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재성 Mar 27. 2016

MS JUTLANDIA

역사에 남은 배들

일찌기 영세중립을 선언했지만 2차대전 중 독일의 침략을 받았던 덴마크는 전후에도 영세중립 노선을 지키고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UN이 UN군을 결성하여 한국에 참전하게 되었을 때, 덴마크는 영세중립국임을 알리고 UN이 아닌 국제적십자사의 지휘를 받는 형식으로 병원선 한 척을 파견하기로 결정하게 된다. 이에 따라 1951년 1월23일, 칸 함머리치(Kai Hammerich) 준장의 지휘아래 승무원 97명과 의료진 91명으로 구성된 덴마크 의료지원단이 병원선 Jutlandia호에 몸을 싣고 한국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유틀란디아호는 애초 화객선(화물과 승객을 태우는 배)로 건조되었으나 한국전에는 병원선으로 참전했다.

1951년 3월 10일, 부산항에서 처음 의료지원을 시작하였는데 이는 모든 국가들을 통틀어 가장 먼저 도착하여 임무를 개시한 병원선이었다. 전선이 아닌 후방에 머물게되면서 애초의 목적과는 달라진 임무를 수행하게 되는데 당시 전쟁과 가난으로 인해 의료혜택에서 벗어나 있던 민간인들에 대한 진료를 우선하게 된 것이다. 여객선을 개조한 배다보니 애초 병원선으로 지어졌던 다른 병원선들에 비해 거주구역이 상대적으로 넓었고 의료진 수준도 상당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이후 중상자 위주의 부상병들이 주로 후송되기 시작한다. 공식적으로는 부상군인 치료에만 전념해야할 의무가 있었지만 의료진들은 배안의 부상자들과 배밖의 민간인들에 대한 지원 모두 아끼지 않았고 나중에는 부상군인이 오면 자리를 비워주는 조건으로 애초 민간인들에게 개방되지 않았던 병실을 개방하게 된다. 

2차 파견 : 로테르담에서 한국으로 향하던 유틀란디아호(1951.11)

모두 3차에 걸쳐서 파견된 유틀란디아호의 마지막 정박지는 당시까지는 최전선에 가까웠던 인천이었다. 인천항에 머물면서 전선으로부터 후송되어오는 부상병들의 치료에 전념을 다하면서도 여전히 민간인들에 대한 지원도 아끼지 않았는데 이로인해 UN과 간혹 마찰을 빚기도 하였으나 적십자사의 중재와 더 많은 책임을 떠안는 의료진의 희생정신에 힘입어 두 가지 임무를 모두 제대로 수행할 수 있었다. 1951년 3월 대한민국에 입항하여 전쟁이 끝난 이후인 1953년 10월 16일, 마침내 모든 임무를 마치고 귀국길에 오를 때까지 유틀란디아호가 치료했던 환자수는 24개국의 부상병 4,981명, 6,000여명의 민간인에 이르며 전쟁고아나 제대로 된 의료서비스를 받지 못한 어린이들에 대한 의료지원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수많은 중상자들이 후송되어 왔지만 선상에서 사망한 환자의 수는 29명에 불과하였는데 이는 한국전쟁 통틀어 병원선 중 부상자에 비하여 가장 적은 희생자를 낸 배로 기록되어 있다. 


전쟁 후, 유틀란디아호는 다시 여객선으로의 임무로 돌아갔으며 1964년 12월, 취항을 마치고, 1965년 1월 14일 스페인의 빌바오에서 해체되며 그 생애를 마쳤다. 

1990년 6월 15일, 코펜하겐에 건립된 유틀란디아호 참전 기념비

전후 잊혀져있던 유틀란디아호의 희생정신은 유틀란디아호의 승무원이었던 킴 라르센이라는 가수가 1986년, 'Jutlandia'라는 곡을 발표하면서 다시 수면으로 떠올랐는데 이를 기념하여 대한민국정부와 덴마크 정부는 1990년 코펜하겐에 병원 유틀란디아호 한국전 참전기념비를 세우고 그 정신을 되새기게 되었다. 


부상병을 위한 병원선으로 파견되었으나 더 수고롭고 고달픈 길을 택하여 민간인들에게 까지 그 의술을 아낌없이 나누어주었던 병원선 유틀란디아와, 그 승조원들의 희생정신은 우리로써도 절대로 잊어서는 안될 큰 빚일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