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여우, 하루하나 : 2025년 (하)
정말 제멋대로 굴어서 죄송합니다만, 이번에는 한 달 하고도 열흘을 일찍 와버렸어요. 정신을 차려보니 묶어서 올리기에 충분할 정도로 글이 갖춰져 있었거든요. 아마도 환경이 변화한 탓인 듯합니다. 살면서 처음으로 타지 생활이라는 것을 해보고 있는 중이라서 그럴지도 몰라요.
'타지 생활'의 감상을 짧게 얘기하고 싶은데, 저는 그 타지에서 사용하는 언어를 충분히 배웠고, 그 타지의 문화를 오래 접해 왔다고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생활하려고 하니 이건 또 차원이 다르더라고요. '이렇게 이렇게 지내겠지' 하고 예상한 것은 어긋나 버리고, 휴양을 위해 방문한 저의 감정은 부정적인 것들로 증폭되고, 그 와중에 예상 못한 행운은 갑작스레 들이닥치고 여러모로 정신이 없습니다. 그런 걸 보면, 전에 이야기드린 것처럼 함부로 삶을 '이렇게 이렇게 되겠지' 하고 단정하는 건 참 거만한 행동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무튼, 이번 모음집은 환경이 바뀐 탓에, 지금까지와는 좀 다른 맛이 섞여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 이번에 올렸다고 연말에 다른 글을 안 올리려는 것은 아니에요. 그동안 또 새로운 이야기들이 번뜩번뜩 생각날지도 모르잖아요? 부디 그와 관련해서는, 예상 못한 행운이 다가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11가지 이야기를 준비했습니다. 순서를 재배치하려고 다시 읽으니, 뭔가 단편들이 서로 이어지는 느낌이라 신기했습니다. 쓴 날짜는 서로 뒤죽박죽인데도 불구하고 말이에요.)
-내가 유배 간 첫날에 있잖아. 세상 사람들이 모두 나를 감시하고 있는 거 같아서 집 앞 편의점도 못 가고 며칠인가 끼니를 자판기 음료수로만 때운 적이 있거든? 근데 한 보름 정도 지나니까, 주변의 그 시선들이 모두 거둬진 것처럼 느껴지는 거야. 보름밖에 안 지났는데 계절이 변한 건 아닐 거고. 공간이 변한 것도 아닐 테고. 그냥 그 공간에 있는 내가 익숙해졌을 뿐인 거야. 관측하는 시선이 바뀐다고 세상이 바뀌는 건 아니라고 과학적으로 얘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뭐, 글쎄, 관측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시선이 바뀌면 자기 세상이 바뀌는 건 당연한 건데.
은근히 다혈질적인 성격이시네. 그것을 다시금 지적당했을 때 나는 여전히 어른스럽지 못하게 행동했음을 알았고, 그 여파로 며칠 밤을 지새워야 했다. 아예 다혈질이기만 한 바보였다면, 그냥 그렇게 지적한 사람을 미친 사람 취급하고 끝났을 텐데, 나는 쓸데없이 화는 잘 내는 주제에 자책도 쓸데없이 잘하는 편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꿈에서 나는 포켓몬이 되었는데, 오박사는 트레이너한테 나를 소개하며 그렇게 얘기했다. 이 녀석은 불꽃 타입 포켓몬이다. 주 스킬은 불꽃펀치지. 내가 파이리였는지 리자몽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나는 그 기묘한 꿈에서 깨고 한동안 기분이 얼떨떨했다.
사실 내가 발끈하는 성격을 여태 줄이려고 했는데도 못 줄인 건, 정말로 태어날 때부터 내가 불꽃 타입 인간으로 태어났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상상을 했다. 그렇다면 그런 성격을 바꾸는 건, 파이리한테 물대포를 쏘라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그렇다고 지금처럼 살기에는, 언젠가 집이랑 주변 사람을 다 태워버릴 것 같은 불안감이 앞섰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불꽃 속성을 바꾸려고 억지로 힘쓰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좀 더 제대로 불꽃펀치를 쓸지를 고민하는 일이었다. 주변 사람을 해치지 않으면서 자신의 감정을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는 일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화가 날 것 같은 순간마다 일단 속으로 불꽃을 이리저리 굴려보며, 이 상황에서 어떻게 스킬을 써야 제일 적당할지 한 번은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래도 안 되면 '에라이, 모르겠다. 가랏, 불꽃펀치!' 하고 속으로 외쳤다. 그 오글거리는 명령에 불꽃도 오그라들면, 화를 안 내도 될 상황에 다행히 화를 안 내고 끝나는 경우도 많았다.
우주 여행객의 증가와 함께, 최근에 빈번하게 발생하는 외계 생명체의 지구인 사칭으로 인해 전 지구인 공통 여권 발급 계획을 아래와 같이 공고합니다.
일시 : 금년 10월 20일부터
발급 방법 : 각 행정 구역 내 시청에 방문하여 출생증명서 확인 후 지정된 양식을 작성하여 제출. (발급까지 약 2개월 정도의 기간이 소요됩니다.)
목적 : 근일 내 화성 및 수성 소속 생명체가 지구에 불법 체류하는 사례가 다수 적발. 최근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전염병 사태가 이와 연관이 적지 않다고 판단되는 바, 향후 지역 주민의 안전을 위해 전 지구인에게 여권을 발급하여 안전을 도모하고 아울러 소속감 향상을 목표로 함.
※ 주의사항 : 현재 불법 체류 중인 외계 생명체 중 지구인으로 거의 완벽히 둔갑하여 육안 식별이 불가능한 경우도 다수. 이 경우 혈액검사로도 지구인과의 차이를 확인할 수 없으므로, 판단 및 조치에 각별히 주의할 것.
(출생증명서 미지참 상황에서 여권 발급을 수 차례 재촉하는 인원에 대해서는 담당 경비원의 감시 하에 지정된 장소로 이동하여 매뉴얼대로 처리할 것. 실제 사례 존재.)
한참을 문자로 싸우다가 내가 못 참고 그 말을 꺼냈다.
-야 그럴 거면 절연할래 그냥?
그러자 그가 곧바로 답장했다.
-다음 생에 ㄱ
세상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았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짜고 치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당신의 부고를 받았다. 그 문자를 확인하기 몇 시간 전까지, 나는 혼자 술을 마시면서 내일이 되면 죽어야지, 같은 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다. 그때의 나는 지금 돌이켜보면 마치 다른 세상의 자신 같았다. 그 정도로 당신의 부고는 컸다.
만약 당신이 기억을 잃고 저승에서 건너와 나의 앞에 나타난대도, 나는 절대로 당신의 사인을 알려주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정말 예측할 수 없는 사인이었으니까. 언젠가 뉴스를 보고 한 번쯤은 불안해했을지 모르겠지만, 자신이 그 뉴스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는 쉽사리 예상하지 않는 그런 사인. 당신의 죽음에는 어떠한 원한 관계도 없었다. 그것이 나를 그나마 위로했다. 그러나 그렇다면, 아무런 원한 관계도 없었던 당신은 왜 죽어야 했을까. 그것이 잠시 위로받은 나의 마음을 두꺼운 주삿바늘 같은 것으로 다시 쿡쿡 찌르는 것이었다.
당신이 죽은 이후로 세상은 변함이 없었다. 그저 당신이 남긴 삶의 흔적들이, 당신이 이 자리에 있었음을 어슴푸레하게 표시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적어도 당신과 알고 지냈던 나라는 사람만은 변해야겠다는 생각에 그날 부로 술을 줄여 나갔다. 면도를 했다. 운동을 했다. 집안 청소를 했다. 락스로 화장실 구석구석을 닦았다. 소음이 필요해서 노래를 들었다. 노래를 들으며 이곳저곳을 거닐었다.
그리고 어느 날 꿈에서 당신이 나타났을 때, 저승에 있을 당신이 자신의 사인을 궁금해했을 때, 나는 말했다. 당신이 마지막 들른 곳은 자신의 서재였다고. 당신은 자기가 좋아하는 책들에 둘러싸여, 자신의 책을 죽을 때까지 읽어나갔을 것이라고. 당신의 죽음은 무척이나 갑작스러웠지만...... 거기까지 말하고 나는 속으로만 그다음을 이야기했다.
당신의 죽음이 있고 나서 저는 삶으로 나아갔어요. 그 말을 어떻게든 좋게 다듬으려 하지만, 어떻게 다듬어도 불경하게 느껴져서, 나는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당신의 죽음을 딛고 일어섰어요. 당신의 죽음을 발판 삼아...... 그만하자. 어떻게 해도 좋은 표현이 나오지 않는 이유는 그냥 내가 불경한 탓이다. 나는 잠시 고개를 떨구고 다시 고개를 들어 최대한 밝은 얼굴로 얘기했다. 당신의 죽음에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했어요. 그건 진실이었다. 내가 말할 수 있는 진실은 이게 고작이었다.
-행복하자.
-그런 문자 좀 작작 보내세요. 나이 많은 거 티 내는 것도 아니고.
-불행하지 말자.
-똑같잖아요. 장난치지 마세요.
-불행해하지 말자.
나는 낯선 도시의 굿즈샵에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굿즈를 바라보다가 어떤 남자가 다가와 무언가를 물어봤다. 아마 근처에 비슷한 가게가 더 있냐는 질문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몇 마디 대화를 했다. 남자는 트럭 운전수라고 자신의 직업을 밝혔다. 이다음에 약속 있으세요? 그가 물었다. 나는 약속이 있다고 했다. 실제로 약속 같은 건 없었다.
밖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여기는 우산이 너무나도 비싸서, 나는 맨몸으로 비를 맞고 있었다. 횡단보도 앞에 서 있으니 우산을 쓴 사람들이 다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나는 거리를 서성였다. 사람이 없는 길에 대형트럭 하나가 다가오다가 내 앞에 멈춰 섰다.
"어디까지 가세요."
"어디까지 안 가요."
대답할 기력이 없어서 억지로 대답하다가 이상한 말이 나왔다. 그는 운전석 창문을 내렸다. 잠시 후 그가 손을 창문 밖으로 내밀었다. 그 손에는 우산이 들려 있었다.
"주시게요."
"아뇨, 안 주시게요."
내 말이 농담이라고 생각했는지, 그는 똑같이 농담하듯 받아쳤다. 그가 손에 든 우산을 펼쳤다. 나는 멈춰 서서 잠시 동안 비를 피할 수 있었다. 온몸을 뒤덮는 찝찝함에 나는, 주의를 어떻게든 돌리고 싶어 다시금 아무 말을 꺼내려했다. 그러나 아무 말이 생각나지 않아 결국 자기 얘기를 해버렸다.
"먼 곳으로 오면 사람에 대한 증오가 줄어들 줄 알았어요."
"근데요?"
"오히려 커졌어요. 그 사람들 때문에 내가 도망친 거라는 억울한 감정이 들어서요."
"그것 때문이 아닐 텐데도 말이에요?"
"그것 때문만은 아닐 텐데도 말이에요."
운전석에 있던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이쪽을 보며 말했다.
"저도 그랬어요. 그것 때문만은 아닌데요. 그게 싫어서 운전을 시작했어요. 움직이면 증오가 좀 나을까 봐요. 원래는 변호사가 꿈이었거든요?"
"네."
"근데 운전을 하다가요. 그렇게 몇 년의 세월이 흘러버렸어요."
"네."
"제가 법 공부 좀 해서 아는데요. 그 시간은 재판 가도 보상 못 받아요."
"네?"
"그러니까 하루빨리 쾌차하세요."
내가 단답으로만 대꾸하다 보니 더 이상의 대화가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무언가 무안함을 느끼기라도 한 것인지, 남자는 우산을 접고 곧바로 운전석 창문을 올렸다. 트럭이 저만치로 떠나갔다. 나는 가만히 서 있었다. 가만히 선 채로, 일단 집에 가면 목욕부터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대낮이 되었는데도 아직 자고 있는 그를 며칠째 지켜보며, 언제쯤 그가 철이 들까 다시금 고민한다. 벌써 그도 적지 않은 나이가 되었다. 내가 너 나이 되었을 때는 이 일 저 일 안 가리고 했어. 그렇게 충고해 보지만 아무리 크게 소리를 질러도 들릴 일은 없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은 하루 종일 휴대폰으로 뭔가를 보더니, 아침 댓바람부터 와이셔츠에 넥타이까지 갖추었다. 나는 그가 뭘 잘못 먹었나 싶어 당분간 어리둥절해했다. 그는 급하게 종이에 글귀 같은 걸 끄적이더니 바로 집 밖을 나갔다. 그 종이에 뭐가 쓰여있나 보려다가 집에서 급히 멀어지는 그를 쫓아 나도 밖으로 나섰다.
얘는 노트북도 놓고 가고 어딜 급히 간대. 장마철이었다. 세상 어디든 비가 세차게 내려서 이곳저곳이 물에 잠기고 있었다. 여행 가기에 좋은 날은 아니었다. 다른 날 가면 안 돼? 좀 날씨 좋을 때 가지. 나는 들릴 리 없는 잔소리를 했다. 번잡한 지하철을 타고 번잡한 기차역에 다다른 그는 표를 하나 끊어 기차에 올랐다. 부산으로 가는 열차였다. 바다라도 보러 가려는 건가. 그러고 보면 옛날부터 즉흥으로 행동하기를 좋아하는 성격이긴 했다.
부산으로 가는 기차는 몇 번이고 도중에 멈춰 섰다. 운행중지가 몇 차례인가 번복되었다. 그는 그런 일련의 사건들에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는 듯 창문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옆자리에 사람도 없었던 터라, 나는 그 자리에 앉아 계속 그를 보고 있었다. 가방 하나 없이 부산은 왜 가려고 하는지. 한동안 집안에만 있었으니, 그래, 가끔은 여행 한 번 갔다 오면서 기분 전환을 할 때도 있어야 하는 법이다.
겨우 기차는 출발했고 우여곡절 끝에 부산에 도착했다. 평소 같으면 휴가철이라 사람도 많을 텐데, 비가 이렇게 오니 역은 그래도 한산했다. 꿉꿉한 공기를 가로질러 우리는 어느 숙소에 도착했다. 밖에는 폭우가 내리고 있었다. 이 숙소에 딸려있는 워터파크나 루프탑도 오늘은 영업을 안 하는 모양이었다. 어째 운이 안 따라주네. 나는 그가 상심할까 봐 멋쩍게 웃었으나 그에게 여전히 닿지 못했다.
한 번이라도 웃어주면 어디 덧나나. 괜히 화가 나는 중에 그가, 운이 없네, 하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는 방금 마트에서 사 온 소주를 들이키며 밖에서 내리는 빗소리를 들었다. 불도 안 켠 방에서 흘러나오는 뉴스에서는 폭우로 잠긴 농가가 계속 비치고 있었다. 술 좀 끊으라니까. 나는 괜스레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참지 못하고 날개를 펼쳐 하늘로 올랐다.
먹구름을 뚫고 더 위로 날아갔다. 그리고는 그 위에서 사람의 운을 관장하고 있는 신에게 물었다. 우리 아들이 그래도 여행 왔는데 조금이라도 행운을 줄 수는 없겠느냐고. 그러자 신이 말했다. 저번에도 충분히 드렸잖아요. 이제 없어요. 아드님 본인이 이제 행운을 바랄 만큼 인덕을 쌓으신 것도 없고, 어머님 남아 있던 행운도 이미 아드님 위해서 다 쓰셨잖아요.
-아이, 그래도 내 행운은 좀 있을 거 아니에요. 잘 모아봐요. 안 되는 게 어딨어. 자식 둔 부모 입장이 안 되어봐서 모르시나 보네. 요, 요, 요거 봐요. 그래도 조금 남아있네.
-이거요? 에이 사모님, 이거 뭐 얼마 되는 행운이라고 이거까지 써요. 이거까지 쓰시면 나중에 환생하실 때 지장 생길 수도 있어요, 잘못하면.
-그거는 됐고, 환생을 하든 말든 나는 괜찮으니까, 그걸로 무슨 행운이든 해줘요. 우리 아들 여행 한번 가고 맘 잡고 지금부터 덕 쌓으면 되겠죠, 뭐.
-아이 알았어요, 잠깐이에요. 아주 잠깐 아드님한테 행운 드릴 테니까, 뭐, 어떤 걸로 해드려요. 물고기라도 잡히게 해 드려요? 저어기, 저기, 아드님 해변까지 나오셨네.
-물고기는 무슨, 어부도 아니고. 아니 근데 쟤는 비도 오는데 저기는 왜 갔어, 우산도 없이? 아이, 저기, 그럼 우리 아들 보라고 비나 한번 그쳐줘요. 해질 시간이라 노을 보면 예쁘겠네. 몇 분 해줘요?
-5분이요.
-5분은 무슨, 1시간은 합시다.
*
그렇게 몇 번 실랑이를 하다가 그들은 결국 30분으로 합의를 봤다. 잠시 동안 비가 그쳤다. 구름 사이로 노을이 지며, 뻗어 나오는 빛이 커튼을 만들었다. 그 커튼의 끝자락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 그의 발은 검은 바닷물에 잠겨 있었다. 이 날씨에 이곳에는 아무도 안 오겠거니 했던 것인지, 아니면 그저 잠시 자리를 비운 것인지, 해상구조대도 마침 자리에 없었다. 그 정도로 그는 운이 없었다.
비에 쫄딱 젖은 채로, 그는 자신의 발목을 덮치던 검은 파도가 점차 잠잠해지는 것을 알았다. 노을이 바다를 금빛으로 물들여갔다. 그것이 자신이 보는 환상인 줄 알았는데, 몇 분이 지나도 파도는 금빛으로 넘실거릴 뿐이었다. 비구름은 이제 노을을 강조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로 전락해 버렸다.
그는 한참을 서서 구름 너머의 햇빛을 보려 했다. 그리고 문득 강한 취기에 시달려 머리가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이윽고 그는 울기 시작했다. 아이처럼 울기 시작했다. 눈물을 계속 닦으면서 그는 아이처럼 울었다. 노을빛이 그의 축축하게 젖은 몸을 아주 잠시나마 말려주고 있었다. 아주 잠시나마였다.
1.
바다에서 손톱을 깎았다. 무언가 바다에 대한 앙심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아니, 인정하자. 앙심은 있다. 다만 배 위에서 아버지 일을 돕느라 제대로 손톱을 깎을 시간이 없어서, 그냥 해 질 녘 뱃머리에 앉아 짬이 나는 순간에 그것을 다듬었을 뿐이다.
옛날에 엄마가, 밤에 손톱 깎으면 쥐가 먹고 사람이 되어서 내 행세를 한다고 그랬는데. 그렇다면 파도를 타고 떠내려간 손톱 때문에 저 멀리 외국에서 또 다른 내가 살아가고 있지는 않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들자 나는 막 깎은 약지 손톱을 바다에 내버리지 못하고 도로 손에 쥐었다.
2.
밤에 산책을 나가 바다를 보는 것이 좋았다. 가로등 하나 켜져 있지 않은 해변가는, 마치 조물주가 자기들만 이용하려고 세상 어느 한 편에 따로 마련해 둔 듯한 목욕탕처럼도 보였다. 달빛이 반사된다, 라는 개념을 나는 바다를 보고 처음 익혔다. 밤에도 이렇게나 바다는 반짝일 수가 있었다.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는 모른다. 나는 어느 날 해변에 누워 있었고, 요 앞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사장님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했다. 지금은 자신의 기억을 되찾을 때까지, 낮에는 카페 일을 돕고, 밤에는 바다를 거닐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나는 그날 밤도 바닷가에 우두커니 서서, 발목을 바다에 담근 채로 바다 표면에 반사되는 달빛을 보고 있었다.
"밤에 입수하는 건 불법이야."
뒤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사장님이었다.
"사장님."
"위험하다고 몇 번을 말해도 말을 안 듣네."
그 말에서는 단념 같은 것이 느껴졌다.
"이 바다 너머에는 뭐가 있나요?"
"다른 나라가 있겠지."
"다른 나라요?"
"그래. 쓰는 언어도 다르고, 생활 패턴도 다르고, 그치만 똑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나라."
나는 가만히 서서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조금 흐린 날씨라 바다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언젠가 같이 가도 돼요?"
"어디를?"
나는 손가락으로 수평선 너머를 가리켰다. 그 끝에 다른 땅이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사장님은 조금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전에 네가 누군지나 잘 떠올려 봐. 여권 만들려면, 그거부터 알아야지."
"약속이에요."
"그래, 약속."
사장님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나는 얼마 전 배운 대로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지문은 닳아 있었다. 손가락은 따뜻했다.
"아빠는 엄마란 결혼한 거 후회 안 해?"
"응?"
그렇게 반응하고 나는, 한동안 사진을 물끄러미 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후회는 안 하는데, 사기당했다는 생각은 했지."
"왜?"
본인은 지금 생각해도 우유부단한 사람이었다. 확실한 무언가가 없으면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 '확실한 무언가'라는 게 세상에 얼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렇기에 세상에 얼마 없을 뜨거운 구애를 받고 있음에도 좀처럼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중에 좀만 더 안정되면, 나중에 좀만 더 경제적으로 부유해지면, 그런 식으로 애매하게 둘러대던 어느 날, 그녀가 어느 해안으로 자신을 데려갔다. 불투명한 테이프를 잘라놓은 듯한 구름이 엷게 펼쳐져 있었고, 그 뒤에 태양이 있었다. 햇빛을 받으며 넘실대는 파도에서 난생처음 나는 열기를 느끼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 지나, 우리는 길가에 있던 작은 카페의 테라스에서 팬케이크를 먹었다. 꿀과 시럽이 든 작은 병들이 왼쪽에 놓이고, 포크와 나이프가 앞에 놓였다. 팬케이크 위에 시럽을 뿌리고, 그것이 빵 전체를 덮어갈 무렵, 카페 차양 너머에 펼쳐진 하늘에서 노을이 진홍빛으로 지고 있었다. 시간이 생각보다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시럽이 팬케이크에 전부 스며들 즈음, 그녀가 깍지 낀 양손으로 턱을 괴고, 나를 보며 말했다.
-나랑 결혼해.
나는 그 풍경과, 풍경이 내뿜는 비현실적인 분위기에, 어떤 고민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해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자, 그 모습을 본 관광객들이 일제히 작게 환호를 했다.
그렇게 우리는 가로등 하나 없는 깜깜한 길을, 미약한 자동차 라이트에 의지하며 다시금 돌아왔었다. 그리고 오늘의 모든 풍경이 그녀가 섬세하게 짜놓은 장치임을 알면서도, 나는 그 계약을 무르지 못한 채 여태 스스로의 대답에 책임을 지고 있는 셈이다.
할머니는 액자에 걸린 사진을 보고 계셨다. 얼마 전 이 요양병원에 들어오신 분이었는데, 평소 성격은 쾌활하셨지만 한밤중에 병실 복도를 돌아다니며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습관이 있으셨다. 누구 사진일까? 남편 분이시겠지. 얼핏 봤는데 여자 같던데? 동료 간호사들끼리 그런 추측을 하곤 했다. 그러다 어느 날 베개를 갈아드리려 할머니 옆으로 갔을 때, 할머니는 그 사진을 보며 그렇게 중얼거리셨다.
"내년에도 너를 미워할까, 아님 죽을까."
아픔이 많으신 분이야. 그 이상은 환자 개인정보라. 의사 선생님은 그렇게 말씀하실 뿐이었다. 일 년이 지나, 할머니는 병실 위에서 눈을 감으셨다.
돌아가시기 전날까지 건강에 문제도 없으셨고, 같은 건물의 할아버지와 썸을 타시는 게 아니냐는 얘기가 돌 정도로 다른 사람들과의 교류도 있으셨다. 나도 몇 번인가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 분과의 대화에서는 언제나 편안한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그때 중얼거리신 미움에 대한 얘기는 단 한 번도 꺼낼 수 없었다.
유품을 정리하며 베개를 살피니, 그 뒤에 있던 낡은 수첩이 손에 잡혔다. 유가족 정보도 없었기에 혹시나 연락처가 적혀 있을까 싶어 수첩을 열어보니, 안에 흘려 쓴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몇십 년 넘게 마음속에 사람이 사는 것 같았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들. 그들은 내가 평소 지낼 때 갑자기 마음을 두드려 나를 괴롭게 했다. 용서하라는 사람도 있었다. 용서는 어렵다. 그걸 할 수 있을 정도의 건강은 잃어버렸다.
그러나 내가 이곳에서 모든 것을 털어놓은 그날, 내 마음에는 새로운 사람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그는 내가 증오하는 사람들이 마음을 두드리려 할 때마다, 있는 힘껏 두 팔을 벌려 그들을 막아주었다. 그러면 나는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아도 좋았다. 혹여 나쁜 생각이 들 때에는 그가 나타나 그 나쁜 생각을 반박해 주었다. 그 방법을 나는 너무 늦게 터득했다. 나중에 이것을 읽게 될 사람이 혹여 나와 같다면, 너무 늦지 않게 그 방법을 터득하기를. 그래서 아직 시간이 남아 있을 사람을 위해 소망한다. 네 증오도, 사랑으로 덮였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