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맞다, 그리고 외 12편

푸른여우, 하루하나 : 2025년 (상)

by 푸른여우

머리말


미안해요 많이 기다렸죠.

기다리시는 분이 얼마나 계실지를 저는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저는 오늘을 계속 기다렸는지도 몰라요. 자신의 일상을 다시 써서 올릴 수 있는 2025년의 어느 날을 말이에요. 사실 올해에 들어서 자신의 일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너무 힘겹고, 하물며 그것을 정기적으로 다듬어서 올리는 것도 너무 어렵다고 느끼고 있었어요. 몸이 안 좋은 건 아니고, 어쩌면 그저 게으름일지도 모르지만, 종이든 데이터든 어딘가에 새겨 넣을 정도로 내 일상은 그렇게 가치 있는 일인가? 라는 생각이 들어서였어요. 만들어지는 글마다 마음에 안 들었던 탓도 많았지만요.

그러던 중에도 쓰고 싶은 것이 불현듯 생각날 때마다(저는 보통 제정신이 들 때라고 혼자 표현하는데) 메모장 한 구석에 글을 남기고, 연휴 때는 거의 죽은 사람처럼 한마디 말도 없이 지내다가, 오늘 밤에 열람실에서 노트북을 켜니 이제야 아래의 글들을 올리고 싶어졌어요. 옛날에 썼던 글들을 보면서 기억하지 못하던 즐거운 과거를 떠올린 경험을 떠올려서요.

아 맞다, 6년 전의 어린이날에는 어린이대공원에서 아스팔트에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양 옆에 버스로 바리케이드를 세우고 어린이들 세상을 만들어줬던 것이 기억이 나는데, 요즘도 과연 할까요? 그런 게 궁금해지는 하루입니다.

아 맞다, 그리고요.

매번 이 블로그의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께 정말 감사합니다. (13가지 이야기를 준비했습니다.)





서울바다


-작년에 여수 밤바다 보러 간 거 기억나?

"기억하지. 그때 회 먹고 삼합 먹고. 만취해서 택시 탔다가 토하고. "

-이번엔 서울 놀러 가야겠다. 서울 밤바다는 어떨지 너무 궁금해.

"야, 무슨 소리야. 서울에 바다가 어디 있어."

그러자 잠시 동안 수화기 너머로 정적이 흘렀다. 한 순간 나는 파도 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너야말로 뭔 소리야. 서울 앞에 바다 들어온 지가 언젠데.

그 말을 듣고 나는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깜깜한 하늘 밑에, 마찬가지로 깜깜한 바다가 경계를 흐트러트린 채로 조용히 넘실대고 있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아 맞다, 그리고


-아 맞다, 그리고 우리 헤어진 건 비밀로 해라.

나는 그 사람으로부터 온 카톡의 첫마디에 쓰인, 마치 무언가 갑자기 떠올리기라도 했다는 듯한 말을 오래도록 쳐다보았다. 그리고 서로 이야기할 때 구두로나 할 법한 그 표현을, 애써 문면으로 옮겨놓은 듯한 그 말을 너무도 어색하다고 느꼈다. 뭐가 '아 맞다'야, 이미 오래전부터 생각한 걸 방금 생각난 것처럼 말하지 마. 자기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한 말투로 굴지 마. 짜증 나니까.






연두


밥을 먹고 꼭 과자 하나를 챙겨 먹는 습관이 생겼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랐다. 밤 9시가 넘어가는 때에 나는 묘하게 당이 떨어진다는 감각을 느끼고, 찬장 안에 있던 비스킷 하나를 집어서 입에 물었다. 그리고 겉에 코팅되어 있는 설탕을 혀로 조금씩 녹여가면서 다음 일을 이어나가곤 했다.

"'언제부터인지 몰랐다'는 말, 너랑 되게 안 어울리는 거 알아?"

"뭔 뜻인데."

그 얘기를 했더니 일러스트레이터인 남자친구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집으로 가는 골목에서 우두커니 멈춰 서서 그를 보았다.

"너 옛날에는 뭐든 기록하고 싶어 하던 사람이었는데. 하루에 있었던 모든 일들을 일기에 욱여넣으려고 해서, 하루 일기가 10장을 넘어가는 날도 있었잖아."

"그치. 요샌 그렇게 못 쓰겠어. 시간도 없고."

"바빠 보이긴 해. 근데 그 이상으로 있잖아, 뭐든 잊어버리고 싶어 하는 것 같달까, 그래."

"신경 꺼. 바빠서 그래. 기억할 게 너무 많아서."

"그야 그렇겠다."

그 애는 그렇게 웃고는, 자기 주머니에 있던 연두색 물감을 내 손에 쥐어줬다. 일러스트레이터도 물감을 써? 너 진짜 바쁘긴 하구나. 나 원래 수채화 그리던 사람이었잖아. 남친 과거도 몰라서 나중에 큰 일 나면 어떡하려고. 나는 손에 쥐어진 물감을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물컹한 느낌이 아직 물감이 굳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듯했다. 그는 어느새 저만치로 사라졌다.

그날 밤 꿈에서 나는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헌혈할 때 눕는 그런 느낌의 침대였다. 옆에는 다른 침대가 하나 더 있었다. 밤에 만났던 그가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나는 왼쪽 팔에, 그는 오른쪽 팔에 바늘이 꽂혀 있었다. 그 애의 몸에서 나오는 피가 나의 몸으로 들어가고 있는 듯했다. 피는 연두색이었다. 세상은 새하얬다. 무언가 칠하고 싶다고 느낄 정도로 새하얀 세상이었다. 집에 가고 싶어. 왜 꿈에서 그런 말을 했을까. 어차피 꿈에서 깨면 집일 텐데.

나는 팔에 꽂힌 바늘을 뽑고는, 조금 새어 나온 연두색 액체를 손으로 닦았다. 그리고 손에 묻은 연두색 액체로 자신의 이마에 십자가를 그렸다. 기독교적인 의미는 없었다. 그저 기원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는 옆 침대에 가서 뒤에서 살며시 그를 안았다. 깨어나면 또 당 떨어지는 매일매일이 반복되겠지. 그래도 안고 있으니 조금은 따뜻해졌다. 언젠가는 다시 일기를 쓰고 싶어지는 날이 올 거라고, 그런 낙관적인 생각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따뜻해졌다. 나라는 사람이 조금 더 선명해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부정의문문


나와 그는 한참을 말없이 걷고 있었다. 이윽고 나는 그의 어깨를 톡톡, 건드리고는 물었다.

"너 외롭지는 않아?"

"아니요."

고민 끝에 건넨 질문에 그가 즉답했다. 그 답을 듣고 나는 생각했다. 이 '아니요'는 '외롭지 않다'는 뜻일까, 아니면 '외롭지 않다'는 말에 대한 부정일까. 다만 나는 질문과 대답 사이의 지나치게 짧았던 틈을 되새기며, 그가 외로움이라는 감정에 대해 무언가를 숨기고 싶어 하고 있다고, 그렇게만 짐작할 뿐이었다.






스포츠


그래서 언젠가부터 남의 불행을 기대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안다. 자존심만 센 사람은 자신을 조촐하다고 느낄수록, 남이 망하기를 기대한다는 사실을. 내 컨디션이 좋지 않을수록 상대팀이 자책골을 넣기를 바란다는 사실을. 그러나 어느 예능에서 얘기하지 않았던가. 정치는 스포츠가 아니다. 남이 못한다고 내가 점수를 따는 구조가 아니다. 하물며 사람 사는 것도 마찬가지다. 남이 못하는 건 그냥 남이 못하는 거다. 그렇다고 내가 고평가를 받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생각하는 사람


어느 날인가 도서관 앞에 생각하는 사람 동상이 놓여 있었다. 기획실에 물어봐도 누가 그것을 갖다 놓았는지 알 수 없었다. 누구 장난인지. 나는 새벽 3시에 도서관 앞을 지나가다가, 집에 가기가 너무 지쳐서 정문 앞에 놓인 벤치에 주저앉아 있었다. 생각하는 사람 동상이 맞은편에 있었다. 가만히 앉아 그 동상을 멍하니 바라보다 보니, 무언가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느껴졌다. 뭘까. 나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혼자 중얼거렸다.

"턱 괸 손이 반대 아니었나......?"

그 말을 하자, 흠칫, 하고 동상이 분명히 움찔거렸다. 나는 놀랐다. 사람이 너무 크게 놀라면, 오히려 비명을 지를 생각도 못하고 그 자리에 굳어버린다는 사실을 아는가. 나는 그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눈앞에서 벌어진 비과학적인 현상을, 헛것으로 치부하고 싶다는 듯이, '나 다 봤어. 나 알아, 네 정체.' 하고 헛소리를 했다. 그러나 동상은 자신의 입을 통해, 자못 현실적으로 말을 꺼냈다.

"오, 제 정체가 뭐죠?"

나는 잠시 생각하고 말했다.

"요괴 이런 거 아니야? 학교괴담에서 봤어."

동상은 턱에 괴고 있던 손을 내리고 양손에 깍지를 낀 채 말을 했다.

"그것도 어느 정도 정답이겠군요. 요괴든 저든, 인간에게 배타적이라는 점에선 동일하니까요."

"그게 무슨 소리야."

"저희는 인류를 지배하기 위해 그들에게 과학 기술을 전도했습니다. 일종의 투자였죠. 저희의 바람대로 인류는 지식을 쉽게 꺼내 볼 수 있는 인터넷을 개발했고, 이제는 물음에 쉽게 답을 해주는 AI까지 개발해 냈죠."

"그건 인류에게 있어서 이득 아니야?"

"그렇죠. 하지만 인류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들의 생각을 점차 그 외부의 한 공간으로 이식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식이 빨려나가는 중에도 그걸 느끼지 못했죠. 마치 집 근처에 도서관이 있으면 자신이 똑똑하다고 착각하는 것처럼 살았을 뿐이에요. 집이랑 가장 가까운 곳에 도서관이 있으니, 지식이 필요하면 도서관에 가면 되니까요. 그렇게 점점 그들이 생각하는 능력을 잃어버리면, 저희는 오래전 했던 투자의 실적을 회수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그때쯤 저희는 자리에서 일어날 것입니다."

그건 무척 무서운 얘기였다. 그 생각하는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 나는 저 단단해 보이는, 청동으로 된 팔로 얻어맞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벤치에서 일어나려다가, 곧장 잠에서 깼다. 동상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그 동상이 어디서 왔을지 관장님한테라도 내일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내가 도서관 직원이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실수


화를 낼 때 가장 중요한 건 말을 절지 않는 것이다. 나는 분명히 그를 자리로 불러, '똑바로 하라고 내가 말했지!'라고 혼내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중요한 순간 말을 절어버렸다.

"똑바로 하라고 마!...... 했지!"

생전 쓰지도 않던 사투리는 왜 입에서 나왔는가. 그제야 나는 내가 남을 혼낼 수 있는 체질이 아님을 알았다.






브레이크 다운


"거기 식당 브레이크 다운일걸요, 지금쯤이면."

"......타임 아니야?"

선배의 말에 나는, 그날 그 애가 했던 말실수를, 내가 또 입버릇처럼 뱉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말실수가 나왔던 날을 나는 언제라도 회상할 수 있다. 이 가게는 브레이크 다운이 없다고, 브런치 가게에서 그 애가 말을 꺼내고 내가 놀렸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밥을 먹고 산책길을 걸었다. 빛 햇살을 맞으며 그 애가 얘기했다.

-오늘은 최고로 행복한 날이네.

그 애는 문장으로 옮겨놓으면 조금 오글거리는 말을, 정말 행복하다는 듯이 활짝 웃으며 얘기했다. 그때 짐작은 했다. 아마 앞으로도 나는, 유난히 따뜻했던 그날을 떠올리고 싶어서라도, 속 그 말을 틀리리라고. 누군가가 머릿속에 있는 사전 펼쳐 '타임'에 두 줄을 긋고, 그 옆에 '다운'이라고 작은 글씨로 낙서기라도 했다는 듯이.






들판에 심은 봉선화


도서관에서 무료 나눔으로 봉선화 씨앗을 받았다. 그러나 내 집은 자취방이고 나는 식물을 기를 공간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씨앗을 들고 다니다가 어느 날 밤에 몰래 아파트 단지에 그것을 심었다. 그저 무언가가 자랄 수 있는지 시험해보고 싶다는 호기심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봉선화는 무럭무럭 자랐다.

문제는 그것을 심은 장소가, 내가 아침마다 출근하는 길목이라는 점이었다. 내가 아침에 나갈 때마다, 그리고 저녁에 돌아올 때마다, 나는 길가에 무책임하게 내놓은 내 봉선화와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봉선화는 나를 줄곧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무표정(말 그대로 표정이 없다)한 꽃은 나에게 무언의 원망을 품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건 그냥 내 죄책감일 뿐이지만.






너랑 절교야


"너랑 절교야."

서른 살이 넘어서 그 말을 다시 듣게 될 줄은 몰랐다. 그래도 꽤 오래 알고 지내던 사이였는데, 이렇게 면전에서 연을 끊겠다는 말을 들은 것은 초등학생 때 이래 실로 오랜만이었다.

"그래 고맙다."

나는 두 주먹에 힘을 준 채로 일단은 감사의 말을 내뱉었다. 괜히 센 척을 하고 싶었다. 근데 그 말을 내뱉을 때 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나는 분명히 그 애에게 감사하고 있었다. 절교라는 말을 꺼내줘서, 인연의 실을 단번에 잘라줘서 고맙다고. 역시 넌 내 최고의 친구야. 이제 더는 친구가 아니지만.

"고맙다고."

다시 한번 그렇게 말했다. 역시나 내 마음속 감사는 변하지 않았다. 왜지? 그래. 내가 누군가와 연이 끊긴 것은 처음이 아니다. 살면서 친구든 거래처든 연이 끊기는 상황이 많지는 않더라도, 그렇다고 이런 상황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서로 간의 관계가 이렇게 단번에 끊어진 적은 있었던가? 어느 순간 점점 멀어지거나 뒤에서 몰래 관계를 끊어놓고 쿡쿡대는 것을 나중에 들은 경우가 잦았다. 그건 배려라는 명목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사자 입장에서는 상당한 민폐였다.

"정말 고맙다."

"야, 너 왜 이렇게 울어? 뭐야?"

나는 눈물을 닦으며 계속 감사했다. 내 앞에서 나와의 관계를 정리해 줘서 고맙다고. 절교면 절교라고, 우정이면 우정이라고 확실히 해줘서 고맙다고. 뒤에서 영문 모를 흘깃거림으로 사람을 괴롭히지 않고, 이렇게 용기를 내서 얘기해 줘서 고맙다고. 나는 그날만큼 서럽게 운 적이 없었다.






밤벚꽃


작년 벚꽃은 제일 바쁜 3월 말에 피어서는, 갑작스레 내린 비로 인해 4월 초에 수명을 다했다. 잠을 깨운 휴대폰 알림이 아침에 비가 예정되어 있다는 날씨 알림임을 알았을 때, 나는 곧장 작년의 일을 상기할 수 있었다.

잠옷 차림으로 병원 옥상에 올라갔다. 저만치 뒷산에 피어 있는 벚나무가, 달빛을 받아 연분홍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아마도 올해 마지막 보는 벚꽃일 터였다.






가죽 잠바 부적


그는 오래된 가죽 잠바를 침대 밑에서 발견했다. 흔히들 과잠이라고 부르는 대학교 가죽 잠바였다. 잠시 입어보려다가 팔 부분이 뜯어져 속에 있던 솜이랑 가루가 흩날렸다. 수명이 다 되었다는 것을 알고 의류수거함에 넣으려 했다.

수거함에 넣기 전에 주머니를 뒤적거렸는데, 백 원짜리 동전 세 개와 작은 종이쪼가리가 하나 나왔다. 그 종이를 보니 작은 글씨로 한자가 쓰여 있었다. 그걸 어디서 받았나 떠올려보니, 대학생이 되고 일본에 처음 갔을 때 어느 신사에서 받아온 부적이었다. 좋은 인연을 가져다주는 부적이래요. 옆에서 통역을 해주던 친구가 그렇게 설명해 줬다.

그로부터 십 몇 년이 지난 지금, 그 부적이 다시금 그의 손에 놓였다. 그동안 내가 바란 대로 좋은 인연이 오고 갔을까. 그렇게 과거를 돌이켜보니, 그에게는 간절히 원했던 인연이 찾아왔을 때 그게 영원할 것이라고 착각했던 기억만이 남았다. 그는 의류수거함에 잠바를 집어넣으며 잘 가, 하고 그냥 작게 손을 흔들었다. 비록 원하던 결말을 맞이하지는 못했지만, 흔히 오지 않는 과분한 인연을 선사해 준 데에 감사해할 뿐이었다.






의미 없는 말


언젠가 저는 당신에게 말했었죠. 이런 시답지 않은 얘기는 하지 말고, 좀 더 의미 있는 말을 나누자구요. 오늘 먹을 점심 같은 얘기 같은 건 하지 말고, 사회 문제나 과학 기술에 대한 얘기를 하자구요.

그때의 저는 아마도 중2병 같은 것에 걸려, 매일 쉬는 시간마다 남의 사랑 얘기로 떠드는 또래 아이들을 바보 같다고 느꼈는지도 몰라요. 그래서 적어도 당신과는, 당신과 나누는 모든 이야기들이 의미 있는 말로 가득하기를 기대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나 당신은 언제나 날씨라든지, 어제저녁이라든지, 딱히 중요하지 않아 보이는 이야기들로 저와의 시간을 메웠고, 그래서 저는 그걸 의미 없다고 여기고 헤어지자고 단호히 얘기한 때도 있었죠.

하지만 어느 날, 갑작스럽게 상을 당해 갑작스럽게 상주가 되어 앉아 있을 때, 멍하니 가족의 영정사진을 바라보며 물러가지 않는 밤을 혼자 보내고 있을 때, 연락을 받고 온 당신은 제 옆에 앉아 날이 밝을 때까지 여러 이야기를 해주었죠. 그때 해준 이야기도 언제나처럼 평범한 일상 얘기였지만, 저는 은은한 라디오 방송이라도 켜놓지 않으면 잠에 들지 못하는 사람이었는지 당신 무릎에서 조금이나마 잠들 수 있었어요. 당신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조금이나마 돌아가신 분을 향한 슬픔을, 아픔을 잊을 수 있었어요.

그러니 더 이상 당신의 이야기를 깎아내리지 않을게요. 그러니 염치없지만, 계속 제 옆에서 별 탈 없는 당신의 일상 이야기를 해주세요. 비 오는 오늘 날씨를 이래저래 이야기하며, 내일 날씨는 맑을 거라는 근거 없는 예측에 귀 기울이게 해 주세요. 그 말에 저는 또 근거 없이 즐거울 수 있을 것 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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