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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여우 Oct 31. 2024

텔레비전 앞에 있는 어린이 여러분 외 7편

푸른여우, 하루하나 : 2024년 10월

  머리말


   생일을 맞아 한 달을 돌이켜 보면서, 아니, 열 달을 돌이켜 보면서 자기 자신에게 가장 많이 한 말이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미리미리 하자' 였습니다. 이 말을 열 달 동안 했다는 것은 무슨 의미냐 하면, 결국 미리미리 안 했다는 뜻입니다. 나 원 참.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이번 달이 가기 전에 이렇게 써둔 것들을 모아서 올릴 수 있었다는 것.

   이번에 <천수의 사쿠나히메>라는 게임을 무척 재밌게 하는 바람에, 한평생 관심 가져 본 적 없는 벼농사를 게임에서 새벽까지 짓곤 했어요. 그러던 중 문득 생각이 든 게, 우리 부모님도 옛날엔 벼농사를 지으셨을 텐데, 그 일에 대해서는 한 번도 여쭤본 적이 없더라구요. 그래서 생일 전날 집에 내려가서는, 벼농사를 키워드로 부모님의 과거 이야기를 들으며 나이를 먹었어요. 나이를 먹는 일은 항상 즐겁지 않은 일입니다만, 귀한 이야기를 더 늦지 않은 시점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도 한번 여쭤보세요. 진귀하고 소중한 이야기들을 많이 들려주실지도 모릅니다.

   (8가지 이야기를 준비했습니다.)




  유령 상담


    원드라이브에 칠 년 전에 저장한 음성이 남아 있기에 오랜만에 틀어보았다. 그 당시 나는 상담사로 일했고, 그때 허가를 받고 남긴 녹취록이었다. 왜 녹취를 해야 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제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친구가 처음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요.

   그리고 내가 물었었다.

   -뭐라고 했는데요?

   -'결국에?' 라고.







  25시 참숯구이집

 

   가게를 닫기까지 앞으로 10분 정도 남았다. 자리에는 아직 아저씨 한 분이 남아 계셨는데, 술을 잔뜩 드셨는지 테이블에 머리를 묻고 계셨다. 아저씨, 아저씨 이제 집에 가셔야 돼요. 내가 그 아저씨를 깨우자 아저씨는 술을 마저 비우시고 갑작스레 하소연하듯 말을 꺼내셨다.

   "항상 그래, 항상."

   "네?"

   "항상 그런 생각을 했어요. 24시 편의점이면 24시간 해야 되는 거 아닌가. 근데 어느 날 새벽에 편의점을 가려니까, 3시부터 3시 반까지 브레이크 타임이라는 거예요, 추워 죽겠는데. 아니 그러면 24시 편의점이 아니라 23시 30분 편의점 아닌가? 그래서 그걸 따졌어요. 그랬더니 거기 좀 껄렁대는 점원이 그러는 거예요. 우리는 GS25라 24시가 아니라 25시 동안 영업한다고 말이에요. 아저씨 논리대로면 우리는 24시 30분 일한 거니까 괜찮다고. 무슨 논리가 그래. 말장난에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오더라구요.

   근데 애초에 세상에 25시라는 게 어딨어요. 하루는 24시간으로 정해져 있는데, 그러면 25시 감자탕집, 25시 찜질방은, 하루를 48시간으로 보고 25시간 일한 다음 23시간 쉬겠다는 뜻인가? 근데 내가 지켜보니까 그러지는 않더라구요. 항상 열려 있단 말이에요. 그리고 저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혹시 어느 가게는 하루가 24시인 세상의 규율을 깨고 25시 동안 운영을 하는 게 아닐까.

   그날부터 저는 밤에 일이 끝나면 간판에 25시라고 써진 가게들을 찾아다니면서, 늦은 저녁을 먹는 게 버릇이 되었어요. 그리고 24시를 기다렸어요. 24시가 지나면, 무언가 새로운 시간의 틈 같은 게 열리는 가게가 이 세상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싶어 가지고. 근데 여태 발견 못했어요. 여기도 마찬가지야. 세상에 25시는 없는 거야. 우리는 항상 영업해요, 라는 말을 과장해서 쓰느라고 그냥 25시라고 하는 거예요. 그거 다, 그거 다 특검해야 돼요. 사실이랑 다른 과장 광고잖아요."

   할 짓 드럽게 없는 아저씨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접시를 정리하면서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런 논리면 저희는 특검 안 받아도 되겠네요."

   아저씨가 말 뜻을 이해 못했다는 듯이 나를 보며 물었다.

   "예?"

   "휴대폰 한번 봐보세요."

   아저씨는 휴대폰을 켰다. 휴대폰 화면에는 분명 현재 시각 '24시 58분'이라고 찍혀 있었다. 날짜는 당연히 바뀌지 않았다. 아저씨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이상한 아저씨다. 하루가 왜 24시야. 하루는 25시간으로 정해져 있고, 그래서 4일은 100시간으로 숫자가 딱 떨어지는 건데. 24라니 어중간한 수치잖아. 이렇게 가끔 자기 세계에만 갇혀 계시는 분들이 우리 가게에 오시는데, 그럴 때마다 대처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지구가 평평하다고 주장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한로寒露


   "저걸 머리에 꽂아. 그러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무도 널 해치지 못할 거야."

   다 죽어가는 나뭇가지에 빨간 수유 열매 몇 개가 매달려 있었다. 정작 그 사실을 알려준 아이는 나무에 가까이 가려 하지 않았다. 그걸 보고 나서 나는 아이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곳으로 잘못 들어온 나를, 이승으로 갈 수 있게 끝까지 도와준 이 아이의 정체를. 나는 머뭇거렸다.

   "왜 멍하니 그래. 빨리 안 가면 영원히 여기에 있어야 될 수도 있어. 집에 돌아가서 엄마 아빠랑 다시 만나야지."

   "너는?"

   "나? 나는. 에헤, 너 따라서 곧장 달려갈게. 나 달리기 잘하는 거 알잖아."

   저 멀리 검은 하늘에서 새들이 날아오고 있었다. 아직 생명이 남아 있는 영혼을 쪼아 먹기 위해. 그러나 그 새들이 노리는 건 나뿐이었다. 서리가 내리는 추운 날씨여서 새들은 더더욱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는 듯했다. 거무칙칙한 세상에서 새들의 그림자도 검고 흉측했다. 나무에 매달린 수유 열매만이 희미하게 빨간빛을 내뿜고 있었다. 내가 말했다.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약속해."

   뒤를 돌아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 아이는 여전히 거기에 있었다. 아이는 말을 고르는 듯 침묵하다가, 이윽고 조금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말했잖아. 난 약속 같은 거 못해."

   어쩔 수 없다는 말투였다.

   "하지만, 하지만 있잖아. 날씨가 추워지면 비가 눈이 되는 것처럼, 나도 어떤 형태로든 변해서 너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런 거, 그냥 궤변이야."

   "거짓말이 아니야. 내일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잖아? 그러니까 너는, 그 내일에 내가 있을 거라고, 그렇게 믿어주면 돼."

   어느새 내 귓가에 수유 열매가 닿았다. 그것을 만진 너의 손이 가루가 되어 사라진 것을 나는 보고도 못 본 체했다. 대신 나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너도 믿어줘. 너의 내일에도 내가 있을 거라고. 꼭이야."

   그 말에 네가 끄덕였는지는 알 수 없다. 내일 봐, 라고 말하고 집으로 달려가던 친구들처럼, 나는 빛을 향해 달렸다. 달려 나가는 나를 보고 날아오던 새들이 이윽고 붉은 수유 열매를 보고는, 피야, 피야, 이미 누가 파먹었나 보군, 하고 혀를 차며 쏜살같이 다른 방향으로 돌아갔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다리가 점점 아파왔다.






  짜게 먹는 사람들


   그는 유독 그날 점심부터 이상하다고 느꼈다. 점심으로 나온 쌀국수는 평소보다도 물의 양이 많은 듯했다. 그러나 만약 실제로 양이 많더라도 좋아할 일은 아니었다. 싱거웠다. 한 숟가락을 떠먹고 나서 그는 묘하게 싱겁다고 느꼈다. 아주머니, 저번보다 쌀국수가 싱거운 거 같은데요. 그럴 리가 없다는 말이 돌아왔다. 누군가가 일부러 물을 넣은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왜일까. 에이, 착각이겠지, 혹시 몰라 주위를 둘러보고, 미처 지우지 못한 카톡을 다시 한번 들여다봤다. 아무 일도 없었다. 쌀국수의 국물은 싱거웠다.

   일이 끝나고 늦은 저녁을 분식집에서 때웠다. 김밥과 라면을 시켰다. 잠시 뒤 아주머니가 떡라면을 내오셨다. 또다. 또 평소보다 물의 양이 많아 보였다.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한 젓가락을 먹었다. 싱거웠다. 그는 또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리 밑도 한번 살펴보았다. 뭐 찾으세요? 아주머니가 말씀하셨고, 그는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고 둘러댔다.

   그런 일들이 며칠을 이어졌다. 먹는 음식은 늘 싱겁고, 맛은 잘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일이 반복되자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자신이 먹는 음식에 몰래 물을 넣어놓는 상상을 했다. 그것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불특정 다수다. 지나가는 사람이 자신을 쳐다보는 것처럼 느낄 때마다 그는 잘못한 사람들이 으레 그러듯 고개를 숙였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는 처음에는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고개를 숙이며 다니는 동안에도 그 시선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듯했다. 스트레스가 쌓였다. 쌓인 스트레스가 어느새 폭발하면, 뭐야, 하고 허공에 소리를 치는 난폭한 일로 이어지곤 했다.

   며칠 뒤 저녁이었다. 그는 찌개를 시켰다. 그리고 여전히 물이 많아 보이는 음식을 보고, 이내 폭발하여 젓가락을 던졌다. 스테인리스로 된 젓가락이 날카로운 금속음을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는 전화를 걸었다. 상대방이 받자 난폭한 말이 쏟아졌다.

   "너지? 니가 내 음식에 자꾸 물 타는 거지? 야, 할 말이 있으면 쪼잔하게 이러지 말고 직접 나와서 말해. 너 지금 가게에 있지. 어디야. 어디냐고. 진짜 웃겨서 말이 안 나오네. 야, 바람 한번 핀 거 가지고 언제까지 사람 괴롭힐 거야!"

   그러자 상대방은 잠시 동안 침묵을 지킨 뒤에 아주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저는 지금 당신 때문에 외국에 나가 있고요. 혹시 의심 가시면 출입국사실증명서 보내드릴 테니까 참고해 보세요. 음식에 물을 탔는지 의심하기 전에 본인이 짜게 드시는지 성찰해 보는 건 어떠실까요? 자극적인 거 좋아하시잖아요. 그렇게 자극적인 걸 좋아하셔서 밤에 다른 사람 만나서 사람을 등신 만드시고는, 이제는 또 이렇게 시종일관 남 탓을 하시니, 참 보기에 민망합니다. 아무쪼록 이제부터는 적당히 싱겁게 사시고, 짜게 드시다가 일찍 뒤지지는 마세요. 차단할게요. 다시 연락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시상 소감


   "자리를 빛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아마 오늘은 저에게 있어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날이 아닐까 싶습니다. 시상식을 앞두고 어젯밤, 저는 우주가 멸망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좀 있으면 시간이라는 개념이 완전히 사라지고, 세상은 영원한 침묵을 맞이할 참이었습니다. 꿈에서 깨었을 때 저는, 살아생전에는 겪지도 못할 그 일을, 우주의 멸망을 걱정하며 가슴을 졸였습니다. 가장 행복한 때에 꾼 꿈이었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경험이 있으실까요. 유치원생 때 자기 전에 천장을 바라보면서, 내일 갑자기 지구가 멸망하면 어쩌나 싶어 엉엉 울었던 경험 말입니다. 이 나이를 먹고 다시금 어릴 적에나 했던 그런 걱정을 하면서, 저는 왜 가장 행복한 날 그런 꿈을 꾸었을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두 가지 결론을 얻었습니다. 첫째는, 우주의 멸망이 고민으로 여겨질 정도로 현재 저의 삶은 무척 평화로운 상태라는 점. 둘째는, 그런 평화로운 상태에서 우주의 멸망을 걱정할 정도로 인간은 스스로 걱정거리를 찾아 헤매는 존재라는 점. 불안이 인간의 본성이라면, 우리는 좀 더, 태평한 마음으로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다시 한번, 귀중한 상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생일 권한


   공연이 끝나고 우리는 기타를 등에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저만치 보이는 밤하늘이 갑자기 밝아지더니, 펑, 펑하고 불꽃놀이가 수를 놓기 시작했다. 우리는 놀란 표정으로 서로잠시 쳐다보다가, 손을 붙잡고 아파트 8층으로 올랐다. 복도에는 이미 여러 사람들이 나와 불꽃놀이를 구경하고 있었다. 우리는 모자를 깊이 눌러쓴 채, 난간에 기대어 조용히 그것을 감상했다. 내가 은근슬쩍 물었다.

   "아침에 무슨 소원 빌었어?"

   오늘 아침, 졸린 눈으로 촛불을 한참  끄고 가만히 있었던 너의 모습을 떠올리며 나는 물었다.

   "그거 말하면 안 된. 들키면 신이 안 들어주신댔어."

   "몰래 말하면 되지. 나한테만 들리게."

   그렇게 나는 장난스레 귀를 갖다 댔다. 너는 어깨끈을 고쳐 매고는, 나에게만 들리는 작은 목소리로 얘기했다.

   "진짜 사랑할 때만, 사랑한다고 할 수 있게 해주세요, 라고."

   "그거 좀 어렵다. 우리 맨날 사랑 안 하는데 사랑한다하잖아."

    아까 부른 노래에사랑이란 단어가 얼마나 많이 나왔던. 무대에 같이 올랐던 너도 그 사실을 떠올리고 키득거렸다. 아끼고 싶은 말인데, 하고 우리는 안타까워하며 잠시 웃었다. 그러고 나서 나는,  '또?' 하고 물었다. 너는 아까보다 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슬퍼해야 할 때만, 슬퍼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주세요, 라고."

    불꽃이 파바밧, 하고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소원이 어디서 왔는지 짐작이 갔기에, 그렇기에 더더욱, 아무 말도 못 하고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단지 너에게 말했다.

    "그거 쉽네. 그 대신 기뻐야 할 때는 왕창 기뻐해야 해. 알았지?"

    "그건 아까 소원으로 안 빌었는데 어떡?"

    "지금 추가해 그냥. 아직 열두 시 안 지났잖아."

   그리고 나는 양손을 오므려서 입에 댄 채로, 그래도 부끄러운 마음에 적당한 목소리로 외쳤다. 늦어서 죄송한데 얘 소원 하나만 더 들어주세요, 괜찮죠? 하고. 불꽃놀이는 아직 계속되고 있었다.






  텔레비전 앞에 있는 어린이 여러분


   만취했다. 결혼기념일이라고 비싼 걸 먹으러 나간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왜 우리는 지금 허름한 포장마차에서 간이 테이블에 사이좋게 머리를 박고 있을까? 그래, 기억이 났다. 안 먹던 음식을 먹은 터라 속이 부대껴서, 돌아오는 길에 포장마차를 발견하고 조금만 마시자고 들어갔었다. 나는 분명 집에 그냥 가자고 했다. 이 점을 확실히 해두고 싶다.

   거기는 옛날에 우리 둘 다 배우로 활동할 때, 촬영을 끝내고 자주 갔던 포장마차였다. 촬영하면서 받는 스트레스를 그렇게라도 풀지 않으면 우리는 버틸 수가 없었다. 우리는 추억에 젖고 있다가 어쩌다 보니 술을 연신 들이켰다. 안주가 맛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아마도. 그렇게 서로 술이 연신 들어가자 서운했던 일 있으면 얘기하자고 이야기가 나왔다. 미리 약속을 몇 개 했다. 첫째, 오늘 나온 얘기는 뒤끝 없이 오늘 안에 잊어버리기. 둘째, 얘기할 때는 손을 무릎 위에 놓기 (젓가락을 비롯해 흉기가 될 수 있는 물건 들지 않기). 어찌어찌 둘 다 지켰다. 실제로 아까까지 들었던 이야기들이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고개를 든 아내 얼굴은 여전히 빨갰다. 아내가 졸린 눈으로 말했다. 따릉이 타고 가자. 따릉이? 나는 귀를 의심했다. 지금 바로. 나우. 나는 여느 때 그랬듯 손목을 붙잡혀서 겨우 계산을 하고는 밖으로 이끌렸다. 음주 따릉이는 불법이었다. 그러나 어느새 아내는 인증까지 끝내고 페달에 발을 올렸다. 나 먼저 간다. 알아서 와. 진짜로 가기에 어쩔 수 없이 나도 따릉이를 타고 따라갔다. 우리는 연애 시절에도 안 했던 자전거 데이트를 하며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분명히 봤다. 옆 도로에서 달리던 경찰차 창문 너머로, 경찰 아저씨가 손을 들어 멈추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을.

   "멈추라는데! 어떡해!"

   맞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었기에, 나는 큰 목소리로 앞에 가는 아내에게 물었다. 아내는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지 격앙된 목소리로 그렇게 외쳤다.

   "변신하는 거야! 지금 바로!"

   아내는 소싯적에 애들 대상으로 만든 판타지 드라마의 주인공을 맡았었다.

   "나 변신 같은 거 못해! 이 나이에 어떻게 해!"

   그건 당연한 말임에도, 그 말을 하는 나는 자기 자신이 무척 초라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러자 아내가 북돋아주듯 말했다.

   "아냐! 할 수 있어! 자! 텔레비전 앞에 있는 너희들! 우리에게 힘을 실어줘!"

   다 큰 어른이 술에 취해 아이들로부터 힘을 뜯어내려 하고 있었다. 이런 장면은 아동 드라마는 물론이고 텔레비전으로도 못 내보낸다. 그래도 나는 어딘가에서 힘을 받기는 한 모양이었다. 거리가 점점 좁혀졌다. 고마워 모두들, 덕분에 공무집행방해로 여겨지기 전에 저 친구를 막을 수 있겠어. 아름다운 미래 밝은 내일이 기다리고 있기를 바랐다.






 상강霜降


   뒷산에는 단풍이 울긋불긋 물들어 있었다. 학생 때 얼마나 많이 이 산에 올랐는지 모른다. 불안과 걱정이 있을 때마다 마음을 다잡고 싶어서 이곳에 올랐다. 이름 없는 정자가 산 중턱에 놓여 있었다. 주말에 이따금 등산객들이 쉬어 가는 경우를 제외하면 정자는 거의 비어 있었기에, 나는 자주 거기에 앉아서 시간을 때우곤 했다.

   내가 정자에 앉아 있으면 어느새 산 위로부터 흰 안개가 뻗어 나와 시야를 덮었다. 그렇기에 나는 나름 도시에 살고 있었음에도, 안개가 세상을 뒤덮을 것처럼 피어오르는 일이 그다지 낯설지 않았다. 차디찬 계절에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흰 안개는, 신기하게도 그다지 차갑지 않았다. 안갯속에 있으면 자신의 몸이 점점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기분 좋게 떠도는 상상을 하면, 이때까지의 불안과 걱정도 사라지는 듯했다.

   이따금 안개에게 공감 능력이 있는지 궁금해했다. 내 불안이 잠재워지는 시간과 안개가 물러가는 시간이 거의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게 우연인지 필연인지, 설령 내가 심리학과라도 알 수는 없었다. 내가 상담해 주는 사람 심리도 솔직히 잘 모르겠는데, 안개의 심리까지 알 리가 없었다. 다만 나는 그걸 필연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세상 어딘가에, 초자연적인 무언가가 자신을 지켜주고 있다고 믿고 싶었다. 그래서 안개에 휩싸여 있을 때에는, 멋대로 안개에게 말을 걸진 않았다.

   겨울이 되기 전에 나는 고향으로 다시 돌아왔다. 나이가 들어서 산에 오르는 것도 벅찬 상황에서 어찌어찌 기억을 더듬어 그 정자를 찾았다. 기억보다는 조금 옅게 느껴졌지만, 여전히 희뿌연 안개가 정자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나는 잔을 두 개 꺼내서는, 국화주를 조심스럽게 따르며 말했다. 이제 괜찮아. 이제야 안개에게 말을 걸었다. 앞으로 살면서 괜찮지 않은 일들도 많겠지만, 그래서 무너질 것 같은 때도 많겠지만, 그래도 괜찮아. 누구든 알아들을 수 있게, 자신도 알아들을 수 있게, 천천히 말했다. 그러니 이제 쉬어. 산짐승들은 이 시기가 되면 겨울잠에 든다고 했다. 봄, 여름, 가울에 느낀 피로를 풀 기회가 찾아오는 것이었다. 안개도 겨울잠을 자는지는 몰랐다. 다만 나는 모든 일에는 충분한 휴식이 필요하다고 느꼈을 뿐이다.

   집으로 가겠다고 마음을 먹자 또 안개는 내 마음을 알았는지 어느새 저만치로 사라져 있었다. 따뜻한 봄에 다시 만나자. 그렇게 살짝 손을 흔들고 나는 내가 살던 곳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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