. 그 소리는 내 방에서 보이는 풍경이기도 했고, 반려음이기도 했고,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단골손님이기도 했고, 가끔은 나보다 더 오래 그 방에 고여 있던 주인이기도 했다.



한번은 숙제를 하다가 기차가 한 시간에 몇 대나 지나가는지 세어본 적이 있다. 책상에 앉아 샤프펜슬을 손에 쥐고 눈은 문제집을 향하고 있었지만 귀는 창가에 잔뜩 붙어 있었다. 반장 선거를 하듯 기차 소리가 들릴 때마다 문제집 한쪽 귀퉁이에 ‘바를 정’ 자를 표기했지만, 끝까지 ‘바를 정’ 자를 완성하지 못했다. 



가끔 기차 소리는 바른 소릴 하는 선도 부장 같기도 했다. 혼자만의 우울에 골몰해 있을 때면 묵직한 바퀴가 철길을 꾹꾹 누르며 지나가는 우직한 소리로 나를 흔들어 깨우기도 했다. 그 단단한 소리가 들리면 나도 모르게 깜짝 놀라 고개를 들고 창밖을 쳐다보고는 했다. 그리고 기차 소리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배웅하는 마음으로 한참 동안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나는 기차 소리에 기대고 있었다. 마음과 머릿속이 너무 조용해서, 지독한 침묵에 휩싸여 짓눌릴 것 같은 날이면 겨울에도 창문을 열었다. 



숱한 밤중 어느 한밤, 방에 딸린 작은 베란다에 나가 창문을 열고 고개를 길게 내밀었다. 달도 없이 캄캄했고 적막했다. 기찻길은 방음벽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그래, 새벽에는 기차도 다니지 않았다. 



어디선가 희미하게 기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덜컹, 덜컹, 쿠우우우웅, 덜컹, 덜컹. 나의 전망은 보이지 않지만 멀리 뻗어 있었다. 약하고 가늘고 보잘 것 없지만, 그래도. 소리가 가느다랗고 기다랗게 이어지는 그런 풍경이었다.





나를 위로하던 것은 무엇이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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