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식는 시간

by 김관우

<커피 식는 시간>


커피를 마신 건 그날 오후 다섯 시였다. 에스프레소 샷을 추가한 아메리카노. 늘 마시던 평범한 선택이었다. 다만 유난히도 그날따라, 커피 한 잔이 내 몸의 시간을 이토록 길게 붙잡아 둘 줄은 예상치 못했다.


새벽 세 시 반. 나는 여전히 깨어 있다. 창밖은 칠흑 같았고 어둠은 창문을 타고 방 안에 스며들었다.

잠을 청하려 애썼다. 불을 끄고 누워 눈을 감고 가만히 호흡을 세어보기도 했다. 그러나 머릿속은 무대 위 배우처럼 쉴 새 없이 속삭였다.

오래전의 부끄러웠던 기억, 다음날 잡힌 약속, 사랑하는 사람의 뒷모습, 하지 못했던 말들. 그런 것들이 들고일어나 나를 환하게 비췄다.


새벽은 나만의 것이 아닐 것이다. 불면 또한 나만의 것은 아니다. 어쩌면 세상 어딘가에서,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잠 못 이루고 있을지 모른다.

카페인 때문일 수도 있고 걱정 때문일 수도 있고 혹은 아무 이유 없이 깨어 있을 수도 있다. 새벽이 때로 두려운 것은 바로 그 이유 없음이다. 어떤 감정도 명확하지 않다. 두려움인지 외로움인지, 허무인지 그저 지독한 피로감인지, 그조차 모르겠다.


나는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왔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적막 속에 냉장고의 낮은 진동만이 공간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었다.

물을 마시며 창밖을 바라봤다. 가로등 불빛 아래, 작은 벌레 한 마리가 원을 그리고 있었다. 부질없고, 조용하며, 반복적인 움직임. 그 움직임은 지금의 나와 닮아 있었다. 깨어 있는 시간 속에서 내가 하는 일이란, 결국 한자리에 머물며 생각 속에 잠겨 허우적대는 것뿐이니까.


어디에도 가지 못하는 생각들. 무릎 위에 올려둔 손처럼 정지된 감정들.

내가 나를 붙들고 있는 시간. 새벽은 늘 그런 시간을 내게 건넨다. 감정을 감정이라 부르기에도 애매한, 그 어중간한 상태. 어쩌면 사람에게는 그런 모호함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뚜렷하지 않기에 마주할 수 있는 고통, 구체화되지 않아서 더 깊이 느껴지는 외로움.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들이야말로 가장 오래 마음에 남는다.


사람은 명명되지 않은 것을 사랑하게 된다. 나는 지금 그런 감정들과 함께 있다. 불면이라는 표면 아래 숨겨진, 내가 감히 이름 붙이지 못한 것들. 사라지지 않는 질문들.

예컨대 이런 것이다. 나는 왜 누군가를 미워하면서도 동시에 그를 그리워하게 되는 걸까. 왜 어떤 순간들은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그 의미가 선명해지는 걸까. 왜 나는 여전히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걸까.


이런 질문들은 해가 뜨면 언제 그랬냐는 듯 희미해진다. 빛은 모든 그림자를 지우고 다시 현실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낮은 정확하고, 새벽은 흐릿하다. 그래서 나는 새벽의 모호함이 좋다. 고통마저 선명하지 않아서 견딜 수 있기 때문이다.

흐릿한 상태로 감정을 더듬는 일은, 때로 정확히 살아가는 것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


새벽 네 시 십오 분. 몸이 조금씩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눈꺼풀도 아래로 내려앉기 시작했다.

커피 한 잔의 여운이 이렇게 오래간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그러나 나는 이 시간에 감사한다. 잠들지 못했기에, 나는 내 안에 숨어 있던 감정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 감정들은 낮의 소음 속에서는 들리지 않는다. 그것들은 오직 새벽이라는, 아주 조용하고 깊은 통로를 통해서만 내게 도착한다.


아마 이 밤이 지나면 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살아갈 것이다. 약속을 지키고, 사람들과 웃고, 또 습관처럼 커피를 마시면서.

그러나 언젠가 또 이런 밤이 찾아오겠지. 나도 모르게 내 안에 쌓인 것들이 넘쳐 다시 뜬눈으로 지새우게 되는 밤.

그때 나는 이 새벽을 떠올릴 것이다. 무언가를 잃거나 얻지 않아도, 그저 가만히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던 이 시간을.


그리고 그렇게, 다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전 06화익어가는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