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구성원이 집에 함께 있으면서도 내 눈에 보이지 않으면 무엇을 하고 있는지 확인을 하는 버릇이 있는데, 이제야 이런 내 행동이 이해가 됐다. 가족이 내 통제 안에 있어야 불안하지 않았던 것이다. 불안도가 높은 나는 수시로 확인했고, 가족이 내 통제 밖에 있으면 불안했다. 또한 나의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으면 몹시 불쾌하고 화가 났다. 여기서 행동은 나의 행동뿐만 아니라 나와 가장 가까운 가족을 포함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가족에게, 통제되지 않는 가족에게 늘 화가 나 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나의 화가 나의 불안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이 앎으로부터 나는 알아차림을 시작했다. 나를 알아간다는 것, 나를 객관화하는 일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과정을 통해서 나는 내가 어려워했던 감정을 조금씩 다루기 시작했다.
평소 나는 집에서 클래식이나 연주 음악을 항상 듣고 있다. 가사가 있는 대중가요나 팝송을 남편이 선곡하면 나는 가사가 없는 음악으로 바꿔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특정 음악을 선호해서 듣는 것이 아니다. 나에게 들려오는 소리 중 가사는 내가 해석해야 하는 것이 되고 이는 나를 민감하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라 가사가 없는 곡을 찾아 들은 것이다. 나는 소리가 나의 불안도를 높인다는 사실을 내가 무의식적으로 가사가 없는 음악만 듣고 있다는 사실에서 알아차렸다. 그리고 일상 소음에 굉장히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사실을 알고, 우리 집 아이들이 떠들거나 싸우거나, 울거나 하는 소리가 나기 시작하면 나는 아이들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엄마가 소리에 민감한 사람이야. 그러니 너희 방에서 조용히 싸워. 엄마에게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해 줘. 계속 들린다면 엄마가 화가 날 것 같아."
이 과정에서 놀라운 것은 나와 비슷한 구석이 많은 둘째가 나와 같이 감정을 다루는 과정을 배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자기감정을 조절하지 못해서 어려서부터 아무 데나 누워버리거나 우는 것으로 감정을 표현했다. 그리고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짜증과 화를 내기 시작했다. 우린 서로의 거울이 되어 서로의 감정이 투척될 때마다 성찰했다.
"둘째야, 가족에게 감정을 투척하지 마,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거야."
"엄마, 저는 어려워요. 어떻게 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엄마가 요즘 화난다고 화를 내지 않고 어떻게 말하지?"
"화가 나려고 하니깐 피해라고 해요."
"그래, 그럼 너는 화가 나면 엄마에게 와서 말로 표현해 줘. '엄마 화가 나요.' 그리고 엄마 이불속에 쏙 들어와서 감정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리자."
나는 둘째를 보며 나를 보고, 둘째는 나를 보며 자신도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게 우리는 가정 속에서 함께 성장해 나갔다.
나는 통제욕구가 강한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이해할 수 없는 나의 '화남'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화가 나는 상황을 가족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지금 이 순간 화가 나. 왜냐하면, 내 생각과 달리 당신이 행동하기 때문이야. 이건 내 통제 욕구야. 그래서 내가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 이런 나를 이해해 줬으면 좋겠어."
처음에는 단순하게 나의 통제 욕구가 불안도를 높이며 화를 부른다고 표현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화남'이 시작되는 시점부터 그 과정까지 사고구술하게 되자 그런 나의 노력이 가상해서인지, 나를 객관화해서 인지 남편은 나를 이해하고 같이 화를 내지 않고 나를 도와주려고 애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