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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무 Jul 13. 2024

'사생활의 천재들', 정혜윤 (진로독서)

혼자가 아닌 함께 하는 사회

김산하ㅡ인간의 서식지에 대해서


하나의 생명은 그 서식지에 대한 사랑의 표현

  움직이는 게 있으면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거야말로 생물학적 인지 메커니즘의 오용입니다. 스마트폰의 동작은 서랍 열고 닫기 같은 겁니다. 방 안에 앉았다가 괜히 일어나서 한번 옷장 서랍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도 반복적으로요. 이런 인조적인 인터페스이스에 익숙하지 않은 것이 저는 제 경제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것에 사로잡혀있지 않거나 자기 것을 갖고 있지 않아야 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생물은 매일매일 인풋이 필요합니다.(중략) 생물에는 자연스러운 흐름이란 게 있습니다. 들어가고 나오고 또 채워지고 비워지고 정체되지 않는 자연스러운 흐름이 아이디어의 원천인 셈이고, 이 흐름이 표현의 의지를 키우고 생명력이 됩니다.


 저는 전문가라기보다는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긴팔원숭이를 쫓아다녔던 그 지옥 같은 고생은 표현이 불가능합니다. 거칠고 드넓은 산에 몇 달이고 나 홀로 있습니다. 내가 쫓을 긴팔원숭이는 저 위에서 날아다닙니다. 저는 저 높은 곳을 보면서 홀로 뛰고, 뛰고 또 뜁니다. 집에 돌아오면 땀, 피, 흙이라는 3대 자연 물질이 제 몸에 묻어있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잠자리 위에 뻗어서 '이걸 누가 알아줄까?'란 서글픈 생각도 합니다. 그러나 그때 절 도왔던 것은 오히려 제게 아무런 미래 계획이 없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저는 오로지 그 지역에서만 해볼 수 있는 일, 그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거기 가서 그것을 본 사람들이 결국은 그 지역을 좀 더 잘 사랑하게 되길 바랍니다.

 모든 서식지는 오로지 거기서만 살 수 있는 것들을 품고 있습니다. 다른 어떤 곳에서도 그곳에서처럼 살 수는 없는 것들을 품고 있습니다. 모든 생명체는 서식지에 대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사소하지만 영원한 의미를 지닌 방식으로.

 우리 식당은 평등한 곳입니다. 시장이든 판사든 내겐 막노동꾼과 똑같은 4천 원짜리 손님입니다. 밥값이 싸니까 먼저 온 사람은 뒤에 온 사람 밥값을 내줄 수 있습니다. '오늘은 내가 낼게.' 하고 나갑니다. 그럼 밥을 얻어먹은 사람은 뒷사람 것을 내줍니다. '나는 아까 다른 분이 내줬으니 내가 네 걸 낼게.' 이러면서요. 저는 그렇게 앞사람이 뒷사람 밥값을 내주는 것이 연달아 일곱 차례까지 이어지는 것을 봤습니다.


 서식지를 찾는다는 것은 내가 뿌리째 옮겨간다는 것


조성주-보는 것에 대해서


 아프면 소리 질러라, 같이 소리 지르자!

 군대에서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탐구하다가 결국 나는 슬픈 사람들에게 다가가 말을 거는 사람이란 데에 생각이 미쳤습니다. 저의 가장 자연스러운 행동들은 바로 그 부분에서 나왔던 겁니다. 그래서 슬픈 사람들을 위해서 사회구조를 바꾸는 일을 하는 게 제일 좋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디든 다녔습니다. 몇 명이 있두 다녔습니다. 청년 학생 가리지 않고 만났습니다. 2009년 겨울 무렵 반년을 그렇게 살았습니다. 우리 문제를 공론화하자, 정책이 만들어지게 하자, 그렇게 말하고 다녔습니다.

 반응은 굉장히 뜨거웠냐고요? 아니요, 반대로 아주 회의적이었습니다. 역시 가장 많이 들은 말은 "되겠어?"였습니다. 지방대 학생일수록 '내 탓이야'가 심합니다. '내가 노력이 부족해서 취업이 안 되는 거야. 내가 지방대 온 탓에 취업이 안 되는 거야.'(중략)

 오히려 일류대 나온 학생들은 이렇게 반응합니다. '내가 소위 일류대학을 나왔는데도 취업도 못하는 건 비합리적인 거아냐?뭔가 문제가 있는 거 아냐?"


 제 관심은 '인간은 이기적 동물이다.'라는 명제를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청년유니온 하면서 '인간은 정말 이기적 동물인가?' 의아했던 적이 많았습니다.(중략)

 제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름도 모르는 누군가의 아픔에 공감하고 연대하는 사람들입니다. "눈 오는 날이니 피자 안전하게 갖다 주세요." 이런 것이 제겐 공감이고 연대입니다. 저는 그것을 제 눈으로 봐버렸습니다. 제 눈에 새겨져있습니다.


 단지 청춘이니까 아픈 것이 아니다.

 이렇게 되면 가장 큰 문제는 아픔을 불러오는 근본적인 원인엔 무관심하게 된다는 점이에요. 일시적인 곤경, 개인의 불운과 자질 부족, 의지박약이라 이름 붙어진 것들이 은폐하누 것들은 분명히 있습니다.


 미루기는 우리를 이중적으로 아프게 합니다. 현재에 우리가 누려야 할 행복을 상실하게 한다누 점에서, 그리고 미래의 행복을 이루기 어렵게 만드는 구조를 그대로 둔다누 점에서.


엄기호-말하기와 듣기에 대해서


 고백에서 증언으로 나아가라.

 이런 충만한 시간과 그 시간 안에 농축된 이야기가 경험입니다. 이때 시간은 잠시 정지되고 재정의됩니다. 이 시간의 핵심은 미래를 향한 유예가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의 충만함입니다. 이런 시간엔 뭔가와의 만남이 있습니다.


 실시간 정보를 중요하게 여기면서 사라지게 된 것이 바로 공감입니다. 사회가 개인의 삶을 보호하지 못할 때 허무함을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한 힘은 공감에서 나옵니다. 너도 나도 깊이 상처받았다는 공감 말입니다. 이 상처가 나만의 상처가 아니란 걸 알 때 우리 눈에 시대가 보입니다. 그때 우린 우울증이나 자기 비하, 자기 연민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저는 네 이야기를 하되 그 안에서 동시대성을 찾아보라고 말합니다.


 네가 누구인지는, 네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지 않는지에 달려있다.

 엄기호는 인간은 존엄한 것이 아니라 존엄해지려고 하기 때문에 존엄하다고 말했습니다. 삶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의미로 가득 차있기 때문에 의미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의미를 찾으려 하는 한에서만 의미 있을 것입니다.

 철저하게 사회적 기대에 갇혀있으면서도 희망은 없다고 말하는 사람, 자아에 갇혀서 자기 자신 외에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후략)


 사랑의 언어만이 지속가능한 힘을 준다.

 우리는 무언가를 위해서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삶을  받칩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혹은 사랑하는 무언가를 위해 삶을 바치는데 그것이 나를 만들고 빚고 키웁니다. 내 삶은 거기에 빚집니다.

 사랑에는 나만의 드라마가 없습니다. 대신 우리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너와 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시작도 끝도 없습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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