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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 빛 Jul 15. 2023

복덕방, 그 멀고도 험난한 꿈

2021년 10월 28일_미국에 온 지 819일째

운전면허를 장롱에 모셔둘 여유 따위는 없이 취득한 바로 다음날부터 뉴욕을 가로지르는 왕초보의 겁 없는 질주가 시작되었다.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채로 무작정 미국으로 출국했던 그때보다 나 홀로 운전은 더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미국 이민이야 실패했을 때 귀국하면 그만이지만 운전은 실패하면 정말로 죽을 수도 있기 때문에. 하지만 출, 퇴근 시간을 합쳐 매일 두 시간씩 절약이 되자 다시 대중교통을 이용하던 시절로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직 내비게이션까지 운전 중에 힐끗힐끗 볼 수 있는 능력은 되지 않았기에 구글지도를 켜 놓고 출발 전에 미리 길을 외우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새로 방문하는 레스토랑 화장실에 한 번 들어갔다 나오면 내 테이블이 어딘지도 찾지 못해 길을 헤매는 심각한 길치이다. 오죽하면 내 친구들이 "설빛 이를 찾으려면 땅에 물을 뿌려라. 물이 흘러가는 방향을 따라가면 설빛이가 나타난다."라고 나의 정처 없는 방향감을 묘사했을까. 천하의 길치에게 길을 외운다는 것은 그야말로 고문과도 같았지만 생존과 직결되어 있다 생각하고 백지장에 출근길을 막힘없이 그릴 수 있을 때까지 외우고 또 외웠다.



분명한 것은 운전은 나에게 더 큰 세상을 열어 주었다는 점이다. 더 이상 대중교통이 다니는 지역에만 한정되어 일자리를 구하지 않아도 되었기에 미국에서의 나의 세 번째 구직활동이 재개되었다. 이 기회에 언젠가는 꼭 해보고 싶었던 공인중개사에(Real Estate Agent) 도전해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첫 관문은 모든 일이 그래왔듯 자격증을 따는 것이었다.



이리저리 가격 비교를 하다가 가장 저렴했던 뉴욕 최대 한인 부동산 학교에 등록하여 주말마다 학창 시절로 돌아가 수업을 부지런히 들었다. (뉴욕 주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서는 공인된 학교에서 최소한 75시간의 수업을 이수해야 한다. 매 번 수업이 끝난 후 친필 서명을 남긴다. 주마다 필수 이수 시간이 다르다.)



수업시간을 다 채우고 자격증 시험을 신청할 때쯤 부동산 학교 교장님께서 공인중개사로 활동을 해 보지 않겠냐면서 자신이 차린 뉴욕 부동산 회사에 취직할 것을 먼저 권고해 왔다. 하지만 정작 제안을 받고 나니 선뜻 결정하기가 망설여졌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공인중개사는 자신이 거래한 매물 금액의 1%에서 많게는 4% 까지의 건 당 수수료를 받지 일반 직장인들처럼 연봉을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로 시장 상황에 따라, 자신의 능력치에 따라 수입이 천차만별일 수 있다.



고정된 주급을 꼬박꼬박 받아 오다가 예측불가능한 길을 선택해야 한다는 점에서 아직은 이직하기 어렵다고 사장님(Broker)에게 거절의사를 밝혔다. 뜻밖에도 그는 충분히 주급제로 계약할 수 있다고 나를 안심시켰다. 다만 다른 중개인(Agent)들과 다르게 매일 부동산회사에 출근하여 필요한 모든 서류 작업들을 도우는 조건이 붙었다. 주급도 지금 받는 주급보다 훨씬 더 많은 금액을 제시했고 현재의 일을 정리할 3주 간의 충분한 시간도 주어졌다.



세상에 이런 경사가?! 집에 와서 남편과 상의 후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미련 없이 그만뒀고 새로운 곳에서 하고 싶었던 중개인 일을 하면서 안정된 주급을 받을 것이라는 기쁨에 취해 둘이서 축하파티를 열었다.



공인중개사 시험을 무사히 통과하고 예정대로 부동산 회사에 취직하여 첫 2 주 동안은 부지런히 서류 정리 작업을 했다. 몇 달 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았던 것인지 2 주 동안은 서류 뭉치들 틈에서 헤매다가 서류정리가 완벽히 될 때까지 고객을 단 한 명도 상대해 보지 못했다.



그나저나 금요일마다 주급을 지급해 주기로 했는데 사장님은 지난주도 이번주도 감감무소식인 것이 아닌가. 뉴욕시내의 비싼 렌트비를 지불해야 하는데 도대체 언제 주급을 받는 것인지, 지난 한 달 동안 통장잔고를 깎아먹기만 했으니 체면이고 뭐고 사장님과 면담을 요청했다.



세상에 이런 기가 막힌 일이?! 사장님은 자기는 주급을 준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면서 "어느 부동산 회사가 중개인에게 그런 조건을 들이미냐, 자기는 그런 계약을 한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하늘이 무너질 소리를 했다.



이 부동산 회사로 취직하기 전, 지난 3 주 동안 그는 매일이다시피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었다. 정말 오는 것이 맞냐, 3 주 뒤부터 일하는 것이 맞냐, 오면 서류 정리 할 것들이 많으니 꼭 약속대로 3주 뒤에 와야 한다. 지금 다니는 회사는 확실히 그만뒀냐... 등 문자메시지는 하지 않았지만 그동안 전화로 오고 간 대화가 얼마인데 동일인물이 맞나 싶게 그는 차갑게 식은 표정으로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시치미를 뚝 떼는 것이 아닌가! 자기에게는 뭐라도 배워 가겠다고 돈을 내면서까지 서류정리를 도우려는 제자들이 수두룩하니 자기가 그런 제안을 했을 리가 없다는 눈뜨고 코 베어갈 소리를 마지막에 덧붙였다. 



구두계약이기는 하나, 만약 그런 약속들이 오고 가지 않았더라면 무엇하러 내가 잘 다니던 그전 회사를 덜컥 그만두고 이 멀리까지 불안한 운전을 해서 2주 동안 남의 회사 자원봉사를 하러 다녔겠는가. 맥박이 요동치고 눈앞이 핑핑 돌았다. 어떻게든 2주 동안 힘들게 일했던 보수만은 받아서 떠나려고 노동국에 신고를 하겠다 협박도 해보고, 제발 한 주 치만이라도 달라 애원도 해봤지만 그는 지난번 하숙집 검사의 어머니처럼 "증거 있냐. 절대 돈을 줄 수 없다."는 자태를 흔들림 없이 고수했다.



미국에 온 뒤, 남편의 가족분들과 같이 전혀 모르던 사람들로부터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사랑을 받아보기도 했지만, 하숙집 검사 어머니와 뉴욕최대 한인 부동산 사장과 같이 말도 안 되는 사기를 당하기도 했다. 이들은 다들 멀쩡한 직업을 가지고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라 굳이 자신의 명예까지 훼손시켜 가며 나 같은 사람들을 갈취하지 않아도 될 텐데 왜 이런 만행을 벌이는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내 사유로 이해하지는 못하겠지만 일단 이 부동산 회사를 벗어났다.



나를 뒤 따라 나온 회사 부사장님이 커피 한잔 같이 하고 떠나라면서 나와 함께 인근 카페로 향했다. 이 회사는 나 같은 서류미비자들을 상대로 종종 이런 사기를 한다고 허심탄회하게 알려주셨다. 몇 달 전에도 서류 정리가 필요할 때쯤 부동산 학교에서 수업을 듣던 서류미비자 한 명을 데려와서 한 달 동안 월급을 주지 않고 서류 정리만 시키다가 내보냈고 그전에도 이런 경력이 허다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서류미비자들은 회사를 상대로 고소를 진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이런 일들은 계속 벌어질 것이라고, 그러다 이 나라를 영원히 떠나는 서류미비자들로 부터 신고를 당하면 회사 이름을 바꿔 또다시 개업을 하므로 이미 이름을 바꾼 경력이 열 번 도 더 된다고 했다. (아니 저를 매일 보아왔으면서 그것을 이제 말해주시면 어떡하냐고요. )



나는 이런 일들이 실제로 일어난 다는 사실이, 그리고 그 피해자가 오늘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 누가 되어서도 안되지만 실제로 겪고 나니 정말로 소름이 돋았다.



부동산 중개인의 꿈은 오늘 잠시 무너졌지만 아직 내가 무너진 것은 아니다. 이렇게 악의적인 사람들도 잘 만 살아 가는데 내가 무너질 이유가 없다. 2 주 동안 인생경험을 했다 치고 나는 다시 구직 활동을 해야만 한다... 등 스스로 무너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운전대를 잡고 집으로 돌아왔다.



예기치 못한 사기를 또 당했으니 매우 속이 상하고 직업도 잃었으니 잠시 앞 길이 막막한 것은 사실이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을 것이다. 있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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