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동물이다
영화 '오펜하이머'에서 오펜하이머의 과거 연인인 진 태틀록은 그와 섹스를 하다 멈추게 된다. 그러던 중 오펜하이머는 그녀에게 자신이 융의 정신분석학을 배운 이유를 말하게 된다. 오펜하이머는 "교수를 독살하려고 했다. 그를 존경했기에."라고 하자, 태틀록은 말한다.
"섹스가 더 필요했던 거네."
오펜하이머는 그 이야기를 듣고 2년간 만난 상담치료사보다 명쾌하다고 말한다. 나도 공감한다. 상담치료사를 만나느니 섹스를 더 하는 게 좋을 것이다.
사람은 동물이다. 또한 무척이나 사회적 동물이다. 아무리 혼자 있기를 좋아한다고 해도 누군가와 소통을 원하며, 타인을 관찰한다. 그뿐일까? 사랑받기를 원한다. 또한 사랑하기를 원한다. 많은 사람들이 아이를 낳고 삶의 1순위가 아이로 바뀌는 것은 자신보다 사랑하는 존재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많은 부모들은 자신의 먹을 것, 입을 것보다 젖먹이 아이의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더 챙기고, 그들이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른 것 같다고 느꼈던 것이다.
인간은 사랑할 대상이 필요하고, 또한 사랑받아야 행복할 수 있다. 왜 많은 것을 이뤘음에도 공허하고, 불안하며,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낄까? 섹스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사랑을 나누는 진짜 섹스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많은 매춘부를 불러 정을 나눈다고 한들 그 안에 사랑이 없으니 그 끝은 머금은 담배 연기만큼이나 텁텁하다. 그들 손에 쥐어준 현찰 뭉치만큼의 환각을 사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 끝은 공허하니까. 바닷물을 마시며 갈증을 해소하려는 것과 같다. 쾌락을 주사기에 꽂아 뇌로 집어넣어도 도저히 충만한 삶이 될 수가 없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부재하기 때문에. 사랑받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삶이 괴롭다면 섹스가 필요한 게 아닌가 진지하게 물어봐야 한다. 만약 섹스도 충분하고, 사랑도 충분하다면, 그때부터는 다른 이유를 찾아봐야 한다. 내 삶의 꺼슬거리며 귀찮게 하는 게 무엇인지, 마치 옷에 조그만 실밥이 나와 신경을 긁는 것과 같이, 뭔가 채워지지 못하게 만들고 있을 테니 말이다.
반면 만약 당신의 삶이 돈이나 힘이나 시간이나 지위까지도 다 갖췄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허하다면, 아마도 당신은 제대로 된 섹스를 못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랑할 대상도, 사랑받지도 못하며 살고 있지는 않은가.
삶의 필요조건은 때로는 간단하다. 누구나 다 사람이 필요하고, 사랑이 필요하다.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나는 잠을 안 자도 건강해", "나는 물을 안 마셔도 건강해" 같은 멍청한 소리에 준한다. 더 많은 섹스를 하기를 바라며, 사랑받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