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질 결심>을 보는데, '서래 씨는요. 몸이 꼿꼿해요.'라고 이야기하면서 자기 연심을 드러내는 장면이 있었어요. 속으로 '어쩌면 저 주인공도 허리가 아파서, 꼿꼿한 사람이 좋았나보다.' 하는 그런 해석을 하곤 했어요.
8월 초에 갑자기 허리를 다치고, 다리를 쓸 수 없으니 육지로 올라온 인어처럼 맨날 누워서 생활했어요. 기대하던 약속들도 다 취소되고, 그런 스트레스가 엇나가서 친했던 사람들과도 손절되고, 모든 게 물거품이 된 것 같은 그런 시기. 이제는 그나마 걸어다닐 수 있게 되니 여름이 가려고 하네요. 몸도 마음도 아팠던 만큼, 지금의 나는 이전보다 조금 더 성장했기를 바라며, 25개의 이야기를 준비했습니다.
어림
나는 무언가를 어림하는 것이 언제나 어려웠다. '이 정도면 딱 20kg 정도 될 것 같은데요?' 같은 말들을 하는 사람이 부러웠다. 읽어야 하는 서류들을 쌓아놓고또다시 '오늘 안에 다 할 수 있어요'라고 말했다. 그녀가 이야기했다.
"나는 일할 때 셈을 해. 내가 읽어야 할 텍스트가 120장이야. 그러면 한 장 당 1분씩 읽어도, 쉬지 않고 읽어야 120분이 걸린다는 뜻이잖아.
지금 읽어야 되는 텍스트가 근데 몇 장이야? 뭐, 400장? 근데 오늘 안에 한다고? 어림도 없겠다."
허리
사람의 등 아래쪽을 만져보면 움푹 들어간 삼각형이 느껴진다. 거기를 손으로 누르면서 걷다 보면, 한 걸음마다 상당한 압력이 가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걸 알아챘을 때 좀 더 소중히 할 걸. 언제나 자기 몸의 소중함은 아프고 나서야 알아챈다. 밥을 먹을 때도 허리에 힘이 들어간다는 걸 알아챈다. 아무렇지 않게 걷고 있던 그때도, 실은 그 '아무렇지 않음'을 위해 허리는 묵묵히 견디고 있었나 보다.
취기
술자리에서 나는 사람들의 템포에 맞추려고 억지로 술잔을 기울이곤 했다. 때로는 바닥에 버리면서까지 템포를 맞추는 데에 집중했다. 어느 날 나는 돌아오는 택시에서 토하고, 그의 부축을 받아 겨우 집에 도착했다. 취기에 그런 얘기를 했다.
"저도 술 잘 하고 싶어요. 근데, 어떡해야 될지 모르겠어요."
그는 나를 침대에 눕히고는 가만히 이마에 손을 대며 말했다.
"마시기 싫을 때는, 마시지 마. 마시기 힘들 때도, 마시지 마. 자고 싶을 때는, 자. 그렇게 자기 자신에게 잘 해줘. 술한테 잘할 생각 하지 말고."
안해
나는 옆집에 사는 조카에게 같이 드라이브나 가자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부스스한 눈으로 문 앞에 나온 초등학생 아이가 다음과 같이 거절했다.
"오늘은 아무것도 안 하는 날이에요. 죄송해요."
"나는 뭐라도 하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던데."
"그건 언니가 생각을 해서 그래요. 아무것도 안 하는 날에는, 아무 생각도 하면 안 돼요. 일 생각도 하면 안 돼요. 친구랑 어떻게 하면 화해할지 생각해서도 안 돼요. 컴퓨터도 하루 정도는 꺼둬야 다음날 잘 돌아가잖아요. 사람도 하루 정도는 놔둬야 해요."
"근데, 너 지금 나랑 대화하고 있잖아. 아무것도 안 한다며."
그 말에, 집에 있기 좋아하는 조카가 허를 찔렸다는 듯이 입을 벌렸다.
"어디 핑계를 대고 있어."
과도
사과를 깎아 먹으려고 과도를 들었다. 그리고 문득, '아. 나 사과 깎을 줄 모르지.' 하고. 칼만 손에 쥔 채로 이리저리 흠집만 내다가 시간이 갔다.
무슨 자신감으로 그걸 꺼내 들었을까. 어설프게 깎아 놓은 사과 한 조각을 집어먹으며 생각했다. 그래도 그런 무모함 덕분인지, 입안은 달았다.
그림
'그 사람이 보고 싶었다.'라고 일기 첫 문장을 시작했다. 그리고는 그 문장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볼펜으로 검게 칠해버렸다. 애초에 그리움이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애초에 만남도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그러다가 일기를 다 쓴 후, 남는 공간에 다시 그 문장을 썼다. 나는 오늘 당신을 그리워했다. 누군가에게 하소연하듯.
휴식
오늘 두 글자 산문은 허리를 다친 관계로 하루 쉬어갑니다. 건강이 제일입니다.
계산
"곰은 자신의 사랑을 위해 백일이라는 시간을 견뎠고, 견우와 직녀는 다시 만날 때까지 일 년이라는 시간을 버텨야 했어. 너와 다시 만날 때까지, 나는 앞으로 얼마큼의 시간을 더 견뎌야해?"
광복
"광복절 복 많이 받으세요."
사촌한테 온 문자에 그렇게 쓰여 있었다. 나는 그때 고등학생들 상대로 학원에서 수업을 하고 있었고, 남몰래 웃었다.
그런데 어쩌면 막 광복절이 생긴 때에는 그런 식으로 축하하는 말도 있지 않았을까. 서로가 되찾은 복을 오순도순 나눠가지면서. 비록 지금 앞에 있는 아이들은 광복의 뜻도 모르는 듯하지만, 어쨌든 오늘은 누구나 행복해야 하는 날임에 분명하다.
반성
"반성해."
"죄송합니다."
"뭘 잘못했는데."
"A구역 청소를 안 한 점입니다."
"A구역은 네 담당 구역이야?"
"아닙니다."
"근데 왜 네가 반성해? 너는 네가 잘못한 영역에 대해서만 반성해야지. 사과하라는 게 아니잖아, 반성하라고."
남는
"내가 죽으면, 그날은 모든 사람들이 나를 사랑해주겠죠?"
그녀는 또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센티멘탈하기 그지없는 중학생의 등에 초음파 기계를 문지르며, 간호사는 묵묵히 이야기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죽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르죠. 근데, 그때 주변 사람들 마음속에 남는 건 사랑이 아니라 '죄책감'이에요. 평생 해소할 수 없는 그런 죄책감이요. 죄책감은 사랑이라고 안 해요. 아쉽다 그죠."
뻑겁
1.
그들은 화면 너머로 인간 136호를 보고 있었다. 136호는 어제부터 사료도 잘 먹지 않고, 입학식 날 아침이 되었는데도 케이지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지금 저 생명체가 느끼는 감정은 뭘까?"
"겁, 먹은 것 같은데요. 아무래도."
"그러면, 그 이유는 뭔데?"
"잘하고 싶나 봐요. 근데 잘 못할까 봐 저러겠죠."
2.
"일단 '위로 치료' 해야겠지? 용기 좀 넣어줘 봐."
선배 연구원이 케이지의 스피커와 연결되어 있는 마이크를 후배에게 들이밀었다. 후배는 목을 가다듬고, 136호, 라고 운을 뗀 후 단호히 얘기했다.
"넌 못할 거야. 아마 실패할지도 몰라."
136호가 이불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옆에서 듣던 선배 연구원이 마이크를 끄려고 했다. 그러자 후배 연구원이 이어 말했다.
"근데 처음이잖아. 당연한 거 아니야?"
냉면
"너 지금 냉면 자르고 있는 거야?"
"잘라 먹으면 안 돼?"
"그건 면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누구나 냉면을 가위로 잘라 먹을 권리는 있어."
면발 가닥을 명줄로 생각해서 끊어먹으면 안 된다는 얘기도 있지만, 그렇게 건강을 챙기고 싶으면 밀가루 자체를 먹지 않는 게 맞다.
아픔
어느 각도로 우산을 기울여도 빗방울이 자꾸만 안으로 들어왔다. 자신의 흠뻑 젖은 다리를 보며, 그는 '그런가 보다'라고 또 생각했다. 수화기 너머에서 딸이 이야기했다.
-아프진 않았어요? 마취도 못 하는 수술이라면서요.
"아냐. 안 아파."
그의 딸은 어릴 적에 반년 넘도록 사경을 헤맨 적이 있었다. 그는 그런 딸의 모습을 보고 난 후로, 자신이 겪는 모든 아픔에 '이까짓'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왔다. 이까짓 거, 아파해서는 안 된다.이까짓 거, 네가 겪었을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면서 점차, 아플 때 '아프다'는 말을 꺼내는 방법을 잊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는 묵묵히 집으로 돌아가면서, 쿡쿡 쑤셔오는 아픔에 다시금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네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이 마음을 뒤흔들고 지나갔다. 한번 그 회오리가 지나가면 나는 마음이 복구될 때까지 가만히 있어야만 했다.
그날 밤 나는 혼자 그네에 앉아 있었다. 마음이 무너져내린 현장에 여러 사람들이 오갔다. 개중에는 함박웃음을 짓는 사람도 있었고, 나는 그 웃음소리에 마음이 뒤흔들릴까 봐 그네를 움직여댔다. 삐걱거리는 그네 소리가 사람들이 내는 소리를 잡아먹어줬다.
이제 가야지. 집으로 향하던 도중 뒤를 돌아보니, 여전히 그네는 삐걱, 삐걱 소리를 내며 흔들리고 있었다. 사람들의 주위를 끌려는 듯, 그렇게 마치 타인들이 내는 소음으로부터 나를 지켜주려는 듯.
기분
"지금 어떤 기분인데."
"잘 모르겠어."
"네 기분인데 왜 네가 몰라."
어느 순간 우리는 자기가 느끼는 감정이 무기력함인지, 아니면 지나친 우울인지, 아니면 그냥 무덤덤한 것인지, 무덤덤한 척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의사가 증상을 설명해달라고 할 때, 좀처럼 아픔을 설명하기가 어려운 것처럼.
그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버티는 것. 누군가의 어깨에 기대든지, 혼자 자신의 어깨를 토닥이든지. 불가사의한 감정들이 지나갈 때까지, 오늘도 잘 먹고, 잘 쉬고, 잘 자고.그럴 예정이다.
은인
"저는 그 애를 위해서 많은 것을 해주었고, 그 애의 아픔에 진심으로 공감하고, 위로했습니다. 그 애는 처음에 저를 생명의 은인이라고 얘기했어요. 근데 왜 결국 저는 그 애와 멀어져야 했죠? 이건 불공평해요."
그 말을 들은 점성술사가 말했다.
"본인이 은인이라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었던 탓이겠죠."
노을
"이렇게 저물어버리는 거겠죠. 아무리 열심히 달려도, 결국에는 지평선 아래로 추락하는 거겠죠. 저 노을처럼."
우리는 강변에 앉아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큼 시간이 지났을까, 그녀가 얘기했다.
"해는 늘 그 자리에 있어. 네가 착각하고 있는 거야."
급체
"활자를 너무 많이 드셨나 봐요. 체하셨네요.
한 번에 글을 너무 많이 복용하면, 지금처럼 깊은 물에 빠진 것 같은 느낌이 올 수도 있어요. 주로 벼락치기하는 고등학생이나, 과제 마감을 앞둔 대학생들이 많이들 걸려요."
"그럴 땐 어떡해야 돼요?"
"토하고 싶을 땐 토하셔도 돼요. 노래방에 간다든지, 뭔가 쓴다든지. 몸 안에 쌓인 글자들을 자꾸 밖으로 배출해야 돼요. 그리고 글은, 자주 드시는 건 좋은데, 한 번에 많이 먹으면 탈 나요. 다음부턴 미리미리 하세요."
울어
초등학생 조카를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얘도 매일같이 울던 때가 있었는데, 하고. 어쩌면 지금 나이대라면, 갓난아이였던 자기가 왜 그렇게 울었는지를 기억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물었다.
"옛날엔 맨날 울었는데, 왜 지금은 안 울어?"
그러자 조카가 과자가 든 입을 우물거리더니, 이내 답했다.
"많이운 거예요. 미리미리."
미리미리. 나는 그 말이 그렇게 들렸다. 다들 자라면서 울음을 참길래, 자기는 갓난아이일 때 미리 많이 울어두었다고. 나도 더 울어둘 걸.
ㅡ
이사
집은 집주인과 서로 연동되어 있다.
주인의 정신이 혼잡해지면 집도 자연스레 어질러지고, 집주인이 비로소 집을 청소하기 시작하는 때는 보통 혼란스러운 일들이 어느 정도 정리된 뒤다.
이사하고 난 후 처음으로 빈집을 마주했을 때, 내 정신은 무척 공허했다. 아무것도 없는 하얀 벽이 무척 싫었다. 그러나 그런 감정들이 지나간 후, 무드등을 사고, 쿠션을 사고, 그렇게 하나하나 물건들이 들어섰다. 공허했던 마음에 그렇게 설렘이 들어찼다. 비워있으면 채워나가면 돼. 그건 집뿐만 아니라 마음도 마찬가지인 모양.
ㅡ
활활
"농담으로 여기셨다가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불에 떨어질 겁니다."
지하철이 정차하고 있는 사이 눈앞에 있던 할머니께서 계속 되뇌셨다. 그 이야기를 들은 영우는 활활 타오르는 지옥불을 머릿속으로 그려보고자 했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그런 불이라니.
'가스비 걱정은 없겠네.'
그러자 옆자리에 앉아 있던 남편이 할머니를 보며 얘기했다.
"라면 끓이면 금방 익겠네요."
ㅡ
부끄
"내가 해왔던 말, 행동들이 있잖아. 그게 지금, 너무 부끄럽게 느껴져. 지금 하는 일도 전부 나중이 되면 부끄러워질 거야. 그렇게 생각하니까,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공주는 두 손을 모은 채로 침대 위에 가만히 누워 있었다. 시녀가 공주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며 이야기했다.
"아가씨, 모든 일들은 시간이 지나면 부끄럽게 느껴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지금의 자신에게만 떳떳하면, 그걸로 된 겁니다. 어서 일어나셔요."
ㅡ
좋다
아침 6시에 지하철이 용산역에 도착했다. 기차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들은 문이 열리자마자 일제히 계단으로 뛰어갔다. 나도 그 사이에 끼어, 같이 뛰어갔다. 생판 모르는 사람들과 같은 방향으로 뛰고 있는 모습에 어딘지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엘리베이터에서 다 같이 층이 바뀌는 것을 바라볼 때처럼, 테니스 경기 중 오가는 공을 따라가느라 다 같이 고개를 돌릴 때처럼, 사람들이 같은 방향을 응시하고 있다는 게 이상하게도 든든해서, 나는 나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렸다.