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6월 하순이었나, 생각하기를, 이번 년도 하반기는 성실하게 살 거야. 그리고 6월 30일까지 퍼질러 놀다가 7월 1일부터는 다시 놀기 시작했습니다. 역시 성실하게 살고자 한다면 그 결심을 한 날부터 바뀌도록 노력해야 하는 모양입니다. 그래도 하루에 한 번 생각을 써서 올리겠다는 목표는 달성했네요. 7월 9일~10일은 꿈 꾼 얘기를 좀 길게 쓴 바람에 여기 올리지는 않았습니다. 한 달을 돌아보는 느낌으로 읽어보는 건 어떠실까요? 총 29개의 단편들을 준비했습니다.
어디
"내가 지금 어디쯤에 있는지 모르겠어."
"우주도 맨날 팽창하잖냐. 별들도 모를 걸. 지들이 우주 어디쯤 있는지."
유리잔에 담겨 있던 얼음이 달그락 소리를 내며 위치를 바꿨다.
나른
오후 3시, 어느 빌딩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바닥에 얇게 뻗은 햇빛이 눈에 들어왔다. 회색 대리석 위에서 햇빛은 카스타드색을 띠며 누워 있었다. 그러고보면 나는 그 색을 좋아했다. 어린 시절 바닷가에 놀러갔을 때 보았던, 나른한 모래사장의 빛깔과 닮아 있었다.
낮잠
책상에 엎드린 지는 벌써 2분 30초. 오전에 했던 실수, 사소한 말다툼, 부끄러운 행동들에 대한 죄책감 같은 것이 아직도 나를 잠들지 못하게 했다. 옆에 있던 동료가 내 등을 작게 토닥이며 속삭였다.
"머릿속으로 라이터를 하나 상상합니다. 그리고 그간 쌓아온 감정들의 가장자리에 불을 붙여봅니다."
나는 조심스럽게 라이터를 켰다. 불필요한 기억들이 재가 되어갔다. 타닥타닥, 기분 좋은 모닥불 소리만이 남았고, 나는 그제야 잠에 들었다.
기원
"기원과 저주의 차이에 대해 설명해볼 학생."
"기원을 하면 효험이 상대방에게 가고, 저주를 하면 불행이 다시 돌아옵니다."
"그래? 근데 왜 인간들은 기원보다 저주를 많이 할까? 논리적으로 안 맞잖아."
23번 연수생은 머리를 긁적였다. 나름 공부를 해서 저승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고 있건만, 여전히 그에게는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저주는 편하거든. 남의 불행을 바라는 인간들은 항상 자신이 열등하다고 생각해. 근데 그 사람들만큼 잘해야겠다는 생각은 또 안 해. 잘 못할 것 같아 두렵거든. 혹은, 귀찮거든. 편하게 있고 싶거든. 이게 부족함을 느끼는 사람과 열등감을 느끼는 인간의 차이야.
어쨌든, 그래서 이 인간들은 남이 나만큼 못하기를 바라. 그게 제일 편하잖아. 이승 내려가 보면 알겠지만 쉽게 보는 장면이 삼삼오오 모여서 험담하는 장면이야. 저 집은 남편이 분명 바람을 폈을 거다, 여자 쪽은 돈 보고 결혼을 했을 것이다, 등등. 어떻게든 남의 흠집을 찾아내려 하지.
근데 이게 무슨 축구 경기도 아니고. 다른 팀이 아무리 못한다고 자기가 우승을 하는 게 아니란 말이지, 적어도 지 삶에서는."
무념
아무것도 쓰고 싶지 않은 걸 보니, 오늘 하루는 만족스러운 날이었나 보다. 언어는 욕망을 담아내는 그릇이기에, 사람은 사과를 먹고 싶을 때 '사과'라는 단어를 발음해보곤 하고, 보고 싶은 사람이 있을 때나 남의 이름을 괜히 끄적여보곤 하니까.
그에 반해 어떠한 욕망도 찾아오지 않는 오늘은, 어쩌면 부처님이랑 어깨동무를 해도 괜찮은 날인지도 모른다.
빠져
3학년 학생회장이 넌지시 고민을 털어놓았다.
"사람들이 나를 싫어하는 것 같아."
휴대폰을 보던 한 학년 밑의 회계 담당이 고개를 돌렸다.
"왜요? 누가 인스타 언팔했어요?"
"아니,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서."
"한번 애들 강당에 모아볼게요. 그리고 '우리 언니 싫어하는 사람, 좌측으로 빠지실게요!'라고 메가폰 들고 얘기해볼게요."
"너 같으면 빠지겠니? 아무도 안 빠질 걸."
"그럼 됐네요. 앞에서 싫다고 못 하면 좋아하는 거래요. 좋아하는 게 아니라면 그냥 그럭저럭 생각하는 거래요."
깊이
"너 그렇게 깊이 있는 사람 만나다가 익사하면 어떡하냐? 너 생각보다 얕잖아."
그가 괜한 시샘을 던졌다. 내가 대답했다.
"'죽어도 좋다'는 말은 이런 때 쓰는 거 아닐까?"
냠냠
人 : 제가 뭘 했던 사람인지 알고 싶어요.
狐 : 그걸 왜 여기 와서 묻니?
人 : 여기에 오면 어떤 소원이든 들어준다고 해서 왔어요.
狐 : 그래. 그래서 너는 얼마 전에 이곳에 와서 소원을 빌었단다. 지금까지의 나쁜 기억들을 지워달라고. 내가 친히 들어줬어.
人 : 나쁜 기억을 지우면 좋은 기억은 남아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狐 : 살면서 좋은 기억이 없었나 보지. 아니면, 나쁜 기억이 좋은 기억이랑 착 달라붙어 있었을지도.
人 : 되돌릴 수는 없나요?
狐 : 그렇게 얘기할 줄 알고 내가 미리 네 기억들을 몇 장 보관해 놨어. 자, 한 장씩 뜯어먹으면 돼.
人 : 그냥 읽을 수는 없나요? 뜯어먹기에는, 종이에 볼펜 냄새가 너무 나는데.
狐 : 원래 이야기는 음미하는 거란다. 단순히 읽는 게 아니라. 그리고 소원을 되돌리는 건데 이 정도의 곤혹은 치러야 맞지 않을까?
놀아
스무 살이었던 당신에게.
세상에는 불확실한 것들밖에 없으니, 확실한 것만 찾거나 기다리려고 애쓰지 말기. 사람은 가끔 잘못된 길로도 빠져봐야 진짜 올바른 길이 뭔지 알아. 지난날 잘못된 길에 빠졌던 나는, 이번에야말로 올바른 길을 가고 있어.
단지 아쉬워. 한 해가 지날수록, 놀 수 있는 시간도, 놀 기력도 점차 줄어드는 게. 그치만, 어느 때든 즐기길 바라. 좋고 싫은 걸 떠나서, 또 운명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지만, 즐기는 건 네가 할 수 있는 영역이잖아.
그니까 즐겁게 놀아. 세상은 즐길 거리로 넘치거든.
흑백
"흰 옷이랑 검은 옷 중 어느 쪽이 더 쉽게 더러워질까?"
"흰 옷이겠지."
"둘 다 똑같아. 더러움이 묻는 거야 같지만, 흰 옷이 더 티가 날 뿐이거든."
그래서 깨끗한 사람일수록 쉽게 더러워진다는 너의 변명은 그저 변명일 뿐이라고. 그는 유리벽 너머에 있는 친구에게 경멸의 시선을 보낸 후, 곧바로 면회실을 나섰다.
희생
"네가 위험에 빠졌을 때, 그걸 구하는 게 나였으면 좋겠다."
횡단보도 앞에서 그가 말했다. 나는 투명우산에 토독토독 떨어지는 물방울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어느 날 우산을 들고 길거리를 이리저리 돌아다닌 적이 있어. 혹시라도 비 맞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봐. 누구에게든 우산을 내어주고 싶었어. 그렇게 해서라도 자기 내부에 선량한 마음씨가 있다고 믿고 싶었나 봐. 뿌듯해하고 싶었나 봐.
근데 그거 알아? 희생과 헌신이야말로 사람을 가장 부담스럽게 만든대."
슈퍼문
"그쪽에서는, 잘 보이나요?"
그는 길을 걷다 말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가씨가 사는 곳에는 구름이 잔뜩 끼어 있는 모양이었다. 그의 머리 위에는 여느 때보다도 큼지막한 달이 어둠을 몰아내고 있었다.
"네, 잘 보이네요."
"사진을, 찍어주실 수 있나요?"
아가씨의 조심스런 요청에, 그는 밝기를 최대로 낮추어, 달의 모습이 온전하게 담길 수 있도록 사진을 찍었다.
방에 홀로 있던 그녀는 창가에 걸터 앉아 그가 보내준 달 사진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그리고 소중한 것을 다루기라도 하듯, 조용히 달을 품었다.
준비
"잘 준비 안 하고 뭐해?"
"인간은 잘 때도 준비를 하고 자는군요. 적응하기가 너무 힘드네요. 준비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아요."
걱정이 많아 보이는 그였다. 그는 얼마 전에야 짐승에서 인간이 되었던 것이다. 주인은 숨을 한번 내쉬고는 말했다.
"그 대신 일어날 준비라는 말은 잘 안 써. 그니까 오늘은 푹 자고, 내일은 그냥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면 돼."
균형
"나는 항상,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세상의 절반이라고 생각해. 그래서 나는 자만하면 안 되고 좀 더 노력해야 해. 근데 나보다 못하는 사람도 세상의 절반이라고 생각해. 그래서 나는 너무 나를 깎아내리지 않아도 돼.
어차피 확인할 수 없는 거잖아? 사람들 능력을 일일이 파악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제일 균형 잡힌 생각을 하자구. 밥 반찬 골고루 먹듯이."
전능
앨리스가 물었다.
"언니는 언제 어른이 됐다고 느꼈어요?"
"자기가 뭐든 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걸 알았을 때."
"되게 비극적이네요."
"글쎄. 꼭 그런 건 아니야. 뭐든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아니까, 자기가 좀 더 잘 할 수 있는 거에 집중할 수 있어. 그리고 그건 남들과는 다르게, 나만 할 수 있는 일이고."
일탈
"오늘은 좀 망가지고 싶네요."
"어떻게 망가질 건데요."
"새벽에 감자칩이랑 콜라를 사올 거예요."
"만화에서 본 것 같아요."
"그리고 밤새 넷플릭스를 보다가 잠들 거예요."
"양치는 안 해요?"
"양치는....... 해야죠."
친절
도시락이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그녀는 오늘 하루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생각했다. 오늘도 바빴고, 내일도 바쁠 예정이었다. 점원이 도시락을 카운터에 놓으려 했다. 그녀는 이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943번 포장 나왔습니다, 점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점원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손님을 보고, 포장된 도시락을 그녀가 앉아 있는 테이블 위로 옮겼다. 그녀는 그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점원은 분명히 자신을 배려해준 것이었다. 그녀는 밥을 다 먹고 난 뒤에야 그런 생각을 했다. 그것은 분명한 친절이었고, 그녀는 자칫 눈치채지 못할 수도 있었다. 하마터면 오늘도 그냥 넘길 뻔했네, 그녀는 다행스럽게 여겼다.
휘휘
멀찌감치 앞에서 그가 걷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 얼굴만 아는 사이였고, 오늘은 우연히 가는 방향이 같을 뿐이었다. 그는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뒤통수를 보이고 있었다.
나는 한동안 거리를 유지하며 걷다가, 어느덧 그 휘파람이 무슨 노래인지 궁금해졌다. 이 노래 같기도 했고, 저 노래 같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물어보지 못했고, 우리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갈라졌다.
한번 물어보기라도 할 걸, 그런 아쉬움이 바람에 날렸다.
커튼
"그만 가자."
조수석에 앉아 있던 그녀가 물끄러미 창문 밖을 보며 이야기했다. 우리는 비구름이 없는 남쪽으로 가고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계속 비만 내릴 거야. 엊그제도 그랬고, 어제도 그랬어."
"조금만 더 가면 돼."
"이제 기대 안 해. 나 좀 잘게."
"저 커튼만 젖히고."
나의 말에 그녀가 시선을 앞으로 향했다. 저 멀리 먹구름 사이로 스며든 햇빛이 커튼을 이룬 채 반짝이고 있었다.
꿈꿈
"지금 너의 꿈은, 정말로 네가 꾸고 있는 꿈이야? 혹시 다른 사람이 꾸는 꿈을 네 꿈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니야?"
왈왈
옛날 한문을 보고 있으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걸 썼던 사람은 나름대로 간절한 마음을 담아서 글을 썼을 것이라고. 이 글의 내용은 가족을 잃은 슬픔일지도 모르고, 나라를 빼앗긴 아픔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알아보는 한자는 공자 왈 맹자 왈 할 때의 바로 그 왈曰 자밖에 없다.
나는 그 글에서 감정이라도 알아낼 수 있을 줄 알았으나, 알아낸 건, 진심도 알아들었을 때나 통한다는 사실뿐이었다. 왈 자만 읽다 보니 어느새 강아지가 짖듯 종이가 왈왈왈왈, 할 뿐.
이사
이사를 위해 집을 정리하던 와중, 그간 잊고 있던 기억들이 서랍 속에서 잔뜩 나왔다. 전부 다 가져가기에는 양이 너무 많았기에, 어쩔 수 없이 절반은 버려야만 했다.
지금 버린 추억들이 나중에 가서 그리워지면 어쩌지? 나중에야 그게 무척 소중한 기억이라는 걸 알아채버리면 어떡하지?
그래서 아직도 이것저것 쌓아놓은 채, '다 쓸 데가 있어'라고 부모님처럼 말하고 있다.
딸기
"학생 때는 나도 살기 싫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던 사람이었거든."
"그래? 전혀 그렇게 안 보이는데."
"근데 어느 날 어머니가 화를 내시더라고. 그럴 거면 그냥 다 같이 죽자고. 어머니도 살기 싫은 건 매한가지였던 거야. 그것도 모르고, 나는 맨날 시답지 않은 이유로 살기 싫어, 살기 싫어, 얘기했던 거지."
"그러면 지금은 그런 말 안 해?"
"안 하려고 해. 근데 도무지, 어떻게 해도 살기 싫을 때는, '살기 싫어'라는 말 대신 '딸기 시럽'이라고 해. 그러면 좀 달달해 보이잖아. 발음도 비슷하고."
사람
눈사람이 말했다.
"저 좀 얼려주세요."
지금은 8월이었다. 주변에 다른 눈사람은 당연히 없었다. 고독한 눈사람은 이미 머리가 반쯤 물이 되었다. 눈사람은 나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리고 있었다.
"저에게 차가운 말을 건네주세요. 모진 말로 제가 정신을 차리게 해 주세요. 저에게 오는 말은 언제나 미적지근한 말들이었어요. 그래서 지금 이렇게나 흐물흐물하답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했다. 그리고 눈사람의 앙상한 팔을 살며시 쥐며 말했다.
"과연 사람들의 말이 미지근했던 걸까요. 아니면, 당신이 그저 미지근한 사람이었던 걸까요."
미아
라고 제목만 급하게 쓰고, 정작 어떤 내용을 쓰려 했는지 잊어버렸다. 나는 오늘 하루 어느 지점에서 '미아'라는 단어를 떠올렸을까. 내용을 알 수 없는, 어쩌면 귀할지도 모르는 생각이 구천을 떠돌고 있을지도 몰라. 그런 상상을 하니 조금 죄책감이 들었다.
모기
"다리 떨면 복 나간대."
"그거 모기들이 지어낸 말이야. 가만히 있어야 물기 쉽잖아."
알아
"당신은 저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죠?"
"당신은 아마도 여름에는 얇은 옷을 입을 겁니다."
"그리고요."
"아마도 겨울엔 두꺼운 옷을 입겠죠."
그 말에 당신이 안타깝다는 듯이 이야기했다.
"차라리 모른다고 하는 게 어때요?"
타협
"점점 현실과 타협하게 되는 거 아닐까. 과거의 꿈같은 건 다 잊어버리고. 그런 게 어른이 되는 과정일까 봐, 그게 가끔 비참해질 때가 있어."
"글쎄. 현실과 타협하는 게 나쁜 거야? 허황된 꿈을 꾸는 것보다는 낫겠지. 자기가 뭐든지 할 수는 없다는 걸 깨달은 사람이야말로 진짜 어른스러운 거라고 생각해 나는."
마감
몸을 웅크린 남자가 내 앞에 있었다. 그는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 자신을 보호하려고 몸을 수그렸다. 제 실력이 많이 미숙했습니다, 제가 많이 부족합니다, 그런 말들을 하다가 시간만 갔다. 저기요, 그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이제 곧 공모전 마감 시간이에요. 너무 몸을 웅크리고 있었던 탓에, 이대로 근육이 굳어버렸어요. 할 수 있는 일이 없네요. 그저 참여에만 의의를 두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참여에만 의의를 두신 지 벌써 삼 년 째인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